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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96화 (596/1,497)

〈 596화 〉2부 1장 26

"크흐흐흐흐흐."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청년, <누리마을해장국>-이하 해장국은 김가온을 향해 달려가는 청화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야, 걸려도 하필 저거에 걸리네."

히로인 중 최애캐가 김누리인 그는 DLC 업데이트 이후 랜덤하게 발생하는 이벤트에 걸린 걸 두고 조소를 금치 못했다.

"어쩌냐, 누리 이제 못 보게 생겼는데."

김누리인 줄 알고 다가갔더니, 사실 김누리의 언니인 김가온이더라.

수속성 A급, <운디네>라는 이명을 가진 21살 히어로로서 러시아 쪽 길드 <마트료시카>에서 활동하는 캐릭터.

김누리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더욱 시궁창으로 만들어 줄 예정이며, 김누리 루트에서 그녀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층 더 성숙하게 해 줄 트리거가 되는 여자.

'마약 섹스 비디오가 찍혀서 돌아다니게 되지.'

둘이 한 살 터울임에도 너무나도 모습이 똑같아 아무리 눈으로 구별해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건 게임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세상 사람들은 유출된 비디오를 보고 김누리가 약물 섹스를 한 것으로 알고 큰 혼란이 빚어진다.

김누리의 파멸을 바라는 괴인의 짓이었고, 결국 주인공과 김누리의 활약으로 사태는 일단락된다. 그 과정에서 김가온은 철저히 희생되는 캐릭터였다.

"어디 한 번 공략해보나? 보여주나? 흐흐."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김가온은 메인 히로인이 아니다. 심지어 서브 히로인도 아니다. 제작사는 김가온의 불쌍함을 인지했는지, 초반부 김누리와 마주치는 이벤트에서 김가온이 나올 수도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 김가온이 보이는 폭력성과 짜증에 학을 떼고 도망치기 일쑤.

어떤 직업으로 가든 김가온은 주정을 부리며 주인공을 매도하고, 결국 주인공은 자리를 피해야 된다. 자신도 해결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도망쳤고, 결국 김가온은 꽝 이벤트로 생각했다.

'김누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언니 욕하면 바로 친해지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는 청화가 캔맥주를 피하는 걸 보며 실실 웃었다.

'뒤에 빈 캔은 장난이냐?'

A급 이능력자가 술에 취해 작정하고 던지는 민폐짓이다. 운이 좋지 않으면 공원에 대자로 누워 병원에서 눈을 뜰 수도 있다. 그러면 하루가 쌩으로 날라가는 셈이었다.

"엿 먹여야지~"

타닥, 타닥. 청화가 김가온을 향해 한심해하는 사이, 그는 도네를 날렸다.

<누리마을해장국> : 김가온이랑 섹스하면 5만원! 스쿼드로 영입하면 10만원!

"킹전자산 오졌고요."

둘 다 성공하면 15만원. 성공할 리가 없지만, 만약에 성공해도 그로서는 이득인 셈이었다. 15만원에 누리와 똑같이 생긴 여인을 한 침대에서....

"자, 잘하면 자매덮밥까지...?"

꿀꺽.

화면 속 김가온의 표정이 굳어갈수록, 그의 표정도 굳어져만 갔다.

"씨, 씨발."

그는 김가온의 표정을 읽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충전 안했는데...."

이제 대화를 시작하고 있는 타이밍이건만, 왠지 모르게 그는 후원금 잔액을 충전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이름."

"김가온 입니다."

"나이."

"21살입니다."

"직업."

"...러시아의 원탁 <라스푸틴>의 에스콰이어 길드, <마트료시카>에소속된 헌터입니다. 이명은 <운디네>입니다."

"쓰리 싸이즈."

"74-56...예?"

"쓰리 싸이즈."

"......80입니다. 그, 제 쓰리 싸이즈는 대체 왜?"

"궁금해서요."

"......."

김가온은 복잡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정수리 위에 30cm 자를 대고도 한참 모자란 키차이 때문에, 나는 그네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자, 당신이 좋아하는 흑맥주. 마셔요"

"그, 말씀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말 편하게 하고 있는 건데요."

"......."

더 불편해졌으리라. 나는 가온의 손 위에 캔맥주를 올렸다. 받지 않으면 더 불편해질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가온은 맥주를 받아야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습니까?"

