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화 〉2부 1장 11
"유나야. 석하랑에 대해 알고 있니?"
"당연하죠. 대한민국 유이한 이능력자인 <설화공주>를 모를 리가 없...."
내 질문에 유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수첩을 꺼내 필담까지 할 정도로 유나는 조심스러웠다.
- 설화공주를 다음 스쿼드 대상으로 넣으시려고요?
- 응. 맞아. 내가 알기로는 S급으로 각성해서 12년 가까이 S급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니?
"...네."
유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직접 마도기어를 이용해 석하랑에 대한 정보를 꺼내들었다.
<설화공주> 석하랑.
2000년 생으로 2025년 현재 올해 나이 26세.
정확한 각성 시기는 파악되지 않지만 <광검>이 부산의 보육원에서 발굴한 시기는 2012년-평양 사태 이전.
처음부터 S급 이능력자로 각성해 어려서부터 히어로로 자라왔으며, '신서울에 광검이 있다면 부산에는 설화공주가 있다'라는 말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S급 이능력자.
- 그리고 한국 히어로 협회를 대표하는 히어로.
광검은 일신상의 이유로 거의 은퇴하다시피 한 상황이라, 한국의 대표 히어로는 석하랑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대표 히어로를 내 스쿼드에 넣는다는 건 여러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 미국인인 시안 씨가 설화공주를 스쿼드로 끌어들이면 사람들 들고 일어날 거예요. 미국이 S급 훔쳐간다고.
첫 번째 디메리트, 여론.
우수한 인재의 해외 유출에 민감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선의철이 싫다고 해도, 정계의 뒷배에 자리잡은 백희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더군다나 S급 이능력자를 영입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고요. 주에 억은 커녕 하루에 억을 불러도 모자랄 걸요?
두 번째 디메리트, 자금.
세상에는 나름 '시세'라는 게 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 연봉을 낮추더라도, 기본적인 시장 경제를 따르는 수준의 계약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표 히어로인 석하랑을 헐값에 계약하면 의심을 사게 된다.
- 혹시나 시안 님이 설화공주를 협박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지휘관인 걸 밝히실 건가요?
- 아니. 아예 숨길 거야.
- 그럼 더더욱 안 될 거예요. 지휘관인 걸 밝히고 접근하셔서 석하랑 님을 SS급으로 만들면 모를까.
- 얼마면 될까?
- 음...하루에 최소 10억?
"미친."
억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막대한 계약이었다. 그게 다른 가성비 좋은 동료들과 비교하면 할수록 더 돈만 축내는 계약이었다.
- 유나야. 세상에는 하루 3만원으로 고용할 수 있는 SS급 이능력자가 있단다.
- 뭘 먹였길래 SS급 이능력자가 3만원으로 그래요? 아. 혹시 시안 님이 이미 키우신 분이세요?
- 아니.
오히려 내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다.
'조만간 보게 될 거다.'
3만원.
하프갤런으로 민트 여섯 번을 담아 통으로 주면 주당 40시간은 커녕 52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SS급 이능력자가 있다. 노예계약은 커녕 불공정 거래로 밝혀지는 즉시 지휘관이고 뭐고 사회에서 매장될 조건이지만, 계약의 당사자는 사람으로서 계약한 게 아니니 문제 없다.
- 아무튼 설화공주를 영입하려면 적정 시세가 있어야 한다는 거네.
- 그만큼 돈 있어요?
- 아니.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뭐가 있어? E급 한 명 월 300으로 계약해서 SSS급으로 키우면 그만인데.
나는 슬쩍 유나의 허리를 휘감으며 귀에 300을 속삭였다. 유나는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오히려 내 허리를 쿡쿡 찔렀다.
"저 월급 300이에요?"
"등급 올라갈 때마다 갱신할 거야."
"...재계약 하려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당연하지."
이 정도 대화는 충분히 말로 할 수 있다. 물론 그 내용과 실체는 말로도 필담으로도 할 수 없지만, 나와 유나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진짜 중요한 문제인데, 석하랑 님 정도의 히어로랑 몰래 접촉해서 계약할 수도 없을 거예요. 주변에 깔린 기자들이 몇이나 될텐데. 나라에서도 직접 관리하고 있을 걸요?
- 그거야 그렇지.
- 그럼 어떻게 접촉하실 거예요?
"본인이 직접 오게 해야지. 미끼를 던지는 거야."
"미끼요?"
지휘관이란 건 안 밝힌다고 안 하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나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유나야. 너는 만약에 너를 D급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잖아. 그럼 어떻게 생각해?"
