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7화 〉1부 20장 29
두근, 두근.
달이었던 땅덩어리는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 뒤로 성주와 똑같은 피막의 날개를 펼치며, 우리가 마련한 원판의 위에 안착했다.
"...모두, 결계를!"
내 지시에 정령들은 신속히 결계를 구축했다. 나의 마력을 제외하고 원판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마력이 정확히 반구를 육등분하며 전장을 만들어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성주가 할 거라고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성주가 저지른 행동에 입이 바싹 말랐다.
"유나, 괜히 쑥쓰럽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뭘요. 저야 직접 싸울 수 있어서 좋은 걸요."
"둘이만 아는 얘기 하지 말고 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나와 반대편으로 넘어간 석하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김펜릴조차도 긴가민가하고 있으니, 다른 정령들은 눈앞의 거대한 물체가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잡고 있는게 정상이었다.
"...짧게 말하자면, 자기를 제물로 바친 거에요."
[정답이다, 하등한 것들아!]
성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장의 한가운데에 내려앉은 태아 모양의 돌덩어리는 전신에 붉은 피막을 펼치며 광소했다.
[그 분과 인연이 깊은 이 땅에서 그 분을 소환하려고 했다! 내가 직접 그 분을 곁에서 모시려고 했어! 하지만 하등한 벌레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구나! 그래서 내가 직접 그 분을 여기에 모실 것이다!]
"무슨 개소리야?"
"뭐...간단히 말해서."
나는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자기 몸에다가 이계신을 부른다는 말이죠. ...원래는 강제로 유나에다가 이계신을 부르는데."
유나로서는 다행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원작 플레이를 통들어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주가 미쳤나?'
이계신을 설령 자신의 몸에 빙의시킨다고 해도 성주는 무조건 죽는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날아가는 놈이 어째서 저런 과격한 짓을 저지른 건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깨달았다! 피닉스여,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몸 바칠 정도의 의지를 가져야 함을!!]
"...아니, 이런 미친."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대는 내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흐하하! 그래, 처음부터 그러면 되는 일이었어! 피닉스여, 고맙다! 이제 그노시스 따위, 필요없어!]
■■■■■■■!!!
태아가 우주를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달의 땅덩어리를 고스란히 피부로 삼은 태아의 몸 아래로 아주 천천히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들리십니까, 나의 신이시여! 당신의 종복이 여기 이렇게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주는 우주의 끝까지 소리쳤다.
[그 분이 내가 된다!!!]
성주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이계신을 소환했다.
****
기괴함.
그것 이외에 저것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보는 것 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저것은 우리의 정신조차 갉아먹을 정도로 흉측했다.
...만, 이미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본 나로서는 그저 그랬다. 바퀴벌레가 발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혐오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 그냥 그랬다.
■■■■■!!
......역시 혐오스럽다. 상대하기 정말로 싫지만, 꿈틀거리는 수많은 다리들을 건드리기도 싫지만 싸워야한다. 제작사는 분명 징그러운 물체를 본 여성들이 질색하는 걸 즐기는 변태가 따로 없을 것이다.
'이계신 전에 99%는 히로인들을 동원하지.'
누구 말마따나 에로 미연시 세계에 누가 땀내나는 남정네들을 데리고 싸우겠는가. 그런 존재가 있다면 아마 여성 플레이어가 남정네들끼리 따뜻한 우정을 나누는 걸 보고 즐기는 자가 되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읍...!"
"이거랑 진짜 싸워야 하나...?"
정령들은 전부 입을 막고 가운데에 놓인 성주의 폭주체를 노려봤다. 시체 썩어들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풀풀 풍겼고, 점액 특유의 시큰한 냄새에 코가 다 얼얼했다.
"피닉스. 저게 진짜 우리가 상대할 마지막 적이냥?"
"네."
김펜릴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적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다는 듯 손톱까지 날카롭게 세웠다.
"아아. 모두 정신 차려요. 적은 성주의 폭주체, 그러니까 이계신의 화신. 원래는 저게 유나의 몸에 깃들었어야 할 녀석입니다."
"......."
유나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지금도 보라색 점액을 내뿜는 이계신의 화신은 다리의 빨판을 여닫으며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름은...라고 할까요, 아니면 미리 생각해둔 이름으로 할까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그거야 당신이 저게 될 뻔 했으니까?"
"...분위기 바꾸려고 농담하시는 건 좋은데요. 물론 제가 저렇게 되는 거에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역시 조금 그렇긴 하거든요?"
