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81화 (481/1,497)

〈 481화 〉1부 20장 13

"예, 그러면 그 일은 그리 처리하겠소. 그런데 신관, 중국에는 무슨 일로 다녀오셨습니까?"

"별 일 아닙니다. 잠깐 오랜만에 옛 친구랑 이야기를 나눴을 뿐."

"친구? 오랜만? 신관님 친구 없잖소?"

"...왜 갑자기 사람을 말로 찌르고 그러십니까, 도지사님?"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제가 당신을 놀려보겠습니까! 으허허!"

중절모의 청년, 류천성은 껄껄 웃으며 무릎을 쳤다.

서울시장에서 하늘섬 여의'도'의 행정 관리자가 된 류천성은 S급으로 오르며 신체 나이가 20대 후반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로환동은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하늘성은 세계를 잘못 타고 태어난 모양이다.

"이 노인네가 어찌 친구가 되어드리리까? 맨날 여인네들 사이에 끼어서 정신도 없을텐데, 어디 속 편하게 털어놓을 친우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거 없습니다."

나는 반지를 가리켰다.

"제가 속앓이 할 일 있으면 다 들어주는 사랑스러운 여신님이 계신 걸요."

"니미 씨부럴 또 자랑질은."

하늘성은 곧장 욕지기를 퍼부었다.

"그 여신님이 예전에 나를 어떻게 대했는 지는 아시오?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 양반 아주 개차반이었소. 국회의사당 의장석에 의기양양하게 서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다니깐? 분명 그 날 발 아래에 뭘로 받쳐서 키 높인게 분명하오. 왜냐면 높이가 안 되거든, 높이가."

"......후훗."

죽일까. 자는 사이에 몰래 바이오로이드를 하나 연결해서 때려죽이면 절반 정도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늘성은 당시에 돌아다니던 또라이 개차반이 창염이 아니라 사실 나였다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여러모로 미친 짓을 한게 한 두번이 아니긴 한데, 거 생각해보면 또 귀엽지 않소? 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니. 크흐,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은 못하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복받은 줄 아시오. 어디가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할테니."

"항상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오해로 인해 빚어진 혼란이기는 해도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피닉스로서 저질렀던 모든 오욕은 내가 아닌 창염이 가져가게 되었고, 나는 오롯이 원작 주인공 '신관'으로서의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신관이 사실은 피닉스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불과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제법 많은 숫자가 창염과 피닉스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하늘성은 그 20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나 또한 그 오해를 풀 수 없었다.

- 이런 상황이 된 만큼, 당신은 즐기세요. 당신이 저지른 모든 죄, 저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어디보자...살인, 방화, 폭행, 공공기물파손, 문화재 훼손, 광역 음파 테러 등등. 좀 많긴 한데 어쩌겠어요? 제가 다 뒤집어 써야 당신이 더 편하게 지내지. 푸흐흐.

"......정말 복받은 사람이지요."

이 세계에서는. 나는 뒷말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퇴근 시간인 6시까지 시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나도 그도 집에 갈 준비를 해야했다.

"그러면 아무쪼록 비서 분과의 저녁 식사는 잘 되시길 바랍니다."

"뭐요? 아, 아니. 나와 그 아이는 그런 관계가...."

"백두산 천지에서 나온 S급 호랑이 괴수의 코어가 하나 남았습니다. 회수하는 즉시 잘 달여서 도지사님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마셔도 그 날은 도지사님이 광검이 될 겁니다. 아시죠? 광검 얼마나 절륜한 지. 수천억 분의 1 확률을 뚫고 반인반령을 낳은 자 아닙니까."

"......크흠. 나중에 봅시다. 살펴가시오."

나는 쑥쓰러워하는 그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주고 자리를 떴다. 아까부터 자꾸만 내 옆에서 '있을 수 없어', '이건 말도 안 돼'따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에게 미리 경고를 남겨야 했다.

"환룡. 이제 그만 따라다녀라. 나 이제 집에 가야 돼."

"그치만!!"

영체 상태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환룡은 실체를 갖추어 내 앞을 가로막아섰다.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창염이 네가 피닉스 시절에 저질렀던 모든 걸 뒤집어 써? 너는 원작 주인공처럼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다른 정령들이나 여자들은 그런 걸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너한테 미련을 가지고 앵기고 있고? 이게 뭐야! 완전 너한테만 좋은 거잖아!!"

