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화 〉[백합외전] 창염과 피닉스 004
하늘을 날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한들, 꼭 하늘을 날아서 외국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정답은 없다.
나는 비행체로 등록되어있지 않고, 국제비행협약에도 해당되지 않는 확인된 비행 물체에 불과하다.
-피닉스가 옵니다!
-뭐?! 어느 공항이냐!
-날아서 옵니다!
-...영공 침해 대상이라서 교범상으로는 쏴야하는데?
나는 군인들을 영창으로 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괜히 나라는 존재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현장 지휘관과 병사들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루트로 입국하는게 가장 빠르고 바른 길이다.
그래서 남들 모르게 비행기에 올랐는데….
"와인 한 잔 드릴까요?"
"저 와인 안 마시는데요."
"물 한 잔 드릴까요?"
"여기 정수기 있는데요."
"딸기에이드 한 잔 드릴까요?"
"그건 한 잔."
나를 향한 스튜어디스들의 노골적인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항공사를 잘못 골랐나?'
일단 명목상 일본으로 가는 거로 선택을 해서 나름 유명인을 상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로열석에 있는 손님에게 관심이 많나?'
[저분들 입장에서는 연예인들 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어우야, 역시 승무원 제복은 미니스커트가 진리죠. 흐흐흐….]
나는 내 속에 있는 창염의 사심을 채워주기 위해 승무원들을 지긋이 바라봐야만 했다.
승무원 중 일부는 다소 부담스러운 눈으로, 일부는 마치 간택을 받은 후궁마냥 요염한 눈으로, 그리고 일부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바로 나를 모텔로 끌고 가려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아."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세요?"
내 옆 좌석에 앉은 흑발의 여인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머리칼, 갈색 눈동자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형이었다.
"반가워요. 저는 루이스라고 해요."
"...루이스?"
"개명했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헌터예요. 스트로베리의 헌터 길드장님."
"...만나서 반가워요. 헌터 루이스."
나는 아무리봐도 일본인 같아 보이는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일본인 같다? 아니, 일본인이다. 나의 히로인 관련 엑스트라 메모리가 활성화되어 이 여자의 실체를 금방 상기해냈다.
[히카리 루트 빌런이네요. 나중에 괴인되는 여자.]
'암속성 S급 괴인. 입 쩍 벌어지는 요괴가 되는 여자.'
지금은 헌터를 자처하고 있지만, 히로인 루트에서 괴인이 된다는 건 상당히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
'친해져서 좋을 것 없지.'
"오사카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저기요."
나는 마도기어를 벗었다.
"아이 캔 낫 잉글리시."
"......."
루이스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굳혔고, 나는 눈을 감고 의자를 침대에 가깝게 뒤로 젖혔다.
싸가지 없는 거 아니냐고? 창염 얼굴이면 싸가지 없게 행동해도 괜찮다.
애초에 조용히 가고 싶어서 로열석을 고른 건데, 굳이 옆 좌석에서 이야기를 거는 것 자체가 민폐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한게 아니라, 저쪽이 잘못했다.
'안 그래도 지금 어떻게 할까 복잡해죽겠는데.'
나에게는 선택지가 여럿 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는게 가장 좋을까 고뇌가 깊어지기만 했다.
일단 후지산을 대폭발시킬 것인데, '언제' 터뜨릴 것인가가 중요.
[와, 실적 조작인 것이에요!]
창염은 내 속에서 재잘대며 키득거렸다.
[S급 코어로 괴수를 만들어서 항로가 꼬이게 만들다니. 국가에서 알면 뒤집어질 걸요?]
'안들키면 돼.'
모두가 모르게 저지르면 된다.
'중간에 따로 나갈 필요 없이, 후지산 지나갈 때 즈음에 마력 슬쩍 흘려주면 괴수들 미쳐 날뛸 걸.'
아주 먹음직스러운 마력의 향기를 뿜어내면 후지산을 점령한 괴수들이 마구 기뻐하리라.
후지산 대폭발.
여기서 말하는 폭발은 진짜로 후지산을 화산 폭발시키겠다는 것보다, 그만큼 산 전체에 깔려있는 괴수들을 자극하여 난동을 일으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면 자연히 항로는 뒤틀리고,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괴수 소동이 일어나고, 오사카에 착륙해야하는 비행기는 동해에 불시착하게 되리라.
안 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되고.
그래서 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언제 괴수에게 이 비행기가 습격되면 좋을지.
하지만 나의 계획은 태평양을 건넌 순간부터 어그러졌다.
치직. 치직.
"...응?"
멀리서 느껴지는 마력의 감각.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설마.'
[히요르히히!!!]
정체불명의 괴성과 함께, 비행기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스 피닉스! 너를 범하러 왔다!]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모니터에 금발을 찰랑거리는 하드한 복장의 여인들이 나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젠장."
설마 비행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저 크싸레들이."
[영광인 걸, 피닉스 님께 그런 말을 듣다니!]
통칭, 크레이지 사이코 레즈비언.
같은 여성을 상대로 보빔 강간을 서슴지 않는 빌런 집단으로, 저들의 손에 의해 정조를 잃은 여인들만 수 백이 넘는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가서 보벼버릴테니까!]