"...동생이 있습니다.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집에 돌아왔는데...그...."

"그?"

"...한국 도착하자마자 길드에서 귀환 명령을 내려서...."

"가지 마세요. 명령입니다."

나는 가온의 말을 끊고 곧장 지시를 내렸다.

"예? 하지만."

"라스푸틴에게는 제가 잘 말해두겠습니다. 현지에서 저를 지원해 줄 지원가가 필요하다고 전해두도록 하죠."

당연히 전하지 않는다. 파계승 <라스푸틴>의 악명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고, 가온은 러시아로 귀환하는 즉시 제정신이 아니게 될 터.

'김가온 지금 낚은 게 천만 다행인가?'

언니의 섹스 비디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누리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애써 그런 불행을 일부러 겪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해제해야 할 폭탄이었는데 잘 됐어.'

김누리가 아닌 김가온을 만난 것도 어찌보면 좋은 징조다. A급 이능력자가 어디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도 아니고, 김가온의 스펙은 분명 높다.

'히로인 관계자라서 봐줬다.'

순수 히로인으로만 스쿼드를 구성하려고 했건만, 히로인의 언니라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가 아닐까.

나는 잠시 생각을 위해 시스템창을 열어 진행을 일시정지했다.

"왜 김가온이 여기서 나오죠."

<유나팬티보라색> DLC에용ㅋㅋㅋㅋㅋ

"젠장."

원래 마약에 절여져있다가 결국 괴인으로 죽어야 할 존재를 한국에 잠시나마 들어오게 만들다니. 왠지 모르게 내가 알고 있던 매운맛들이 조금씩 희석되는 듯한 느낌에 머리가 살짝 띵했다.

- 근데 김가온 왜 저자세임????

- 휴가인데 부르면 나라도 빡치겠다ㅋㅋㅋㅋ

- 원탁결의? 사기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 거 모르냐!

나도 김가온의 존재에 혼란스러운데 당연히 나와 함께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혼란에 일일이 답할 이유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전했다.

"잘하면 김가온 영입 각이긴 한데."

- ???

"원탁 관계자인 거 밝혔잖아요. SS급 비밀코드까지 얘기하면 바로 지휘관인 걸 알 걸요?"

에스콰이어.

원탁의 히어로가 자국 내에서 활동하는데 지원하기 위해 만든 길드로, 대부분은 원탁의 산하 조직이다. 김가온이 <운디네>로 활동하던 <마트료시카>도 똑같은 목적을 가진 조직이었다.

'라스푸틴이 다 조져서 그렇지.'

히어로로 전도 유망한 이들이 다 괴인이 된 것은 라스푸틴에 관계가 있다. 라스푸틴에게 당하는 바람에 그들은 성욕밖에 모르는 괴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러시아 보냈다가 자궁을 큥큥당할 바에는 제가 데리고 있는 게 더 낫지 않아요?"

- 그렇긴 해

- 큥큥ㅋㅋㅋㅋㅋ

- 청화님은 남편님께 큥큥당한 건가요!

"시끄럽고요. 히로인 7명 모일 때까지 임시 스쿼드원으로 할까요?"

마음대로 해.

그는 내 선택을 존중했다. 히로인이 아닌 여자를 내가 건드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나를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럼 김가온 영입 각 봅니다. 어...섹스하고 스쿼드 넣으면 합쳐서 15만원이죠? 감사합니다. 미리 입금하세요."

<누리마을해장국> 근데 님 히로인말고는 스쿼드 안 짜신다고 안 했음? ㅎㅎ....

- 추장아 해하다

- 10만원 스쿼드 미션 걸어놓고ㅋㅋㅋ

- 갑자기 위험자산ㅋㅋㅋ

"음...."

맞는 말이기는 하다. 김가온의 불행함과 별개로, 김가온을 굳이 내 스쿼드에 넣을 필요는 없었다.

"근데 15만원이면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5판이잖아요. 무조건 갑니다."

허락은 받았다. 사실 건드릴 이유는 없지만, 그녀에게 붙은 <운디네>라는 이명에 조금 흥미가 동한 게 사실이었다.

"아, 근데 그냥 먹으면 재미없으니까...흐흐흐."

삑. 나는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흠흠흠. 김가온 양. 제가 왜 현지 지원가가 필요할까요?"