"당연하지. 성주는 이 세계를 딱 한 사람에게 팔면 그만 아니냐."

성주가 보여주는 이 세계가 꿈이라고 한다면, 그 꿈의 주인공은 당연히 성주의 거래 대상인 나일 것이다.

"아으, 자꾸 너 때문에 몰입감이 날아가잖아. 어여 사라져. 다시 관속으로 들어가. 나는 체험판 좀 더 즐기다 갈테니까."

"...지금 장난해? 너 내가 어떻게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알면서 그러는 거지?"

뚝.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환룡과 마주봤다. 시각은 오후 5시 58분. 아직 2분 남았다.

"뻔하지. 성주가 환상빔 쏘자마자 바로 샤오린에게서 떨어져서 나한테 빙의하려 했던 거 아니야. 그러다가 뭔가 잘못돼서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거고."

"...그걸 알면서 왜 그래? 아니, 질문을 바꿀게. 왜 이 꿈을 계속 이어나가는 거야?"

환룡이 드디어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너, 이 세계에서 바로 탈출할 수 있잖아."

"그렇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늘을 향해 창염개진 한 방 날리면 끝이니까. 근데 그러면 바로 성주랑 거래는 결렬이고 전쟁이지."

나나 성주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소멸하게 되는 치킨 게임. 성주는 그런 상황에서 내게 자신의 제안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설득의 질을 높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거래 사양이야."

"그런데 왜...잠깐만. 너는?"

"그래, 나는."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집 장관님이...조금 더 여기서 있고 싶어 하시거든."

성주는 너무나도 달콤한 제안을 걸어버리고 말았다.

나에게.

나의 속에 있는, 창염에게.

* * *

환룡과의 이야기는 끝났다.

환룡은 충격을 먹었는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고, 나 또한 환룡과 계속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오후 6시 정각.

일몰이 되어 어둠이 찾아오는 시각에는 항상 함께 있기로 했으며, 마침 그 시각이 오후 6시였다. 나는 환룡을 만나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억누르며 현관 문을 열었다.

"나 왔어."

거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예전부터 요리를 직접 해보겠다며 공부를 시작했고, 항상 저녁 식사만큼은 창염이 직접 해왔다. 나를 따스하게 반기는 음식 냄새가 오늘만큼은 전혀 없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안쪽으로 걸었다.

"......다 까발려졌네요."

만삭이 된 창염은 베란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미 창염은 나와 환룡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진작에 다 들었으리라.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으니.

"그렇게 됐네. 내가 다 나쁘다고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 아, 아뇨. 그쪽말고."

"그럼 뭐가?"

"......흐흠,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네요. 됐어요. 환룡도 제가 겪은 충격을 겪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말의 핀트가 잘 맞지 않다고 느낀 건 요 근래 잘 없었는데, 아무래도 환룡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놓쳤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환룡과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창염의 이어진 행동에 기억을 되새기기를 포기했다.

"이리와요."

창염은 자리를 양보했다. 어떤 의자든 창염은 뒤에서 허그를 해주기를 좋아했고, 나는 창염의 본부대로 의자에 앉아 올라타는 창염을 끌어안았다. 가슴보다 볼록하게 부풀어오는 배는 분명히 생명의 태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당신, 정말 행복한 거죠?"

"물론이지."

"......성주에 의해 만들어진 행복인데도?"

"그 얘기는 한참전에 끝난 걸로 아는데."

창염이 굳이 또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역시 환룡이 들쑤셔놓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창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행복하다는 거지."

"내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에요?"

"물론."

창염은 자신의 배에 올려진 내 손을 잡고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생각할게 많은 듯 했고, 나 또한 창염의 생각을 느껴야 했다. 성주가 만들어낸 지금의 미래에, 나와 창염은 더이상 서로의 생각이나 기억을 읽어낼 수 없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바라던 대로.'

실체를 갖춘 창염. 그리고 창염과 별개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피닉스.