치직.
영상은 끊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피곤해…."
덜커덩.
비행기 위로 뭔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비행기 전체에 비상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애애애애앵-
하이재킹이었다.
* * *
"남자는 재우고 여자는 겁탈하라!"
"호호호호!"
푹, 푸슛.
비행기의 천장을 자르고 뛰어들어온 빌런들은 남자 승객들을 향해 약물을 뿌리고, 여자 승객들을 붙잡아 그들을 마구 희롱했다.
"그, 그만두세요! 같은 여자끼리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야!!"
"섹스."
"꺄아아악!!"
미녀들은 하이재킹범들에 의해 범해졌다. 다리 한쪽이 강제로 들려진 채, 고간부를 향해 범인들은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비행기 납치라고 할 수 있지만, 비행기를 납치한 사람은 전부 여자들이었다.
"오호호! 피닉스가 탄 비행기? 놓칠 수 없지!"
찰싹!
누가 봐도 악의 여간부와도 같은 모습을 한 여자 괴인은 하드한 복장으로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비행기에 탄 남자들은 '또 시작인가'하는 눈빛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꺄아아악!"
그리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를 쳤다. 크싸레들은 남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남자를 범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자를 범하기 위해 온 것이니까.
"얌전히 있으면 정조는 살려주마! 하지만 뭔가 허튼 수작을 보이는 즉시 보빌것이야!"
크싸레들의 엄포에 여성 승객들 또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벌벌 떨었다. 다행히 그들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멈춰라!"
로열석의 문이 열리며 흑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미스 루이스! 이게 얼마만이야. 지난 번에 LA에서 만났을 때 받은 배빵은 아직도 쓰라린 걸!"
"이상한 소리 집어치워! 당장 꺼지지 못해!"
루이스, 그녀는 암속성 마력을 일으키며 칼을 들어올렸다.
"클리닝 사이버 레지스탕스! 마도전뇌 공간의 악마들!!"
"호호호, 그건 옛 이름이야. 우리는 체질 개선을 했다고. 이름하야....."
"이봐요, 크싸레들."
저벅, 저벅.
히어로 루이스의 뒤로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여인의 손에는 딸기 에이드가 들려있었다.
"미스 피닉스! 나랑 비비러 온 거야?!"
"무슨 개소리를. 지금 비행기 승객들한테 무슨 민폐예요."
"아하하! 원래 빌런이 민간인들에게 민폐를 끼치니까 빌런이지!"
덥썩.
"이렇게 인질로 삼는 것도 민폐고 말이야!"
여인은 승객 중 예뻐보이는 여인을 붙잡고 인질로 삼았다. 금발에 흰티, 청바지를 입은 여인은 몸매가 훤히 드러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미스 피닉스! 저들을 제압하겠습니다! 부디 도움을!"
"움직이지마!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이 여자의 정조는 없다!"
부우욱.
괴인은 단숨에 여인의 청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손을 아래로 와락 뻗었다.
"움직이면 찌른다!"
"큭...?! 이 미친...!"
광기 그 자체. 히어로 루이스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하, 히어로 루이스! 우리의 목표는 미스 피닉스지만, 너에 대한 복수는 잊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명령이다. 인질을 살리고 싶으면...둘이 보벼라."
"싫은데요."
피닉스의 말에 모두가 굳었다.
"저는 헌터지, 히어로가 아니라서."
"...호, 호호. 그랬지. 남의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는 여자! 하지만 정작 근처에서 사람 죽는 건 못보는 여자! 크, 요즘 세상에 이런 츤데레가 다 있다니."
"...무슨 개소리예요, 진짜."
피닉스는 질린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죽을래요?"
"호호호, 나는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 있는 여자들 중에 한 명은...박힌다."
문질문질.
"그럼 협박을 바꿔볼까. 히어로 루이스! 이 여자를 인질로 살리고 싶다면...헌터 피닉스에게 능욕을 당해라!"
"무슨 미친 엿같은 소리야!!"
"헌터 피닉스가 탑이라는 건 이미 파악했지! 어떠냐, 피닉스! 네가 순순히 탑 행위를 한다면, 인질을 석방하겠다!"
"...아, 그건 어쩔 수 없고."
피닉스는 루이스의 뒤를 점하며, 마도기어로 몰래 메세지를 보냈다.
[일단 따르는 척이라도 해요. 지금 위에서 RPG 겨누고 있으니까.]
[......!!]
미친 척을 하지만, 진짜로 미친 자들이다. 비행기를 터뜨리는 건 일도 아닐 터.
"으, 으으...인질을...정말 석방하는 거지...?"
"물론! 네가 피닉스에게 범해진다면. 흐흐흐, 이런 걸 놓칠 수 없지."
여인은 인질의 어깨 위로 얼굴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아니면 히어로와 헌터 님, 자신들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여기있는 인질들을 다 죽일 거야?"
"큭...!"
루이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미스 루이스."
피닉스는 아주 천천히, 루이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23이 좋아요, 34가 좋아요?"
언제나, 부당함을 당하는 자는 히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