유나는 툴툴거리며 스태프를 높이 들어올렸다.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저거까지 왜 그런담. 피닉스...승님. 저거 쓰러뜨리면 졸업이죠?"
"네. 이기면 대학 자퇴하고 수능 보러가도 돼요."
"자퇴 안하고 보면 되죠. 나중에 저 수능 칠 때 꼭 응원나오세요."
"김펜릴이랑 같이 핫초코 들고 찾아갈게요."
"맞겨달라냥."
이계신과 연관이 깊은 두 명-풍속성의 김펜릴, 이계신의 그릇인 유나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데에는 역시 대화가 중요했다.
"집행관. 저거 잡고 대가리 위에 태극기 꽂을까요? 앙그는...이 전투 끝나고 희아랑 누리랑 셋이서 여행 다녀와요."
"...핫?!"
한 명 클리어. 주변 눈치만 살피고 있던 백희아의 눈빛이 또렷해지고, 주변에 검은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환룡. 이 전투 끝나면 이제 영원히 잠들어도 됩니다. 샤오린, 저게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적이에요. 저보다 강한."
"......실례했습니다."
전투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환룡은 샤오린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전장을 채우기 시작한 보라색 연기 때문에 투명무기가 그 실루엣이 드러났지만, 샤오린은 머리끈을 동여메며 언월도를 꽉 붙잡았다.
"유하, 저거 그냥 SSS급 괴수나 마찬가지에요. 다리 하나당 SSS급 코어 나오니까 꼭 잡죠. 카르나는...브라흐마?"
"스트라! 핫."
멍하니 있던 카르나가 비쟈야를 번쩍 들어올렸다. 무안함을 숨기기 위해 활은 벌써부터 시위를 당겼다.
"석하랑 A컵."
"B컵이거든! 나는 아까부터 정신차리고 있었는데 왜 시비거는데!!"
"흐름상?"
아무래도 석하랑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너무 멀어서 확인이 안 되고 있었는데, 다행히 석하랑은 이미 얼음의 날개를 펼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기를 걷어내고 있었다.
"흐흐, 아무래도 상대가 바다생물 베이스라서 그런가? 수속성 정령도 정신을 온전히 가다듬고 있었네요. 그럼 모두 정상이죠?"
화속성을 제외한 여섯 정령들은 모두 싸울 준비를 마쳤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늦게 집어넣었으면 손가락 끝부분 부터 옅어지는 게 들키지 않았을까 싶었다.
"크흠. 최후 브리핑입니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이목을 끌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마지막까지 눈과 입만은 살아있기를 바라며,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적은 고작 하나. 전투원은 여섯. 각자 자기 위치에서 마음껏 요리하세요. 다리 하나 자를 때마다 SSS급 코어 랜덤으로 떨어지니까, 여유 있으면 잘라내도록 해요. 빨판에서 튀어나오는 테라리스트 조심하고."
구체적인 브리핑은 필요 없었다. 몇가지 주의사항만 알려주면 다들 그에 맞춰 싸울 수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오히려 내 말이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노파심에 나는 주의할 것을 최대한 빠르게 읊었다.
"원래는 대가리 갈라서 안에 제물이 된 유나를 구해야하는데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까...굽든 찌든 삶든 회치든 마음대로 하세요."
꿀럭, 꿀럭.
과거 촉수꺼비를 상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큐브를 집어삼켰던 남자는 이계신의 부하와도 같은 흉측한 촉수를 달고 사는 두꺼비의 모습이 되었던게 생각났다.
■■■■■■■■!!
폭주체는 태아의 두개골같은 머리에 달라붙은 바위 파편들을 모두 떨쳐냈다. 안에는 보라색으로 매끈거리는 머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정수리에는 동충하초 같은 괴물이 상체만 꺼내놓고 두 팔을 번쩍 펼쳤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쩍 벌어진 입에는 침이 뚝뚝 흘렀으나, 그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더욱 자신을 과시했다. 박쥐와도 같은 피막의 날개를 더욱 크게 펼치고, 뇌가 둥둥 떠있는 것 같은 눈을 좌우로 돌리며 전장을 살폈다.
"나를 위해 마련된 무대구나! 보아라, 그 분의 위엄을!"
"...이계신이 문어가?!"
석하랑의 외침에 성주의 광소가 뚝 끊겼다. 나는 아차싶었지만 부정은 할 수 없었다.
문어는 문어였다.