성주가 만들어낸 환상은 우리의, 나의 궁극적인 욕망을 구현해냈다. 다른 히로인들이 나에게 엉겨붙는 상황을 만든 서비스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창염이 좋아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창염. 환룡 말을 너무 신경쓰지마. 우리는 우리의 행복에 집중하자."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창염은 고개를 하늘로 올리며 말했다. 옆으로 보인 표정에는 회환같은 것이 느껴졌다.

"제가 이제 이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다면...어떻게 하시겠어요?"

"끝낼 거야. 그게 네 선택이라면."

"당신 의견은요?"

"...난 언제나 네가 듣고 싶은 말을 하지. 흠흠, 잘 들어."

창염이 이렇게 흔들릴 때마다 나는 비슷한 말을 해왔다. 그러면 창염은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고, 나는 그 결론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지. 이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고, 또 다른 애들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과시하며 우쭐대는 너도 사랑스럽고. 유나를 증발시키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후회조차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 다만."

나는 창염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창염은 아까전부터 미세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존중할 거야."

"그게 이 세계를 끝내게 되는 선택이라도? 당신이 죽을 확률이 99%나 되는 도박을 하게 되는 상황이라도?"

"당연하지."

"......당신은 정말 미친 사람이에요."

"그러지 않으면 네 곁에 못 서지."

창염의 몸 떨림이 잦아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이 끝나게 될 수 있지만, 나는 그 선택을 창염에게 맡겼다. 세계를 전부 터뜨려버릴 핵폭탄은 내가 가지고 있지만, 폭탄을 누르는 스위치는 창염의 몫이었다.

창염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셈이었지만, 이 세계에서의 생활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고 한 사람은 다름아닌 창염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은근슬쩍 엉덩이를 부비적거리며 어필을 하는 것처럼.

"그런데 롸야. 20년 동안이나 정신세계에서 지지고 볶고 했는데 더 하고 싶어?"

"......미안해요. 1년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가봐요."

창염은 베시시 웃으며 배를 훅 꺼뜨렸다. 언제 또 알아냈는지 임산부 플레이를 하고 싶다며 배를 부풀리더니, 바이오로이드의 안에 실제 아이가 자라듯 태동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나는 창염의 그런 플레이에 온 힘을 다해 연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창염이 배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다는 건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오늘 밤이구나."

"네. 오늘 밤이죠. 아참, 당신. 저 잠깐만 나갔다 와도 될까요?"

"얼마든지."

창염은 내 위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창염이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누구와 만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 다녀와."

"금방 끝날 거예요."

창염은 베란다의 문을 열고 휙 날아가버렸다. 나는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찬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창염이 떠난 만큼 나는 홀로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나는 환룡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

아.

'원작?'

...한 번 당한 걸 또 당해서 그럴까, 아무래도 환룡은 모든 진실을 자각한 모양이다.

* * *

"당신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잖아요. 책임져요."

"...책임? 무슨 책임?"

환룡은 굴다리 아래에서 쪼그려앉아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게 눈물을 한가득 쏟아낸 것 같았다. 창염은 한참동안 환룡을 내려다보다가 환룡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책임이랄게 뭐 있나. 그냥 제가 그이랑 침대에서 하는 거 보시면 돼요. 흐흐, 초대녀? 아, 물론 그냥 관음만."

"개같은 년 진짜.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요?"

"...너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환룡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창염은 쓰게 웃으며 자신이 가져온 딸기맛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환룡에게도 하나를 건넸고, 환룡은 사탕을 입에 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자세가 꼭 담배라도 한 대 태우는 것 같았다.

"......나 지금 엄청 배신당한 기분이야."

"이해해요. 동화 속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별세계의 사람이었다니 충격을 받을만도 하죠."

"아냐. 내가 지금 배신당했다고 느낀 건 너야. 너."

환룡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창염을 응시했다.

"이 세계가 원래 게임이었다? 너는 그걸 알고 있었고?"

"......세계의 진실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사람이 셋 있어요. 피닉스, 성주, 그리고 나."

창염은 환룡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밖의 말에도 담담히 말을 꺼냈다. 다른 누구보다도 진실에 근접하게 서있던 환룡은 드디어 모든 진실을 알아버렸다.

"우리는 게임 속 존재들이고, 저분은 '플레이어'예요."

플레이어, 였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