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575화 (575/1,497)

〈 575화 〉2부 1장 05

1999년 12월 25일.

한 세기의 끝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지옥을 목도했다.

<피의 일주일>.

전세계 각지에 나타난 일곱의 거대 괴수는 2000년으로 해가 넘어가는 일주일 사이에 세계의 인구를 무려 억 단위로 줄여버렸다.

신화 속 괴수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일곱 마수의 등장 이후, 전세계에는 <차원문>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이세계의 문이 열리듯, 괴수들이-

"성주가 차원문 열어서 괴수들 보내는 거죠! 튜토리얼 스킵!"

청화는 길고 긴 나래이션을 끊어버렸다. 정작 본인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성주가 절풍을 펜릴으로 만들어버린 기원부터 설명할 거면서.

"오오, 도착했다!"

시안의 몸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 청화는 공항의 로비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게임 배경 상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공항인 김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응? 마커를 따라서 정보를 획득하라고요?"

[세계관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것과 한국의 분위기를 파악하라는 의미지. 붉은색 마커는 꼭 해야하는 사람들이다.]

<퀘스트> 정보를 수집하라!

당신은 소문이 무성한 헬조선,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현지의 분위기를 확인하라.

[보상] : 지휘 경험치 100.

여느 게임에서나 있는 초반 귀찮은 NPC 릴레이다. 하지만 이 NPC 릴레이야말로 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얼마나 악랄한 지 알려주는 시작이었다.

'여기서 인연 맺기가 가능한 히로인만 네 명.'

두 명은 공항의 고유 이벤트를 가지고 있는 히로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딸기라떼 주세요."

청화는 시작하자마자 대합실 카페에 가서 딸기라떼를 주문했다. 나는 시작부터 크게 저지른 청화의 행동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게 루트 시작이지.'

"네? 왜 딸기라떼냐고요? 그거야 제가 딸기를 좋아하니까요. 앞으로 자주 보실 거예요. 저 딸기만 먹을 거라서."

청화는 바로 갈아나온 딸기 라떼를 쭉 들이켰다. 청화를 찍고있는 카메라를 돌릴 수 없으니 나중에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아마 같은 비행기를 타고 따라온 '암살자' 하나가 최초로 흥미를 가진 순간일 것이다.

"저기요~"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청화는 딸기라떼를 들고 열심히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외국인이여? ...이 나라에는 답이 없어. 빨리 다시 비행기타고 원래 나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여."

"조언 감사드립니다!"

첫 번째. 헬조선을 탈출하라는 노신사.

"여러분! 신서울로 오십시오! 광검님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두 번째. 신서울로 오라고 외치는 정장의 사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 삽니다...."

세 번째. 우울한 눈빛으로 암표를 구하려고 하는 젊은 여인.

"서울? 이제 없어요. 혹시 38선이라고 알아요? 이제 다들 37선이라고 불러요."

네 번째. 빈정거리는 듯한 얼굴의 여학생.

각양각색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청화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빨간색 마커는 이제 한 명 남았지만, 여기서 고인물과 뉴비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는 셈이었다.

다섯 번째. 캐리어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여인.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단발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인은 타이틀 히로인답게 '신의 피조물'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정도였다. 실제로 배경 NPC들도 그녀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붉은 마커가 가리키고 있는 여인은 플레이어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이며, 누가봐도 그녀를 향해 가야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성녀떴다아아아----!!

이유나! 이유나! 이유나! 이유나!

청화님 저기 전여친 있어요!!!

'이 녀석들이.'

모두가 이유나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청화 또한 당당히 유나를 향해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보폭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기요?"

"네?"

유나는 금발 외국인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주인공을 바라보는 게 꼭 첫 눈에 반한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첫 눈에 반한 거 맞죠.'

아카데미에서 낙제점을 받고 한창 자존감이 낮아있을 때다. 안 그래도 난감한 상황에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온 잘생긴 외국인이 친절히 다가오니, 낯설면서도 고마운 것이다.

"뭣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요. 제가 한국은 처음이라서요."

"네, 네! 뭐가 궁금하시나요?"

청화의 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지옥불반도"란? "서느철이란?" "서울이란?"

각각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질문이었으며, 유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친절히 대답했다.

"헬조선이라는 건 부끄럽지만, 이 나라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제 얼굴에 침 뱉는 겪으로...."

"선의철은 지금의 대통령으로서, 수도인 신서울-대전 옆에 있는 도시인데...."

"서울은 2012년에 있었던 <평양 사태>로 인해...."

