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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01화 (501/1,497)

〈 501화 〉1부 20장 33

문어 대가리 쪽을 구성하고 있던 날틀은 여왕벌을 따르는 말벌 무리 마냥 날뛰기 시작했다.

...그 크기 또한 말 벌 사이즈였다. 그 수는 족히 수 천만.

"지금 결계 해제하면 이것들 다 밖으로 빠져나가요. 이게 마지막 기회니까 건들지 마요. 명령입니다."

나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손가락 한 마디 사이즈의 날틀이 벌처럼 엥엥거리는 가운데, 유독 크기가 큰 날틀 하나가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성주…?!]

"봐요. 저거 독하다니까요. 안 뒤졌잖아요."

자신이 노예로 삼는 생물병기로서, 저급하다고 취급도 하지 않는 테라리스트에 깃들면서까지 나를 죽이려, 지구를 멸망시키려하고 있다.

"참 성주 답지 않은 짓이네요."

'인간답기도 하고요.'

무신의 육체에 깃들더니 동귀어진을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언어조차 잃어버려 파괴와 살육이라는 본능만 남은 괴물은 나를 죽이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이걸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머릿속으로 떠오른 개드립일 뿐이었는데, 설마 진짜로 하게 될 줄이야. 슬쩍 시선을 내리니, 발치부터 조금씩 몸이 불씨가 되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니까 제멋대로 할게요."

한계가 온 것이다.

'얼마든지요.'

끝이.

"...흠흠."

나는 엄지와 중지를 붙였다. 그 어느때보다도 경쾌한 핑거 스냅을 위해, 나를 보고 있을 모두를 위해 애써 활짝 웃었다.

"최후의 창염개진."

목소리가 떨린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래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고, 입안이 바싹 마른다.

"그것은."

■■■■■■■!!

테라리스트들이 일제히 내게 날아들었다.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괴수들은 성주의 마지막 지시에 따라 본능 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명령을 내리고 기생한 성주마저도.

결계는 해제되지 않는 한 빠져나가지 못할 터.

그러니 죽기 전까지 결계 안의 생명을 모조리 죽여라.

마력을 사용하니 성주의 악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빠져나갈까.

지금이라도 몸을 뒤로 살짝 빼기만 하면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막상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역시 실제로 실행을 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겠지.

마침 석양도 예쁘게 지고 있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목을 가다듬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나름 필살기, 궁극기를 뛰어넘는 초필살기인데.

"흠흠. 다시. 최후의 창염개진, 그것은."

목이 안정된다. 히어로는 아니지만 나를 보고 있을 세계의 모두를 향해, 지구는 이제 안전하다는 의미에서 활짝 미소지었다.

"내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태양.

나는 태양이 되었다.

나는, 창염이 되었다.

온 세상이 푸르게, 푸른 불꽃으로 물들었다.

* * *

전신이 뜨겁다.

온몸이 불타오른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연구하고 또 준비해왔건만, 고작 하루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타닥, 타닥.

아래에서부터 푸른 불꽃이 몸을 집어삼킨다. 한 번 승리를 거머쥐었던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비겁하게도 이길 수 없는 자를 데려와 승리를 거머쥐었다.

인정할 수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그 분에게 인정을 받아야한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당신을 위해 바치고, 당신을 위해 2천억이 넘는 생명을 제물로 바쳤음을 알아야 한다.

듣고 계십니까! 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종복이 이리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신은 언제나 항상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공허한 울림은 비명이 되었고, 성대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불길에 목이 찢어졌다.

당신의 하수인이 불타고 있습니다! 간악하고 사이한 불꽃에 괴로워하고 있단 말입니다! 부디 구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괴로움에 몸부림쳐도 신은 아무런 미동도 없다. 아니, 과연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자신이 당신을 위해 그릇을 준비하고 온갖 생명을 바친 것을 알기나 할까.

머저리.

적은 죽어가면서까지 조롱을 일삼았다. 마력이 다해 몸이 붕괴되어가면서도, 중지를 들어올리며 중력에 이끌려 바다에 처박혔다.

고오오오--!!

전신이 타들어갔다. 육체는 이미 재가 되었고, 남은 것은 오직 두 눈 밖에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석양.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세상밖에 없었다.