단지 크기가 100m에 이르며 큼지막한 다리가 여덟개가 있지만 그 끝은 세분화된 촉수 가닥으로 분열되는 초대형 보라색 문어라는 것만 제외하면, 더욱더 공포스럽고 기괴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데포르메 된 걸 보면 나름 귀엽기는 한데.'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분야에 '가능'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진최종보스전을 통해 이계신의 일부를 눈으로 직접 봤으면서도 가능하다고 외치며 인간으로 바꾸는 만행을 저지르고는 하였다.
'대부분 유나를 촉수녀로 바꾸는 형식이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다행히 노란 로브를 뒤집어 쓴 이계의 여신 이유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이계신의 분체가 폭주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촉수 괴물 이유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이계신의 분체는 성주 본인이 직접 제물-코어가 되어 이계신의 일부를 자신의 몸에 부른 것.
한 마디로 정리하여, 성주는 초거대 문어가 되었다.
"뉴클리언보다는 낫잖아요! SSS급 문어! 그래도 조심해요! 뉴클리언처럼, 다리 하나하나가 SS+급 괴수 스펙이니까! 그러니까 SSS급 코어가 하나씩 나오지!"
레벨로 따지면 여덟 개의 다리는 각각 99이며, 문어 대가리 본체가 100인 괴랄한 괴수였다. 이계신의 극히 일부만 전송받았음에도 이 정도인데, 과연 본인이 등장하면 무슨 개판이 벌어지겠는가.
'괜찮아. 지금 이 상황도 최선이야.'
중요한 것은 성주를 제 시간 내에 제거하냐 제거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계신의 본체가 지구를 찾기 전에 성주를 죽여야 한다.
성주의 무거운 몸이 지구에 떨어지기 전에 성주를 죽여야 한다. 이미 반구형의 전장은 성주의 무게 때문에 천천히 지구로 낙하하고 있었다.
"지구 낙하까지 남은 시간, 앞으로 17분!! 마지막 지시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고 아껴뒀던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프리롤-----!!"
모든 것은 정령들에게 맡긴다.
", 공략 개시----!!"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이러려고 애들 오는 거 안 막은 거에요?'
"당연하죠."
나는 남은 시간을 창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전장을 주시했다.
"지금 저 말고도 보고 있는 사람들 엄청 많을 걸요?"
위이이잉---!!
우주선 피닉스의 눈에 달린 메인 카메라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
노란 우비를 입은 남자는 주인이 없는 안채의 바닥을 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중충한 하늘은 좀처럼 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각은 어느덧 오후 4시 44분 44초. 하필이면 불길한 시각이라 남자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에에에엥----
남자의 마도기어에서 차원문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슬쩍 마도기어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키에에엑!!
백영도 상공, 남자의 바로 위에 차원문이 열렸다. 남자는 들고있던 짚단 빗자루를 꼬나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좀...하아."
"뭘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수?"
콰---앙!!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차원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막 얼굴을 들이밀던 괴수는 그대로 테라로 쫓겨났다.
"오랜만입니다, 조덕배 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거야 저 놈 돌아오면 무조건 여기로 올 거니까 미리 자리잡으려고 하는 거지."
화염거인, 조덕배는 씩 웃으며 수평선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모래사장이 있었다. 남자는 후드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혼자서도 차원문 막을 수 있는 양반이 엄살은. 흐흐."
"...흐흐흐."
남자는 살포시 웃으며 빗자루를 옆으로 밀었다.
"'지금'의 저는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수로요?"
"거 알만한 양반이 왜 이러시나. 내가 당신 누군지 다 아는데. 됐고, 가서 오징어 하나 구워오쇼. 고추장이랑 마요네즈도 각각 챙겨오고."
"...제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걸 시킵니까?"
"뭘. 당신 여기 관리인으로 취직했다며."
조덕배는 피닉스가 주인이 된 안채를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그럼 가서 일해야지. 하선태 씨."
"......지금 이거 구경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만."
남자, 하선태는 마도기어의 홀로그램 영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투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히카리 TV] 희망을 하나로! 월면최종결전!
"야."
조덕배는 웃으며 부엌을 가리켰다.
"내가 다녀오리? 나 청화단 간부다? 하선태 씨 여기서 짤리고 싶어? 이른다?"
"......."
하선태는 한참동안 조덕배를 노려보다가 부엌으로 향했다. 조덕배는 킬킬 웃으며 마도기어로 히카리 TV에 접속했다.
"오호. 우주선 메인 카메라로 구경하고 있었구만. 크으, 그러면 이제 재생을-"
"......."
조덕배는 하선태가 오징어를 구워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