〈 457화 〉1부 19장 13
간부의 영혼과 정령의 힘이 별개로서 존재한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설야의 루살카.
딸인 석하랑에게 정령 설야의 힘이 고스란히 옮겨졌고, 간부의 힘은 광검 허윤환에게 봉인되었으며, 영혼은 아나스타샤.
루살카가 자신의 옛 육체를 통해 광검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것에서부터 아이디어를 착안하였고, 정령과 간부 두 명을 동시에 살리는 계책을 세웠다.
아바타 프로젝트.
그를 위해 펜릴과 절풍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고, 아르엘과 절풍을 뱉어낸 펜릴은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당연히 나는 그걸 바로 괴인으로 되살렸다.
나머지는 절풍을 아르엘에게서 뽑아내는 것.
이미 싱크로를 한 몸이지만 절풍은 스스로 아르엘과의 싱크로를 거부하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따라서 도망칠 곳은 없었고,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절풍의 코어를 낚아채 마력으로 봉인했다. 절풍이 아르엘과 실오라기만큼의 마력이라도 서로 이어놓았다면 아르엘에게로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절풍은 칼같이 아르엘과의 연결을 잘라냈다.
그리고 나는 절풍의 코어, 영혼을 가지고 히카리의 연구실로 바로 귀환했다.
펜릴과의 전투를 기다리던 이들은 모두 허탈해했지만, 어차피 조만간 싫어도 계속 싸워야 되는 만큼 나는 다음 기회를 노리라며 그들을 다독였다.
이후의 과정은 간단했다.
괴인 펜릴의 몸을 스캔하여 히카리가 빠르게 바이오로이드의 본을 만들었고, 유나와 히드라 콤비가 즉석에서 소체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바이오로이드를 만들기를 바랐지만, 유나는 모처럼 하는 거 열심히 하겠다며 자신의 육체를 참고하여 아예 호문클루스에 준하는 존재를 만들어냈다. 여신의 권능으로 단 1초만에 만들어버린 육체에 히카리는 눈물을 질끔 흘렸다.
바이오로이드에 들어갈 풍속성 S급 코어는 은유하와 카르나가 구해왔다.
내 기억을 더듬어 그린란드 일대를 이잡듯이 뒤진끝에, 풍속성 S급 괴수를 찾아 괴수 째로 한국으로 들고와 해체를 했다.
절풍의 정신과 코어를 분리하는 작업은 루살카와 환룡이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환룡은 루살카가 아나스타샤에 깃든 과정을 역순으로 밟아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절풍의 정신에 접근했고, 내게 공격을 당해 정신을 잃은 절풍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환룡에 의해 정신과 코어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창염개진을 외치며, 절풍의 힘을 괴인 펜릴에게 깃들게 하였다.
덕분에 펜릴은 정령의 힘을 가진 사도가 되고 말았다. 그냥 두게 된다면 펜릴은 내가 죽으며 사망하겠지만, 아르엘의 몸에 깃들게 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르엘도 살리고, 절풍도 살리고, 펜릴도 살렸다.
루살카 왈.
- 사랑의 힘은 역시 대단한 것 같아.
이 모든 계획의 시발점이 루살카가 어린 체형으로 광검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의지라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완벽한 플랜이었다.
* * *
절풍에게 그 장황한 설명을 전해준 이후. 나는 절풍만 따로 불러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절풍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이해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편해서 그런 거지."
"그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그대는 정녕 무슨 생각으로 그런 도박을 벌인 거지? 펜릴이 진심으로 너를 도와서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믿는가?"
"네."
"이런 미친."
절풍은 답답하다는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걸 믿는다고?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그러는가."
"펜릴에게 민트초코 맡기는 소리긴 하죠. 푸흐흐."
"본인은 그대와 말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죄송.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서. 장난은 아닌데, 당신이 걱정하는 부분은 이해해요. 하지만 펜릴에 관해서는 당신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펜릴 또한 본인의 일면임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물론."
절풍은 또다시 답답해 미쳐버리겠다는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지하게 대답하시지. 도대체 펜릴을 신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괴인에 대한 절대명령권같은 말은 하지 마시게. 이미 괴인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오염된 마력을 모두 정화하고 새로운 소체에 집어넣었으니, 순수하게 사도라고 할 수 있죠. 괴인에 대한 명령권을 믿는게 아녜요. 제가 믿는 것은 이것."
나는 내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여기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런가."
절풍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정령 중에서 가장 히어로 감수성이 깊은 절풍으로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인가. ......그게 그대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군. 부디 그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절풍의 힘과 이름, 그대에게 맡기마."
"......."
진짜 이유.
- 그 새끼가 방심만 안했어도 테라가 멸망하는 일은 없었단 말이에요. 성주놈 왔을 때 바로 나한테 달려왔으면 되는데, 괜히 지 혼자 상대하겠다고 깝치다가....
