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1화 〉2부 1장 31
“아….”
누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나처럼 맞이하는 자신의 방 천장은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독특한 느낌을 주는 무늬가 있었다. 마치 물이 튄 것만 같은 형태의….
새근, 새근.
“아, 썩을.”
누리의 옆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언니, 김가온이 아기처럼 잠자고 있었다. 심지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그녀는 누리를 끌어안고 자고있었다.
“.......”
누리는 제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태어날 때 처럼 태초의 상태로 있는 건 누리도 마찬가지. 점점 흐릿해진 의식이 또렷해지기 시작했고, 누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섹스….”
졸업을 앞두고 있는 여고생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어젯밤 두 자매가 한 남자와 함께 벌인 광란의 밤은 분명 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와, 저게 저기까지 튐? 미친.”
누리는 천장의 얼룩자국이 어쩌다 생겼는지 떠올렸다. 분명 둘 중 누구 하나가 그의 손길에 허리를 들썩이다 분수를 터뜨렸던….
“난 아님. 김가온임.”
누리는 가온의 팔을 살포시 들어올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졌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옷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헐.”
설마 누가 치웠나? 어제 소동이 있어서 엄빠가 돌아온 건가? 누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꽃효녀각인데.’
부모는 열심히 돈을 벌러 간 사이, 비어있는 집에서 두 자매가 금발서양남을 두고 한 날 한 시에 처녀를 잃다니.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짓이었다.
“쓰바, 어쩌지? 옷, 옷은….”
누리는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언제나처럼 부모님이 사놓은 싸구려 팬티에 손이 갔지만, 누리는 큰맘을 먹고 나름 예쁘다고 생각하는 속옷을 챙겨 입었다.
‘위는 티셔츠로.’
유감스럽게도 누리는 브래지어가 의미가 없는 몸이었다. 누리는 결국 팬티와 하얀 티셔츠를 안에 받쳐입고 실내용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샤워는 할 필요가 없었다.
몽글몽글.
“오오오.”
누리는 제 몸 안에 피처럼 흐르는 마력을 조종하며 전신에서 방출했다. 마력은 누리의 몸에 묻어있던 이물질을 말끔히 날려버렸고, 누리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여 이물질을 날려버렸다.
“후우.”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누리의 온몸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리는 손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가즈아.”
거실에 부모님이 있다고 한들, 그가 부모에게 죽도록 맞아 잡혀갔다고 한들, 그는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아침을 맞이하자마자 맞아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제 20살인데 쎅스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음!”
누리는 스스로의 행위에 자기합리화를 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따스한 스프 냄새가 누리의 코를 간질였다. 고소한 크림치즈의 향은 어제 먹었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명한 음식의 향이었다.
“어…?”
“일어났니?”
부엌의 그는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3분 시리즈나 편의점에서 구매한 듯한 식자재가 차고 넘쳤지만, 그는 제법 맛깔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가온이 가서 깨워줄래? 늦으면 아침 없다고. 바로 와서 먹기만 하면 끝이거든.”
“아, 네. ...그, 어제는.”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배고프지? 어제 그렇게 열심히 힘썼는데.”
“힘은 오빠가 더 많이 쓴거 아님…?”
그는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벗었다.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은 진수성찬까지는 아니었어도, 누리의 집에 있는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정이 넘치는 아침식사였다.
“우리 엄빠는?”
“누리네 부모님? 안 오셨어. 만약에 오셨으면 내가 바로 도망갔지. 흐흐.”
“...그건 그렇네. 허, 벌써 7시임?”
“겨울은 새벽이 기니까. 이제 곧 봄이 되면 서서히 태양도 빨리 올라올 거야.”
그는 컵에 든 음료를 홀짝이며 피식 웃었다. 어제 자매를 그렇게 괴롭히던 짐승같은 남자는 부엌에서 신사처럼 점잖게 행동했다.
"......."
오늘이 매일같았으면 좋겠다. 침대에서 잠을 깼을 때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더이상 아침에 혼자 일어나 스스로 밥을 준비하며 쓸쓸히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리는 가슴속에 몽글몽글 피어나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부정맥인가."
"마력각성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몰라.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누리에게는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마력각성.
김누리는 마력을 각성했다. 이능력자가 되었다. 다름아닌 저 남자와의 성행위를 통해. 지휘관의 은총 덕분에.