"평양 사태요?"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처음 듣는 세계관 내의 고유 사건에 궁금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조그만 단서로도 충분히 유추 할 수 있었다.

아, 평양에서 무슨 일이 터져서 서울이 망가지고 수도가 대전 근처까지 내려왔구나.

그리고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겠다 싶은 순간-

삐이이이------

손목에 찬 마도기어가 시끄럽게 울림과 동시에, 공항 대합실의 유리창이 와장창 박살나기 시작했다.

<차원문 발생, 차원문 발생, 위험도 C급, 위험도 C급.>

튜토리얼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한국을 찾는 외국인은 그 수가 몹시 적다.

그에 반해 한국을 빠져나가는 한국인의 수는 하루에도 수 백명에 이를 정도였다.

현 대한민국 대통령, 선의철은 공항 인근의 괴수로 인해 비행기가 많이 뜰 수 없다는 핑계로 비행기의 노선을 줄여 국민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다.

"저기요~"

그런 의미에서 유나는 공항에서 만난 금발벽안 청년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튀어나오는 것에 놀랐고, 그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륵.

청년의 눈동자는 마치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귀에 걸리듯 들어올려진 입꼬리는 너무나도 진해 진심으로 행복해보일 정도였다.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네! 뭐든지 물어봐주세요!"

처음 한국에 왔는데, 지옥불반도가 뭐죠? 선의철보고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시대가 낳은 정치인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뭐가 맞는 말이죠? 서울의 상태는 어떤가요? 한국인은 인심이 좋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려고 하는 거죠?

"그, 그건말이죠...."

유나는 최대한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의 질문에 답변했다. 질문을 하는 청년은 한국말은 유창하게 하면서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평양 사태?"

21세기 한반도의 정세를 180도 바꾸어버린, 7명의 S급 히어로가 사망한 <평양 사태>조차 모르는 걸 봐선 그는 진짜 외국에서 어쩌다가 한국에 들린 사람인 듯 했다.

"네. 평양 사태요. 그게 뭐냐면-"

그러나 그 순간, 유나의 마도워치에 비상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차원문 발생 경고. C급 이하 괴수 대량 발생.

장소는 김해 공항 활주로. 대량의 괴수들이 대합실을 습격할 것으로 추정...!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며 엄청난 양의 괴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나는 급히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용 접이식 스태프를 꺼내들어 펼쳤다. 청년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1m짜리 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오오, 진짜 지옥치와와다. 저게...E급이었던가?"

"여기 위험해요! 도망치세요!"

놀이동산에 구경을 나온듯한 청년의 태도에 유나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탈출구를 가리켰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급히 공항 밖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당신만 두고 어떻게 도망칩니까?"

"저는 히어로라고요! ...예비 히어로지만!"

유나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청년은 유나의 학생증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05년생? 21살이에요? 우와, 10대인 줄 알았는데."

"아니! 나이를 보라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 학생증이잖아요! 대한 히어로 아카데미!!"

유나는 역정을 내며 청년의 손목을 잡고 달렸다. 이미 지옥치와와를 비롯한 수많은 E~D급 괴수들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날뛰고 있었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도망쳐요!"

"흠, 괜찮아요. 공항같은 곳은 중요한 곳이니까 분명 히어로들이 금방 나타날 겁니다."

"그건 미국에서나 가능한 얘기고, 여긴 아까 당신이 말한대로 지옥불반도...위험해요!"

유나는 급히 전방을 향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1.5m 짜리 스태프의 끝에서 금빛의 마력이 반짝이더니, 화살이 되어 천장에서 뛰어내리며 전방을 가로막은 지옥치와와의 이마에 박혔다.

끼이잉!!

지옥치와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상당히 아파보이기는 했지만, 지옥치와와의 입가에 묻은 피는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왔는지 충분히 의심케했다.

"이런...!"

유나는 당황했다. 급히 마력을 모아 날린 기술은 지옥치와와를 죽이지 못했다.

"아, 안 되는데-"

"실례, 유나."

유나는 뒤에서 들린 청년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청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화장실 밀대로 추정되는 봉을 들고 있었다.

"여기 지키러 오는 히어로가 10분 정도 걸릴 것 같거든요?"

"네, 네?"

"살아남아보도록 하죠, 10분 동안."

청년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유나의 앞을 틀어막았다.

* * *

[아 씨, 우리 정글 뭐하냐. 적 정글은 탑에 와서 사는데.]

[...님! 긴급입니다! 긴급!]

[시끄러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컷신이 지나간다.

