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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63화 (463/1,497)

〈 463화 〉1부 19장 19

그는 칼같이 답했다. 청화, 청화라.

"푸른 불꽃? 창염이랑 다를게 없잖아요."

"대놓고 창염이라고 부르면 나중에 걸리잖아. 그러니까 이름을 바꾸는 거지. 이름이 직관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내 얼굴을 꽉 붙잡으며 씩 웃었다.

"너와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네가 될 거야. 스판덱스 무궁화 보이, 청화(靑花)가 아니라."

"......그럼 당신은?"

"글쎄, 네 히로인? 후후."

아.

정말.

"......재수없어."

화륵.

히어로가 히로인을 공략해야지, 히로인이 히어로를 공략해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 * *

D-1002

기초 공사는 끝났다. 그는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큥큥하고 싶다느니 중얼거렸고, 나는 그가 조금 선을 넘는다 싶으면 곧장 태워버렸다.

"롸하!"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죽음을 일일이 세고 있었다. 내가 직접 죽인 만큼 헤아릴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세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고, 정말 생각보다 많이 죽였다 싶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죽을만 해서 죽었으니까.

"예스, 큥큥!"

그는 신난 얼굴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신혼집 꾸미기를 해보겠냐는 제안에 나는 그만 덜컥 고개를 끄덕여버렸고, 그는 정말 진지하게 나와 그가 지낼 신혼집...을 꾸몄다.

"롸 양, 중문은 다는게 좋겠지? 없앨까? 그래도 창문인데 깨먹을 수 있잖아."

"베란다는 확장형이 좋으려나.... 공간이 넓은게 더 보기는 좋을텐데. 어떻게 생각해?"

"벽지 디자인은 온통 푸르게? 그건 너무 정신병원 같지? 포인트 벽지로 푸른색을 넣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는 혼자서 결정해도 될 문제를 하나하나 내게 물었고, 나는 그의 말이 귀찮기는 했지만 일일이 다 대답해줬다. 안 그러면 삐칠 것 같은 얼굴이었고, 다른 곳도 아닌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는데 아무렇게나 하라고 할 수 없었다.

'무슨 방을 만들지 알고.'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데스디나스 호에서 백희아의 묵인 하에, 지휘관 실 옆 이라는 이름으로 떡집을 차린 것을. 그곳은 때때로는 물침대가 들어가고 때때로는 삼각목각인형이 들어가는 등 상담 대상의 취향에 따라 방 내부 인테리어가 바뀌고는 했다. 예를들어 천가을의 경우, 온갖 SM플레이가 판을 치는 교도소 타입의 상담실이 만들어졌다.

"흐흥, 침대는...."

"저기요."

나는 카탈로그를 살피는 그를 멈춰세웠다.

"이렇게 집을 꾸며서 결국에는 이 집에서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부부간에 할 행위가 할 게 뭐가 있겠어?"

그는 주먹과 손바닥을 퍽퍽 부딪혔다. 노골적인 제스쳐에 나는 잠깐 속이 뒤틀렸다. 나는 카탈로그를 빼앗아 그가 고른 가구들에 담긴 음습하고 교활한 욕구를 까발렸다.

"빈백은 왜 있는 거죠? 석하랑 처럼 함께 누워서 붕가붕가하면서 영화를 보겠다는 생각?"

"...영화 대신 내 기억 보는 건 어때? 1편부터 17편까지 있어."

"식탁 높이는 왜 하필 이렇게 높죠? 제가 반듯하게 눕고 당신이 딱 서면 정확하게 끼울 수 있겠는데요."

"우연의 일치야. 근데 진짜로 그런지 아닌지는 확인해봐야하지 않겠어? 확인해볼래?"

"나중에요. 그리고 마지막. 왜 침대가 하나 뿐이죠?!"

"그야 너랑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잘 거니까!"

나는 카탈로그를 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그는 코가 벌게지면서도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말이 카탈로그지, 의식세계에서는 내 의지에 따라 마음껏 공간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그가 고른 킹사이즈 침대를 구현했다. 그는 침대 위로 나를 집어던지며, 그 위에 올라탔다.