"의심하겠죠.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D급을 만들어준다는 걸까."
"그렇지. 혹시 영약은 써봤어? 막 마력 올려준다고 하는 영약들 말이야."
"...네.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한 두 개 사봤는데 아무 효과도 없었어요."
유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이 모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수백만원 대 물건을 샀을 것이며, 복용해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에 유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야."
"네?"
"...흐흐, 사실 미끼는 던져놨어."
"네???"
유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석하랑을 시작으로 히어로 쪽 인맥을 트고, 동시에 다른 쪽과도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이미 진작에 떡밥을 던져놓았다.
석하랑. 은유하. 백희아.
셋이 동시에 낚이지 않고는 베기지 못 할, 아주 훌륭한 떡밥을.
"유나야. 퀴즈하나 내볼까? 알파벳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게 있어. 뭐-게?"
"......풋."
유나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저랑 궁합이 정말 잘 맞으시네요. 제가 내고 싶었던 퀴즈거든요."
당연하지. 이건 유나가 주인공을 골려먹을 때 써먹던 질문 중 하나니까. 정작 유나는 자신이 낸 퀴즈를 내가 역으로 냈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채, 내 손을 정답에 가져다댔다.
두근, 두근.
"......역사 도착까지 10분 정도 남았는데, 이러고 있어도 돼요?"
유나는 내 팔을 등허리 뒤로 감아, 내 손을 제 손과 포개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 * *
<1월 3일 오후 3시, 신서울 중앙역 광장.>
유나는 집으로 떠났다. 내 예상대로 유나의 부모님은 역 대합실에서부터 유나를 기다리다가 유나를 맞이했다.
[숙소 정해지시면 꼭 연락 남겨주세요. 꼭이에요!]
"당연하지."
극한의 효율을 생각하면 24시간 쿨타임이 해제되는 즉시 사정을 해야할 판이었다. 유나가 외박을 허락받고 나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상, 나도 그에 준하는 준비를 해야했다.
"퀘스트가...."
튜토리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튜토리얼의 끝을 위해서는 시스템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개인 공방, '거점'을 마련해야했다.
<알림> 신서울에서의 생활을 위해 사무실과 숙소를 구하라!
# [사무실]은 플레이어인 당신이 게임 진행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정하는 장소입니다.
# [숙소]는 플레이어인 당신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임무 보상 : 지휘 경험치 + 100.
'사무실 구하고 숙소 구한 다음날 부터 본 게임 시작이지.'
그 때부터 플레이어는 스스로 사람들을 영입해야만 한다. 회사처럼 공고를 내든 발로 뛰든 유령회사를 만들든, 3월 1일 이전에 최대한 양질의 동료를 모집해야했다.
'석하랑은 어그로 끌리면 찾아오게 되어있어.'
비단 석하랑 뿐만 아니라 은유하, 백희아도 마찬가지. 나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사무실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따라붙었네.'
내가 움직이기 무섭게 내 뒤를 밟는 자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신서울에 금발의 외국인이 무슨 의도로 들어왔는지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게 분명했다.
'그걸 위한 위장 신분이지.'
한국인의 허영을 자극하는 헐리우드 진출. 오라클 스튜디오는 신서울에서 내가 금발서양남으로서 정당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부터 할 것은 본격적인 헐리우드 배우가 될 이능력자의 스카웃.
"흠흠, 아이돌에 흥미 없으십니까? 크흐흐, 막 이러고."
뒤따라오는 남자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게 안 봐도 훤하다.
금발서양남, 혼잣말로 아이돌 운운함. K-POP 걸그룹 양성을 위한 방문??
'너희들 생각하는 대로 이능력자들 키우러 온 거 맞다.'
단지 해외로 수출하는 건 아니고 한국 내에서 계속 생활하기는 할 거지만.
'선의철 뜻대로 안 움직이는 걸 생각하면 인재 빼가는 것도 틀린 건 아닌가?'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발걸음은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카페, .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가 오랜 여행에 지쳐 생을 마감하기 위해 신서울에 산 건물.
"실례합니다-"
나는 문을 활짝 열어 커피향이 그득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 한국 히어로 협회 부산 해운대 지구.>
"게임을 하느라 출격이 늦었다...?"
백발의 여인은 냉기를 풀풀 날리며 테이블 너머의 남자를 노려봤다. 세련된 OL처럼 입은 정장의 하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던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사상자가 몇 명입니까?"