아직 태양은 지지 않았다. 달은 자신이 망가뜨렸건만, 어째서 석양이 지고 있는 걸까. 왜 아직 태양이 끄트머리나마 남아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성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구형의 결계는 바다에 처박혔고, 시야마저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고생은 했다. 고생은."

마지막.

눈에 들어온 것은, 돌담 위에 걸터앉아 오징어를 씹고 있는 노란 우비의 남자-

화륵.

* * *

석양이 진다.

붉은 노을빛이 아름답게 지고 있는 와중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또 저런 걸 만들어놨대."

하늘에는 아름다운 달이 제자리에 걸려있었다. 분명 성주가 달을 핵으로 삼아 이계신을 소환하는 제물로 바쳤건만, 달과 똑같은 모양의 위성 하나가 하늘에 걸려있었다.

"유나 작품이죠. 지속성 정령이나 마찬가지인데, 달 정도는 만들어내야되지 않겠어요?"

"하긴 그렇군."

창염은 내 옆에서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베시시 웃었다. 걸을 힘조차 없어, 우리는 백영도의 모래사장에 퍼질러 앉았다.

"그냥 불타서 소멸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누군지는 몰라도 신이 참 눈치는 있는 분이네요. 로망이 있어요, 로망이."

"너도 신이잖아."

"신이었던 존재죠. 푸흐흐."

창염은 무릎을 당기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 뒤로 지고 있는 석양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향해 웃고있는 것 하나는 분명히 보였다.

"저기요. 정령이 왜 원래의 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 알아요?"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당신이 이런 몸으로 만들었잖아요. 당신 때문에 신의 자격을 잃었으니까, 책임져요."

"......그래,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오면 책임을 질 수밖에. 나는 부끄러웠지만, 창염이 원한다면 말해야만 했다.

"사랑을 알아버려서."

"정답. 완결무결한 존재인 신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튼 순간부터, 이미 우리들은 다시 신이 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만 거에요. 푸흐흐."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누군가를 편애하지 않고, 지상의 존재를 아득히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존재일 뿐이다.

"처음에는 옥좌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됐네요."

"그러게. 나도 처음에는 스크린 너머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런 존재가 이렇게 나와 눈높이를 맞춰 서로를 마주보는 시점부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길은 영영 막히고 말았다. 창염은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영영 원래의 신격을 되찾지 못하게 될 것을.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가 되었다.

"인간 승리 만만세."

"네, 좋으시겠네요. 먹버충."

"아니, 잠깐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신을 여자로 만들어놓고 소멸해버리면, 먹버한 거나 마찬가지 아녜요? 푸흐흐."

창염은 짖궂게 웃으며 내 허벅지를 툭툭 찔렀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푸스스.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태양빛이 사그라들며, 내 몸도 조금씩 잔불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록 내 시야 또한 어두워졌다.

"저기요. 마지막으로 물어봐도 돼요?"

"안 돼."

"내가 뭘 질문할 지도 모르면서."

"이 타이밍에 물어볼 만한 거 하나밖에 없지 않냐."

언제나 그렇듯, 이 순간이 다가오면 창염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지금의 창염도 그걸 알면서 내게 질문을 한 번 더 던졌다.

"네가 대신 소멸할테니까, 창염이 되어 살라 이거 아니야."

"그렇죠. 육체는 평생 여성형으로 고정이 되겠지만,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어요."

이전처럼 정령이라는 어중간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여자가 되는 셈이었다. 내가 창염이 된다. 신이었지만 사랑을 알아버린 여자가 되어버린다.

"어때요? 이 정도 얼굴에 몸매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한 명 빼고 아무도 안 쓴 몸이라고요."

"나름이 아니라 최고지. 그리고 그 한 명 나잖냐."

"그렇죠. 푸흐흐. 이미 개통되었으니까 처녀막 뚫리는 아픔은 없을 거에요. ...조금 아팠다고요, 그 때."

"역시나."

창염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흔들었다. 나는 품을 뒤적거렸지만, 아쉽게도 내가 찾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큐브 하나 챙겨둘 걸 그랬어. 진짜 실체화였냐?"

"당연하죠. 큐브 만만세. 이계신님 만만세. 제가 저걸 자는 사이에 마음껏 따먹었습니다. 푸흐흐."

"......내 기억 내놔."

"싫은데요."

창염은 구슬을 낼름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유일하게 창염이 내게 아직 넘겨주지 않은 기억. 그것을 내가 가지려면 창염이 되어야만 했다.

