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7화 〉2부 1장 17
<그 시각, 신서울 정부 청사 대통령 집무실.>
"장관, 그러면 지금 신서울에 들어온 예의 <금발벽안>은 미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
왼쪽 눈에 상처를 입은,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의 말에 외교부 장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합니다."
"자네 목을 걸고?"
"...예. 확실히."
일국의 지도자치고는 상당히 격한 수위의 발언이었으나, 외교부 장관은 남자의 언행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대통령보다도 더 대단한, VIP가 히어로 강대국 중 하나인 미국 정부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탁의 관계자가 한국에 왔다. 신서울에 스튜디오를 차렸어. 이것이 정말 헐리우드 배우를 영입하기 위함이라고 자네는 확신하는가? 응? 정말 미국 정부가 우리 한국에 위장으로 헌터 길드를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 않는 게야?"
"공식, 비공식 루트를 이용해 전부 확인했습니다. 금발양아치...아니 <프로듀서>가 한국에 온 이유는 정말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실제로 오라클 스튜디오에서도 한국 진출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구요."
"그건 미국발 찌라시 아닌가. 젠장. 뭐 하나 제대로 도움 되는 일이 없군. 그만 가보시게. "
대통령, 선의철은 외교부 장관을 물렸다. 면전에서 사람을 모욕하는 말에 외교부 장관은 얼굴을 붉혔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선의철은 허공에다가 질문했다. 그러자 곧 바닥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검은 로브를 입고 각시탈을 쓴 정체불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문신사>, 그대는 금발양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말이야."
"위장이 분명합니다. 분명 뭔가 음습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음습한...? 그건 위에서 내려오는 괴수들을 잡아 코어를 미국으로 불법 반출하겠다는 건가?"
"아뇨. 헐리우드 배우라는 이름으로 포르노 배우를 양산하려고 하는 걸 겁니다. 이걸 보시길."
문신사는 선의철에게 간략히 정리된 보고를 올렸다. 선의철은 문신사가 지금까지 스튜디오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보고 혀를 찼다.
"남자는 서류탈락에 여자만 면접까지 본다?"
"면접까지 본 호국청년단 단원의 말에 따르면 관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했습니다."
"미국인이 무슨 관상을 운운...아니지, 관상이라면 인정이지. 음음. 자네도 알다시피 호국청년단 놈들 인상이 과히 좋지는 않지 않은가."
"그리고 방금 전에 들어온 정보입니다. <운사>가 들어간 이후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운사? 그 운사?"
선의철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라면 나도 알고 있지. 서울 수복 작전에서 빌런에게 다쳤던 자가 아닌가. 차세대 S급으로 평가받던 이의 코어가 박살났던 것이 몹시 유감이었는데."
"경비원인지 사무원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말단으로 취직하는 듯 합니다."
"쯧쯧. 전직 히어로라는 자가.... 뭐, 됐네. 만약 취직을 했다면 그녀를 통해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법도 하군. 삼사는 아직 살아있던가? 그들을 통해 한 번 물꼬를 틀어보는 건 어떤가."
"<풍백>은 노화로 죽었고, <우사>는 제 7차 서울 수복 작전에서 전사했습니다. MIA입니다."
"쯧. 안타깝군."
선의철은 연신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2020년 당시 A급으로 찬란하게 이름을 떨치던 이들이 하나같이 '쓸모가 없어진 것'에 진심으로 탄식했다.
"일단 계속 입사 시도는 해보시게. 정말로 헐리우드 배우를 영입하기 위한 건지, 아니면 포르노 배우를 영입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도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이유를 알아내야 해. 유성에서 도청장치 달았다고 하는 건 어떻게 됐나?"
"노이즈가 심해 잘 들리지는 않지만, 임시 사원으로 영입한 아카데미 학부생과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E급 광속성 힐러? 아카데미 퇴학 예정자? 흠, 퇴학 당할 걸 알고 새 직장을 구한 건가. 마스크는 반반하니 잘하면 스크린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군. 어느쪽이든."