창염이 절풍을 더럽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 * *
절풍은 순순히(?) 내게 자신의 힘을 맡겼다.
한 번 패배했던 이가 복수의 칼을 갈며 성주에게 일격을 날리는 그림도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칼을 담금질하고 날카롭게 벼려야하는 시간은 한없이 부족했다.
[나사에서 연락이 왔어. 지금 명왕성, 화성 궤도에 진입했다. 일단 엄청 천천히 오고 있기는 한데, 움직임이 좀 그래. 뭔가 확신이 들면 바로 쳐들어오겠다고 간보고 있는 느낌?]
"정확해요."
원로원이 사실상 붕괴되고 현역으로 복귀한 유영호의 제보 덕분에 나는 더 시간이 없어졌다.
"지금 지구를 정밀스캔하고 있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지금 내려가도 좋은가."
내가 펜릴을 잡는 사이 성주는 명왕성을 끌고 목성을 지나 화성에 진입했고, 아주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며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시각이지만, 의외로 시간은 얼추 맞아떨어졌다.
"성주는 아마 2주 정도 뒤에 달에 도착할 거예요. 그러고 약 한 달. 한 달 정도 지구에 멸망의 씨앗을 퍼뜨릴 겁니다."
[테라사이트? 테라리스트? 네가 그 자료로 보내준 이형의 괴물?]
"둘 다 맞아요. 한 쪽은 당신, 다른 쪽은 백희아가 명명한 이름이니까."
테라의 페러사이트, 기생충. 테라에서 온 테러리스트. 원작 극후반에 쏟아지는 괴물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짓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졌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력에 기생하는 벌레인데, 숙주의 정신을 오염시켜서 폭주하는 괴인으로 만들어요."
[자연발생체에 대한 정보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있어. 실제로 원로원 활동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 쪽으로는 너무 걱정하지마.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괴인을 컨트롤하고 있으니까.]
"네. 마음같아서는 코어 다 깨뜨리고 싶은데, 그러려고 하니까 다들 한사코 반대를 해서 어쩔 수 없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괴인들 폭주 안하게 하나하나 베일 만들어서 보내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설득력이 없어요, 이 아가씨야.]
"...그건 말 안하기로 했잖아요? 흠흠."
능글맞게 웃는 유영호를 보니 살짝 짜증이 났다. 청송의 마수에서 구해준 이후 세계의 진실에 관해 얘기해주고 거래를 했더니, 저 인간도 나를 은근슬쩍 골려먹으러 들었다.
"됐어요. 그보다 이름은 정했어요?"
[화제 전환하는 거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런 화제라면 어쩔 수 없지. 세 개 정도 있는데 뭘로 할래?]
"말해봐요."
[절풍, 질풍, 신풍.]
"미쳤어요? 이런 시국에?"
하나는 원래 이름이고, 나머지 둘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유영호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는게 나한테 로비들어온 이름이었다. 절풍은 기존에 원로원에서 내가 살짝 흘리니까 좋다고 넙죽 받은 이름이고, 질풍이랑 신풍은 어디서 로비 들어왔는지 알지?]
"그래서 먹었어요?"
[꺼억.]
트름을 하는 유영호의 모습은 밉지만 싫지는 않았다. 로비를 했음에도 그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니 이제 유영호에게 로비는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유영호가 벌어들인 돈은 어마무시하니까.
"나중에 결혼할 때 잘 쓰도록 하세요."
[아픈 곳을 찌르네. 야, 네가 내 혼삿길 막은 바람에 나 평생 솔로로 사는 거 아니냐?]
"세뇌당해서 집에서 매일매일 집안일하고 착취당하고 떠받들고 살면서 기빨리고 싶으면 그러시던가요."
[쳇. 하여튼 말 한 마디를 안 지네.]
유영호가 나와 밀약을 맺은 가장 큰 이유. 그건 유영호가 미래에 청송-문신사에 의해 세뇌당하여 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유부남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일은 일대로 빡시게 하면서 집에 들어가면 집안일은 100% 독박을 쓰고, 부부생활은 청송이 하고싶을 때만 하고, 벌어들이는 돈은 전부 청송이 쓰는데 본인은 용돈 20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는 미래를 내가 차단해버렸기 때문. 믿기 어려웠겠지만, 나는 유영호가 속내로만 가지고 있던 미래의 청사진을 읊어주는 것으로 유영호의 완전한 신뢰를 얻었다.
"그럼 뒷돈 챙긴 집정관 나으리. 빨리 정해주시겠어요? 이제 가서 말해줘야한다고요."
[슬슬 공주님 깨어나셨냐? 쯧.]
유영호는 이명도 이름도 아닌 신분으로 부르며 혀를 찼다. 굳이 따지자면 절풍과에 속하는 그로서는 당연히 아르엘이 탐탁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도 아르엘이 당장 주전력으로서 활용 가능하다는 건 이해했다.