"롸 양. 어때? 이런 집에서 사는 거."

"좋네요. 인간답게 사는 건. 그런데 이런 집 사려면 신서울에서 사야할텐데, 신서울에는 이런 집 없지 않아요? 다 40㎡짜리던데."

눈으로만 대충 훑어봐도 100㎡을 훌쩍 넘는 집은 이 세계의 수도 신서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자촌으로 들어가려고요? 아니면 은유하한테 집 내놓으라고 협박할 셈?"

"아니. 평소에는 호텔에서 지낼 거야. 신혼집은 너를 위해서 끝까지 남겨둘 거고."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주변 환경을 바꿔도 되냐는 신호였고, 나는 그에게 세계의 변환을 허용했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에 우리 신혼집을 호텔방으로 바꿔버렸다.

"짜잔! 평소에는 이렇게 살다가 너를 구하고 나면 집을 구하는 거지."

"호텔값 아껴서 집 사면 되겠구만."

"호텔도 내 걸로 하면 되잖아? 그래. 아예 호텔을 아지트로 만들자. 청화를 위한 빌런 조직 아지트. 어때? 한강 조망이 잘 보이는 여의도에다가 터를 잡는 거야. 야밤에 혹시나 강변에서 슥슥하고 싶으면 바로 내려갈 수 있게."

"슥슥이고 나발이고, 서울 한복판에 호텔을 짓고 대놓고 빌런 짓을 저지르겠다니 간도 크시네요. 황폐화된 서울에 호텔만 번지르르 하게 올라가 있으면 다들 의심할 걸요?"

"그럼 서울을 복구하면 되지. 처음부터 서울에 터를 잡는 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와 미리 만들어놓은 플랜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기분에 살짝 화가 치밀었다.

"장난해요? 아까까지 그렇게 싸워서 신서울에 잠입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뭐? 서울을 복구? 당신 또 죽어볼래요?"

"아냐, 아냐. 롸양. 잘 생각해봐. 원래 한강 유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에서 중요한 곳이라고. 평양에 있는 핵고양이에 대한 견제, 중국 핵쟁이에 대한 견제, 그리고 동시에 선꼬삼에 대한 견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거지."

"......나 안 도와줄 거예요, 어디 한 번 씨부려봐요."

"후후, 삐졌구나. 그냥 들어봐. 일단 듣고나서 판단해."

그는 내게 자신의 계획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서울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자, 서울 전역을 복구할 수 있는 자, 정부의 압박에서 서울을 정치적으로 지켜낼 자. 그들과 청화단이 서울을 지키며 발전시켜나간다는 계획은 절로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예산은요?"

"글쎄. DMZ 내려오는 놈들 잡아다가 코어를 유하에게나 팔까?"

"미쳤어요? 은유하 걔가 떼먹는 돈이 얼만데. 외국에 팔면 100억은 넘을 걸 후려치고 후려쳐서 33억으로 부를 애라고요."

"대신 거래처 확보 및 내수경제 활성화를 통해 유하랑 희아에게 점수를 동시에 딸 수 있지. 67억이 모자라면 그만큼 더 벌면 그만 아닐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말이야."

그는 내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우리 롸 양 나중에 서울에서 살아야지. 서울이 네 무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좋은 계기가 될 거야. 우리 신라, 그리고 피닉스-그러니까 가 서울에서 죽지 않는다는 걸 시위하는 거지. 그곳에 살아감으로써."

말은 번지르르했다.

"서울에 넓은 집 구해서 17명이랑 한 집에서 살면서 방 하나씩 주고 떡치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해봐요."

"서울에 넓은 집 구해서 너랑 한 집에서 살며 17개 방마다 다른 플레이로 하고 싶은 걸. 이 방은 중세 귀족 저택, 이 방은 스파, 이 방은 서재.... 아예 방 하나를 카페로 만들까? 우리 라 아가씨 케이크 먹으면서 나도 같이 먹을 수 있게."

"나도 같이 '신라'를 먹는다?"