비릿한 선의철의 미소에 문신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각하. 어째서 금발양아치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시는 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금발양아치가 굳이 한국으로 온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가? 이 시국에 외국인이 대놓고 한국에, 그것도 신서울에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 이 말이야."
"...'전직 원탁'의 지인이 한국에 온 이유는 궁금합니다. 각하, 솔직하게 서로 터놓으시죠."
"셋을 세면 서로 본심을 말하도록 하지. 나부터 오픈하겠네. 괜찮나?"
문신사가 먼저 제안했다. 당돌한 제안에 선의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신사는 스스로의 정체를 명백히 숨기고 있으나, 둘은 서로를 제거하기에는 너무 관계가 깊어진 정치적 동반자였다. 믿음이 아닌 이용가치에 따라 엮인 신뢰관계였다.
하나, 둘, 셋.
"헌터 길드를 만드는 건 아닐 거다."
"헐리우드 배우 영입이라는 명목도 어디까지나 위장일 겁니다."
"그럼 이능력자의 육성을 위해? 미국으로 몰래 인재를 반출할 것 같지도 않아. 그럴 거라면 일본이나 중국처럼 좀 더 정체를 숨기고 들어왔겠지."
"오히려 오라클과 관계가 있다는 정체를 은연중에 흘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가지로 종합해본다면...."
둘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원탁의 관계자가 분명합니다."
"동감이네. 차기 원탁 후보자를 미리 스카우트 하려는 게 아닐까? 원탁의 에이전트 요원인 거지."
"오랫동안 후보에만 올랐던 <설화공주>를 진짜 원탁으로 올리려고 하는 걸수도 있습니다. 원탁 중 누군가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은 없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요."
"...이왕이면 호국청년단의 인재가 원탁으로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둘은 김칫국을 한 사발로도 모자라 장독대 째로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각하. 따님께서 이곳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 하던데...."
"내 딸은 안 돼."
"따님의 꿈이 헐리우드 진출이 아닙니까. 어떠신지요? 대통령 선의철의 딸이 원탁의 일원이 되다. 어떠십니까."
"안 돼."
선의철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아이를 금발양아치의 마수가 닿는 곳에 둘 수 없지."
"......그게 말입니다."
문신사는 각시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실은 이미...."
와장창.
선의철은 컵을 바닥에 내던졌다.
* * *
박라온.
과거 한국에 A급이 고작 10명 정도였을 때, 최강의 A급 3인이라고 평가받던 재능있는 히어로였다. 그녀와 다른 남자 히어로 둘을 포함하여 A급 셋을 <삼사>라고 불러, 운사-우사-풍백이라는 이명의 히어로가 한국의 히어로 업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본인들의 이능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기는 했으나, 선의철의 영향으로 그들의 이명은 지극히 한국적인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평양 사태로 S급 7명이 모조리 죽어 단 두 명만 남게 되면서, 세 명의 이능력자는 차기 S급으로 촉망받고 있었다.
그러나 삼사는 붕괴했다.
평양 사태 이후 서울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으로 펼친 <서울 수복 작전>에서 <운사> 박라온은 큰 상처를 입었다. 심장이 찔리며 하필 이능력자가 마력을 쌓는 근간인 '코어'를 다쳤다. 마력을 담는 그릇이 깨졌기에, 박라온은 심장의 상처를 회복했어도 E급 이상의 마력은 쌓지 못했다.
라온은 1년 동안 재활에 힘썼다. 국가 공무원으로서 받던 박봉의 재산을 모두 재활에 사용했고, 삼사 둘이 그녀의 재활에 많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한 번 깨진 코어는 마력을 모으고 싶어도 모이지 않고 줄줄 흘러내렸고, 결국 모두가 운사의 부활을 포기했다. 과거 찬란한 유망주라고 불리우던 A급 히어로는 그대로 히어로 업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뒤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히어로로는 더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헌터 길드에 들어가려고 해도 번번이 퇴사 권고를 받았습니다. 초기 1~2년에는 괴수를 사냥하는 노하우를 살려 정보를 팔았지만, 그것도 밑천이 떨어지고 나니 더이상 저를 찾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라온은 공장에 들어갔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거의 외국인 불법 체류자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숙식이 제공되는 곳을 연연하며 일을 했다. 간신히 과거의 인연으로 취직한 김해 국제 공항 경비대 대원의 임무도, 주인공이 한국에 입국하며 생긴 소동으로 인해 짤리고 말았다.