"와, 이거 첫경험을 두고 협박을 하네?"

"알고 싶으면 제가 되시던가요~"

"그럼 너 죽잖냐. 싫다."

"죽는 건 아닌데요? 단지 영면에 드는 거지."

"그게 그거지."

내가 창염이 된다. 창염이 정신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1%의 지분, 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창염은 갈 곳이 없어져 나의 일부가 된다. 내가 창염의 기억과 지식과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되어, 내가 창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창염개진(蒼炎改眞).

내가 진짜 창염으로 고쳐지는-바뀌는 셈이다.

"우리 참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랑하면서 닮아가는 거죠."

서로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 그렇기에 서로 마음을 트게 된 걸지도 모른다.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상대가 살아남기를 바랐기 때문에, 기억을 빼앗고 죽이고 죽이며 상대가 포기하기를 바랐다.

"서로 고집만 세가지고. 결국 누구 하나가 안 꺾어주면 영원히 계속 싸우게 되는 셈이었잖아요."

"부부 싸움이라는게 칼로 물베기지. 고맙다. 져줘서."

기나긴 대결의 승자는 나. 소멸하는 것도 나-피닉스다. 창염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 손을 잡았다.

"죽어줘서 고맙네요. 흥. 당신 사라지면 제가 지조를 지킬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내 세상인데?"

"지조를 지킬 거라고 생각도 안 해. 주변에 널린게 여자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겠냐?"

"...말이라도 못하면."

창염은 살짝 엉덩이를 들어 내게 몸을 붙였다. 나는 창염의 등쪽으로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흐흐, 꼭지 섰는데?"

"시끄러워요. 나 문란해질 거란 말이에요. 당신, 히로인 17P는 안 해봤죠? 당신이 못한 거 내가 할 거라 이 말씀."

"어이쿠. 그거 참 부럽네. 부디 성공하기를 기원하마."

나는 창염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마지막이니 만큼 어리광을 조금 부려도 되지 않을까.

"아, 좋다."

나는 창염의 허벅지에 머리를 놓았다. 가슴과 얼굴이 동시에 보이는 각도가 일품이다.

"저기요. 마지막은 이별의 섹스 하는게 도리 아니에요?"

"키스도 아니고?"

"섹스 하면서 키스하는 거죠. 석양 바라보면서 백사장에서 아이 만들기. 어때요?"

"......누구 기빨려서 빨리 죽게 하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

나는 창염의 밑가슴을 쿡쿡 찔렀다. 처음 한 두 번은 안으로 쑥 파고들었지만, 이제는 손가락도 잔불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슬슬 피곤하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창염에 의해 정신세계로 빨려들어갈 때와는 달리, 전신이 사라지는 상실감이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나 한 숨 좀 잘게. 자고 일어나면...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디서요?"

창염은 웃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웃으며 배웅해주려고 하고 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울지마. 너 화속성이잖아. 몸에서 물이 나오면 안 되지."

"그럴 거면 애액도 나오면 안 되지 않겠어요?"

"...그걸 그렇게 받아치면 할 말이 없는데. 하아. 진짜."

입만 열면 섹드립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누가 그 고고한 태양을 이런 여자로 만들었을까.

나였다.

"인생 제대로 살았네."

"멍청이."

"뭐가 멍청이야. 다시 만난다고...했잖아."

말하기 조차 이제는 버겁다. 회광반조라는 게 있다면 적어도 이 말 만큼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지금은 헤어질 지 몰라도 다시 만날 거야. 과거든, 미래든. ...어쩌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든."

나는 손을 뻗어 창염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미 불씨가 되어 흩어져 잡아당길 힘은 없었지만, 창염은 내 흔적에 따라 자신의 손을 내 얼굴 위에 올렸다.

나는 창염의 왼 손에, 네번째 손가락 위에 입을 맞췄다.

"반드시 다시 만날 거니까, 잠시만 안녕이다. ...태양은 매일 떠오르잖냐."

"......."

석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노을은 사라졌고, 어느새 하늘은 검게 물들어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요."

"그래."

"다음에 만나면...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창염이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밤의 바다는 차가웠으나, 손길은 따뜻했다.

"과거든, 미래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든...이번에는 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창염의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따스한 푸른색이 내 눈을 덮었다. 마지막에 눈을 가리게 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창염의 손등 너머로 무언가가 툭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오려나."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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