[...SSS급 이능력자의 이명을 정해주는 건 영광스러운 일인데 왜 이리 하기가 싫을까.]
"그러지 마요. 걔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아이라고요. 당신, 제가 스포하게 되면 바로 아르엘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게 될 걸요?"
[스포가 뭔데. 뭐, 가웨인이 실은 프랑스인이었고 영국 여왕한테 강간당한 거? 아르엘 때문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잃어서 유기한 거? 친딸을 남들 몰래 수차례 독살하려고 들었다가 옆에 붙은 고양이 때문에 포기하게 된 거? 아무리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 않다고 해도 그렇지.]
"여왕, 원로원 중의 한 명이에요. 테라를 침략해서 테라의 영국 초대 황제를 꿈꾸는 사람?"
[개씨발년이네? ......크흠, 흠흠!!]
시원하게 쌍욕을 박고 부끄러워하는 게 참 유영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주 지휘도 그렇기는 했지만, 확실히 집행관 백희아보다는 조금 더 덜 딱딱하고 친숙한 지휘관이었다.
"가정교육부터가 글러먹었다 이거죠. 백설공주 알죠? 거기 마녀같은 존재예요."
[마녀는 계모 아니었냐? ...하아, 됐다. 이 얘기 그만하자. 괜히 내 생각이 흔들릴 것 같아.]
"언제나 악당이 가진 사연을 들으면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법이죠. ...흔들리라고 일부러 말한 건 아녜요. 어디까지나 그런 사람의 밑에서 자란 존재다, 뭐 그런걸 감안해달라는 거죠."
[네 미래 아내라도 됐냐?]
"네."
[미친. 그러니까 그렇게 감싸고 돌지.]
유영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짓 했으면 칼같이 태워죽였을 거면서, 굳이 살려주겠다고 오지랖을 부린 이유가 있었네. 넌 빡치지도 않냐? 전여친 때문에 네 인생 말아먹을 수도 있었는데?]
"......미운 정도 정이잖아요?"
[솔직히 톡까놓고 말하자. 예쁘니까 다 용서된다, 뭐 그런 거냐?]
"다는 아니고."
20년 전의 스노우볼을 굴린 당사자가 다름아닌 기억없는 나였기에 내가 뭐라고 하기에는 난감했다.
'펜릴이 옆에서 붙어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펜릴에게 헛바람을 넣지 않았다면 펜릴은 계속 북해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었을 것이고, 숲에 버려진 아르엘은 누가됐든간에 구해줬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찾아 나서는게 주요 이벤트의 골자였고, 유일한 힌트인 자수정 보석을 찾기 위해 활동을 하는 이유였다.
"당신도 아직 청송이 한 행동들, 이해하려고 들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청송 면회가고 그러지."
[그걸 어떻게 알았.... 아니, 그, 그건 뭐냐, 어디까지나 히어로로서 빌런을 계도하기 위한 재사회화 과정으로....]
"몸정이 마음정되고 미움정 된다 이거죠. 속궁합 잘 맞는 여자는 잊기 힘들죠? 푸흐흐."
[이 씨발?]
유영호는 두 가지 의미로 빡쳤다. 자신의 성생활이 들켰다는 것에, 그리고 그걸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나의 정보에. 유영호는 금방 내 말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해하라고 말한 것이었으니.
"진퉁 여왕님 플레이 가능."
[와, 이 개새, 쓰레기, 와, 와.... 희아도 모자라서, 와.]
"뭘 자꾸 와라고 하는 거예요. 직접 날아가요?"
[내가 진짜 상종을, 어휴, 됐다! 공주님이랑 펜릴 이명은 내가 따로 날려줄 거니까, 당분간 연락하지마!]
뚝. 유영호는 성질을 부리며 연락을 끊었다. 나는 [신호 없음]이라는 화면 표시에 얼척이 없었다.
"지가 연락해놓고는...."
굳이 이명을 본인이 직접 정해주겠다고 연락을 해놓고 나보고 연락을 하지 말라니. 애초에 연락할 일도 없기는 하지만, 기분이 팍 상해서 연락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띠링.
마도기어에 메세지가 도착했다. 집행관 백희아의 문자였다.
-방금 집정관이 이라고 보내기만 했는데, 이거 도대체 뭐예요?
"하여튼 2자 성애자 아니랄까봐."
겨울철에 부는 바람이라. 겨울이 가까워지는 시기에 새로이 태어난 풍송성 이능력자인 만큼 딱히 나쁘지도 않았고, 뭣보다 정령 감수성에도 걸맞는 이명이었다.
"별 건 아니고, 김펜릴의 새로운 이명이에요. ."
이제부터 김펜릴은 삭풍 삭풍 하고 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