"라온 씨. 만약에 당신이 다시 A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 기적같은 일이 생겨 과거의 힘을 되찾는다면."
"......이곳에 계속 있을 겁니다. 사장님께서 저와의 계약을 먼저 파기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왜죠?"
"그 누구도 저를 찾지 않던 와중에, 사장님께서는 저를 고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사람에 상처를 많이 받았기에, 라온은 자신을 믿고 채용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 대해서 믿고 따르기로 했다.
내가 지휘관이기 때문이라거나 오라클 스튜디오를 뒷배경으로 하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를 떠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을 준 이 곳을 인생의 마지막 둥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히로인인 거 모르고 영입 안 하면 라온은 스스로 목숨을 정리하지.'
라온과 누리, 둘 다 그랬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몰려있던 와중에 마음의 안식처로 우리의 스튜디오를 둥지로 여긴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계약하도록 하죠. 연봉 3천. 정부지원금 포함. 숙식 제공. 별다른 일이 없으면 24시간 사무실에서 근무. 회사에서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비밀을 지킬 것. 괜찮으십니까?"
"충분합니다. 오히려 제게 이렇게 옷을 사주신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거지같은 중소기업보다 못한 계약이지만 라온은 계약을 받아들였다. 지장을 찍고, 사인을 하고, 마도기어에 마력으로 스캔을 하여 저장했다. 이제 라온이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거나 하면 범죄자로 찍히게 될 것이다.
"축하합니다. 우리 '청화 스튜디오'의 경비원이 된 것을."
"성심성의껏 일하겠습니다."
나는 라온과 악수했다. 거칠어진 손길은 유나가 발라준 수분크림으로 다소 보드라워졌다. 그 손길만큼 라온의 마음도 조금은 우리에게 열린 것 같았다.
"그럼 라온 씨. 비밀 엄수 조항에 따라, 만약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저는 당신을 고소할 겁니다."
"예, 예. 도대체 무슨-"
"저는 지휘관입니다. 스튜디오 '청화'의 사장이라는 건 위장이죠."
"......설마 미국계 헌터 길드의-아뇨. 아닙니다. 함구하겠습니다."
라온은 또 오해했다.
그녀는 내가 미국계 자본을 바탕으로 한국에 자리를 잡으려는 헌터 길드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국수주의 정책을 펼치는 한국에서 외국계 헌터 길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그건 정부 정책의 빈틈을 교묘히 이용해 바지사장을 내세워 만든 위장 길드다. 그리고 그들은 평양에서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괴수들을 잡아 코어를 자신들의 국가로 몰래 반출하려고 하기 십상이었다.
"그럼 이제 사장님을 지휘관 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경비 일에 혹시 호위 일도 포함이 되는-"
"아뇨. 지휘관 맞아요. <지휘관>."
명칭의 중복으로 인한 오해다. 나는 라온이 오해하지 않도록 분명히 언급했다.
"이능력자를 각성시키고 마력을 늘릴 수 있는 자. 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지휘관입니다."
"......예?"
라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를 믿는 듯 믿지 않느 듯한 눈빛은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왜요. 차라리 포르노 배우로 영입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까?"
"제 생각을 어떻게.... 아, 아니, 잠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
"한국에 오기 전부터 몇몇 이능력자들을 눈여겨봤습니다. 당신이 사무실 문을 연 순간부터, 당신이 <운사> 박라온인 걸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보자마자 합격이라고 했죠. 당신같은 의지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분명 저를 도와 인류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
라온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라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세계를 구하도록 합시다. 라온."
"......조건이 있습니다."
내 손을 잡는 라온의 눈빛에는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지휘관이라는 증거를, 제게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이럴 줄 알았어!"
유나는 울먹이며 침대 위를 점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