공항 경비를 담당하는 B급 히어로가 모종의 이유로 긴급 상황에 곧장 대처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튜토리얼!> 히어로 아카데미 연수생, '이유나'와 함께 10분간 살아남으십시오!

# 클리어 조건 : 10분간 죽지 않고 살아남기.

# 임무 실패에 따른 패널티는 없습니다.

# 클리어 보상 : 지휘 경험치 100.

청화의 앞에는 튜토리얼 전투의 방법을 알려주는 온갖 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조금 바뀐 DLC의 전개에 속으로 놀랐다.

'직접 싸우네?'

원래 주인공은 동료들을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입만 열심히 놀리는 지휘관의 역할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청화는 마치 준비라도 되어있었다는 듯한 밀대를 집어들고 유나의 앞을 막아섰다.

[원래 DLC에서 저렇게 앞에서 싸웁니까? E급 주제에?]

ㄴㄴ안 싸움ㅋㅋㅋ

그냥 아내분이...유나 앞에서 가오잡으시는 듯ㅎㅎ

주차 플레이(소곤)

나는 청화가 유나의 손을 잡고 달리는 사이 청화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혹시나 전투력에 보정이 있는 걸까?

<시안.w.히비스커스.>

전투력 : E ( 5 / 99 )

마력 : E ( 미각성자 )

[라스트지휘관] : 전투 기술은 플레이어가 익히고 있다는 말인 듯요?

[아, 무궁화... 배경이야 알기는 하는데 고작 이 스펙으로?]

DLC 처음하심?

전투력 5? 쓰레기잖아....

튜토리얼에선 데미지 다 0만 박히는 데ㅋㅋㅋ

[튜토리얼에서 죽을 것 같은데.]

괴수가 이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을 죽이는 건 삼각김밥을 벗기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국가대표들도 마력을 각성하지 못하면 E급 괴수들에게 3분 간신히 버티다 죽는 세상인데, 전투력 E급의 평범한 일반인으로 어떻게 적을 상대하겠는가.

[괴수들이.]

* * *

"유나, 아래로!"

"네, 네!"

청화와 유나는 착실하게 달려드는 괴수들을 억제하고 있었다. 청화의 공격은 딜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청화는 밀대를 휘두르며 지옥치와와의 눈을 집중적으로 찌르려고 했다.

"어딜!"

캐갱!

청화가 밀대를 찌르자 지옥치와와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아무리 괴수라 한들, 생물체인 이상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 시야에 들어오면 놀라는 건 당연한 바.

"유나, 지금!"

"네!"

그리고 청화의 팔꿈치 아래로 뻗어진 스태프에서 금빛 화살이 지옥치와와를 향해 날아갔다.

후두둑!

마력의 화살에 지옥치와와의 이빨이 옥수수를 털어낸 것 마냥 바닥에 떨어졌다. 청화는 묘기를 부리듯 밀대로 바닥에 떨어진 이빨을 튕겼다.

퍼---억!

날카로운 이빨 조각이 지옥치와와의 턱에 박혔다. 아주 잠깐 지옥치와와의 동작이 멈췄다.

"유나, 잠깐 실례합니다."

"예?"

덥썩. 청화는 밀대를 버리고 유나의 뒤로 다가가 백허그를 하듯 손을 포개었다.

"유나는 스태프에 마력만 넣어줘!"

"자, 잠깐, 히익?!"

유나가 저항할 틈도 없이, 청화는 유나의 손을 꽉 붙잡고 스태프를 찔렀다.

푸---욱!

뭉툭한 스태프 끝이 지옥치와와의 미간을 찔렀다. 그러자 지옥치와와는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유나는 E급 괴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이게 대체...?"

"살아남도록 하죠. 함께."

청화는 유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근데 이왕 살아남는 거...쟤들 잡고 사람들 구하는 건 어때?"

유나는 스태프를 꽉 붙잡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알림> 이유나의 호감도가 1 증가했습니다!

?????? 저걸 어떻게 잡아요????

미친 튜토리얼부터 공사들어가네ㅋㅋㅋㅋ 스탯 열리지도 않았는데ㅋㅋㅋ

헌터 스타트도 아닌데 괴수를 밀대로 때려잡네ㄷㄷ

[......클라스가 있잖습니까, 클라스가. 따라하세요.]

나는 열심히 튜토리얼을 즐기는 청화를 구경하며 속으로 웃었다. 게임 속 백청화는 금발서양남이지만, 현실의 청화는 VR 기기를 쓴 여인이다.

[그녀는...신이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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