"...사망 7명, 중상 18명입니다."
"공항에 열린 차원문 치고는 제법 피해가 적었습니다."
"예, 예. 그게...."
"마침 해외 원정을 나가려던 헌터들이 없었으면, 아마 사상자가 배는 늘었을 겁니다."
"......."
남자는 침묵했다. 여인의 추궁에 대해 그는 일언반구도 할 수 없었다.
"마도기어의 긴급출동 알람은 어떻게 해제한 겁니까?"
"그, 그건 비밀입니다."
"......지금 장난쳐?"
여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순간적인 울화를 참지 못하고 존대까지 내팽겨친 여인의 분노에 취조실의 유리창이 쩍 하고 얼어붙었다. 여인은 손을 흔들어 마력을 거두었다.
"차원문 발생은 모든 히어로가 긴급하게 움직여야 할 사안입니다. 당연히 마도기어의 출력도 최대로 울리게 되어 있는 건 당신도 잘 알 겁니다. 심지어 차원문이 열린 김해 국제 공항은 당신의 관할지. 정말 알람이 울리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면 불법적인 방법으로 마도기어를 개조한 것이고, 알람이 울렸음에도 무시했다면 히어로의 의무를 저버린 것."
여인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옆에 놓인 도장 중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에 남자는 책상을 내리치며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자, 잠시만요! 공주님, 한 번 만 더 기회를! 저 말고도 히어로들이 출격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제가 아니었어도-"
"당신이 제 때 뛰쳐나갔다면 7명이 살았을 겁니다."
"차, 차원문이 공항에 열린 것 치고는 선방한-"
"그만."
쿵!
여인은 도장을 찍었다. 남자의 프로필이 적혀있는 종이에는 '청송'이라는 두 글자가 붉게 찍혔다.
"당신은 청송에 있는 교화시설로 보내질 겁니다."
"자, 잠깐만요! 아니, 씨발! 거기는 선가놈 투견 양성소잖아! 공주님 미쳤어?!"
남자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취조실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남자를 구속했다.
"야! 공주! S급이면 다야! 너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너는 씨발 매일매일 괴수 언제 나타나나 24시간 대기하고 있어?!"
"......히어로면 언제든 출격할 수 있게, 취미생활부터 바꾸십시오. 예, 가령 독서라거나, 음악 감상이라거나."
여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여인을 따라 온 다른 히어로가 여인에게 블루베리가 듬뿍 갈린 음료를 건넸다.
"여기요, 공주님."
"...감사합니다."
공주라고 불리는 여인-<설화공주> 석하랑은 텀블러를 받아 짧게 홀짝였다.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입니다. 유족분들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됐습니까?"
"협회 측에서 금전적인 보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지난 번에 강원도 전선에서 얻은 코어가 조금 남았을 겁니다. 그거 정부에 납품하고 정부 차원에서도 유족들에게 지원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그 놈들, 그냥 가만히 있으면 화환만 보내고 아무것도 안 할 작자들이니."
석하랑은 텀블러를 들고 자리를 떠나, 협회에 마련된 전용 개인실에 들어갔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석하랑은 허공에 얼음으로 된 풍선을 만들어냈다.
쾅---!!
석하랑은 풍선을 주먹으로 산산조각을 냈다. 조각난 얼음은 수증기 되어 허공에 흩어졌고, 석하랑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히어로란 놈이...어휴."
5:5 게임에 집중하느라 출동하지 못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오죽하면 여론의 뭇매에 선의철 마저도 손절했을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뭔가 획기적인 게 필요해. 히어로들에 대한 실망을 희망으로 바꿀 방법이.'
석하랑은 네트워크를 뒤졌다. 보면 머리가 아플 뿐이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을 읽으며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해야만 했다.
"......나중에. 나중에."
여기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가는 폭발해버릴 지도 모른다. 석하랑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언제나처럼 '경매장'에 접속했다.
"오늘은 뭐 좋은 장비 없나...?"
지난 번에 샀던 빙결저항 코트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석하랑은 다음 스케쥴까지의 시간을 살피며, 경매장에 올라온 품목을 하나 둘 살폈-
"...와, 이딴 걸 파네."
석하랑은 판매자의 당당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풍유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도랐나."
석하랑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 씁. 어떤 정신나간 년이 이딴 사기품목에 2억 깔고 사는 건데...? 쳐 뒤질라고."
석하랑의 눈에 불이 붙었다.
"내가 사가 사기꾼 새끼 조진다."
결코, 사심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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