"어, 음, 혹시 뭐 S급 괴수 퇴치를 위해서라거나...?"

"일단 보여드리죠.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가온에게 명함을 건넸다. 가온은 분홍색 명함을 받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오라클 스튜디오? 설마?"

"당신들 표현에 따르면 수정구 따까리들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군요. 원탁 히어로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서포터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따까리라뇨. 어, 음, 요원님도 분명한 에스콰이어로서-"

"전직 원탁의 에스콰이어라고 해봐야 별 의미는 없지요. 아, 이거 어디까지나 충격을 좀 덜 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일종의 빌드업."

나는 가온의 손에 들려있는 캔맥주를 붙잡았다. 그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게, 그녀의 손등에 작은 글씨를 썼다.

지, 휘, 관.

"??!??!?"

"자, 원 샷."

나는 가온이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기 전에 그녀의 입에 캔맥주를 들이부었다. 가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맥주를 벌컥벌컥 삼켰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캔뚜껑을 따놨죠. 조금 정신이 돌아옵니까?"

"......꿀꺽."

가온은 입안에 들어간 차가운 흑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덕분에 '지휘과아아아아아아안??!?'하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그거 지르면 바로 게임오버니까.

"어디 조용한 곳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저기요? 가온 양?"

"아."

가온은 창백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네?"

"웁."

"......!!"

나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흩뿌려진 빈 캔의 개수는 무려 여덟. 한 캔에 500ml로 마셨다면 혼자서 캔 맥주를 여러 종류로 4L를 마셨-

우웨에에에에에엑.

김가온의 (나에 대한)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 * *

"하아."

김누리는 홀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4인가족이 충분히 쓸 수 있는 넓은 집이었으나, 정작 가족들은 아무도 집에 없었다.

"엄빠는 돈벌러갔고."

어려서부터 김누리의 부모는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덕분에 신서울에 멋드러진 4층 원룸 건물을 살 수 있었고, 누리는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돈벌이가 '헌터'였기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따라서 누리는 고3이 될 때까지 한 살 터울인 언니와 함께 생활하는 일이 잦았다.

"김가온은 술쳐마시러 나갔고."

지금은 김가온마저 없다. 소파에 가만히 누워있는 김가온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그녀는 짜증을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술에 취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주정을 부리길래 그냥 마도기어의 연락을 차단해버렸다.

"이제 뭐하지...."

김누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잠겨있는 기분은 언제나 좋았다. 남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순간에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고 비방할 자들이 없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김누리가 조용히 눈을 감았던 순간.

덜컥. 드르륵.

대문의 문이 열렸다. 김누리는 어떤 욕설을 퍼부을까 속으로 고민하며 문을 열었다.

"야, 김가온. 지금 몇...시...."

"익스큐즈미, 레이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남자였다. 갑자기 처음 보는 남자가 집에 들어온 것에 김누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남자가 부축하며 데려온 김가온과 남자의 옷상태를 보고 금방 상황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언니가 실수를...."

"아닙니다. 제가 너무 많이 먹여서 그런거예요. 일단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예, 예! 들어오세요. 어, 음...."

"이런 사람입니다."

금발의 외국인은 정중한 손길로 명함을 건넸다.

"오라클 스튜디오?"

"사업차 회식을 하다가 그만. 가온 양의 방은 어디입니까?"

"이, 이쪽이요."

누리는 가온의 방으로 남자를 안내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는 걸 생각하기에는 가온의 몸에서 풍겨지는 술냄새와 남자의 옷 상태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어, 으...."

원래라면 누리가 가온을 부축했어야 했다. 하지만 누리는 차마 가온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가온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누리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정수기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사이, 누리는 부엌 선반을 열었다.

"꾸, 꿀 없으니까 설탕으로 되겠지?"

어차피 둘 다 단 건 똑같으니까 상관없겠지? 당황한 누리는 숟가락으로 설탕을 두 스푼 컵에 집어넣고 휘휘 저었다. 과연 인사불성이 된 가온이 마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일 아침에 침대 시트를 새롭게 빠는 건 싫었다.

소곤소곤.

살짝 열린 방문 틈사이로 둘의 이야기가 들렸다. 혀가 풀린 가온은 남자의 손을 붙잡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랑 섹스해주세요."

"......!!"

그곳에는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누리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높은 어른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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