"이그젝틀리."

와장창!

나는 그를 유리창 밖으로 집어던졌다. 아마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이제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수 있으니 금방 날아서 오거나 걸어서 올라오리라.

"딸기 케이크 먹으면서 장난친다니, 최악이에요."

나중에 민트초코 괴인들에게 강제로 민트초코를 퍼먹는 저주나 걸려라. 나는 호텔방에서 그를 조용히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은 뭐가 좋을까요."

이왕이면 다른 여자들이랑 안 해본 첫 경험을 주고 싶은데....

'전부다 이유나에서 걸리네.'

이유나랑 안 해본, 그리고 다른 히로인과 해보지 않은 플레이가 뭐가 있을까. 나는 그가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이랍시고 보여준 기억을 훑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라클이 마음대로 선정한 케이스', 줄여서 에 해당하는 기억들이었고, 그 속에는 그가 16명의 게임 속 히로인들과 저지른 온갖 플레이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온갖 플레이 경험은 유나만으로도 인간 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히 모든 플레이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괜히 열이 받아서 일일이 하나하나 기록을 대조해보았다.

"야외플...유나랑 샤오린에서 패스. 수영장...유나랑 박라온에서 패스. 교복 플레이...유나랑 누리에서 패스. SM...유나랑 천가을에서 패스. NTR은...아무도 없네요? 근데 이건 내가 싫으니까 패스."

백합 도중에 남자 난입은 좋다고 하면서도 3P 이상은 무조건 본인만 들어가더라. 그의 음험한 속내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그가 가진 소유욕 덕분에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그와 통정을 하게 되면 '나 너 다른 남자한테 앙앙거리는 거 보고 싶어'따위의 말은 하지 않을테니.

"그 대신 다른 여자랑 큥큥하는 건 또 보고 싶다고 할텐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나는 그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그가 원하는 플레이를 추측했다. 과연 그는 나와 어떻게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는 걸까. 단순한 정상위? 그도 아니면 호텔방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연속 정사? 그도 아니면 이유나 코스프레 플레이?

'그건 좀 꼴리는데.'

내가 유나처럼 입고 유나인 척을 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익숙한 행위가 될 것이다. 나는 이유나가 했던대로 하면 되고, 그는 이유나에게 했던대로 하면 되니까.

"......음, 아녜요. 뭔가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네요."

"무슨 방법?"

그는 어느새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음...당신이 저를 혐오하게 만드는 방법?"

"갑자기 왜 그래?"

"글쎄요. 그냥 이건 농담으로 하는 말이에요. 만약에 말이에요, 제가 취향이 NTR이란 말이에요?"

"헙."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 모습에 괜히 장난이 치고싶어졌다.

"그러면...만약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이어지는 것에 제가 정말로 행복을 느낀다면, 그렇게 해주실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진짜 바라는 거거든요. 푸흐흐."

"......후후."

그는 내 가슴과 허리에 손을 올리며 귀에 낮게 속삭였다.

"거짓말이네."

"........"

어떻게 알았지? 내가 속으로 당황한 사이, 그는 내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내가 누구의 피닉스인데?"

"제 거죠. 그러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녜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롸 아가씨는 절대로 안 그럴 거야."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단언했다.

"나 사랑하게 되면 우리 롸 아가씨, 분명 질투에 눈이 멀어서 내가 다른 여자한테 흔들리기라도 하면 그 여자 죽여버릴 무시무시한 분이잖아?"

"...비꼬는 거예요?"

"아니. 팩트지.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고."

그는 나를 안고 눕히며 내 위에 올라탔다.

"그러니까 우리 몸궁합부터 맞춰볼까? 이것만 맞으면 어지간한 건 다 맞을 것 같은데."

"......."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걸 허락으로 생각하고 내 쇄골에 고개를 묻었다.

할짝.

짧게 키스마크를 남긴 그는 손으로 내 아랫배를 쓸고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

푸욱-!

심장을 찔러 불태워버렸다.

"......아직 거기는 허락 안했다고요."

나는 은밀한 곳을 스친 그의 손길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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