"......싫다, 조금."
"응? 뭐가?"
"있음. 그런게."
누리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와의 만남은 그가 지휘관이었기에 가능한 만남이었지만, 누리는 그가 지휘관이라는 것에 깊게 좌절했다.
만인의 존재.
누군가 한 명이서 독점할 수 없는 존재.
……가지고 싶지만 역설적으로 가질 수 없는 존재.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누리는 식사를 준비하는 그를 바라보며 게슴츠레 웃었다. 그를 가질 수 없다면, 그가 나를 가지게 만들면 되는 게 아닐까?
'나 좀 천재인 듯.'
누리는 헛기침을 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오빠, 혹시 여자친구 있음?”
“여자친구? 없는데.”
“그럼 나랑 결혼해주삼.”
“갑자기 커브도 없이 직구로 꽂아버리네.”
“......아, 아으.”
누리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잠그고 냉수에 얼굴을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 그냥 해본 소리임. 신경쓰지 마셈."
“결혼이라...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 걸. 나는 이미 인생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어서.”
“그, 그치? 노, 농담임. 진짜로 받아들이면...흐끅."
"잠깐 앉아있을래? 내가 김가온 깨우러 갈게."
김누리, 20세.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첫 고백은 따뜻한 스프와 빵이 함께하는 서양식 아침 식사와 함께 뱃속으로 사라졌다.
* * *
<잠시 뒤, 사무실.>
“했네요, 했어."
"한게 분명합니다. 그것도 둘이나."
나는 사무실에 오자마자 둘의 눈총을 받았다. 가온누리 자매는 죄를 지은 것도 없지만 죄인처럼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반가워요, 먼저 개발당한 사람이에요. 이름은 이유나. 히어로 아카데미 자퇴 예정인 학부생이죠."
"다음으로 개발당한 사람, 박라온입니다. 이전에는 운사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원탁 히어로 라스푸틴의 에스콰이어 길드, 마트료시카에서 <운디네>로 활동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김가온이에요."
"동생 김누리. 19...20살이고, 다음 주에 고등학교 졸업함."
찌릿. 나는 유나와 라온의 시선을 손을 흔들어 흘렸다.
"미성년자는 아니니까 괜찮지 않아요?"
"외형을 생각하면 조금 신경은 써주시는게?"
"걱정마요. 나는 범죄자가 아니니까. 그 정도 분별력은 가지고 있습니다? 후후,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나는 좌우로 앉은 네 명의 팀원들에게 다시 한 번 내 소개를 했다.
"<지휘관>의 재능을 가진 자. 세계를 구하기 위해 헬조선에 잠입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 그대들의 태양이 되어줄 존재, 시안.w.히비스커스. 한국에서의 활동 이름은 백청화라고 할게요."
"백청화요?"
"그 이름과 원래 이름 사이에 무슨 관계가...?"
"하얗고, 푸른, 꽃. 영어 이름에 해당하는 한자를 적당히 엮은 이름이니까 별 의미는 없어요."
사실 의미는 엄청나게 많지만, 굳이 구분하지는 않았다. 청화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서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고.
"제가 한국에 온 이유는 간단해요. 오라클의 마지막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 지금부터 있을 이야기는 모두 비밀입니다? 지킬 수 있죠?"
끄덕끄덕.
"...물론 모든 걸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당신들의 전투력이 실제 S급에 이르렀을 때,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안전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에요?"
"단순히...이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셨습니까?"
"한국의 문제만 해결하려면 그냥 미국에서 개입하면 될 문제죠. 섭섭해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제 나름의 규칙이니까."
세계의 이면에 있는 위험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최소한 S급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내건 규칙이었다.
"S급이 되기 전까지는 저를 믿고 따라와주시길. 물론 제가 한 번 물꼬를 터놓은 덕분에, 제가 굳이 마력공급을 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점점 늘어날 거예요."
엄밀히 따지자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마치 자신이 점점 성장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실제로는...본래 쌓여있던 마력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활성화되는 셈이지만.
"그러니까 여기서 확실히 말할게요. 예언이 예언인지라 모든 걸 밝힐 수 없는, 많은 걸 숨기고 있는 사람을 믿고 따라와주시겠습니까? 이대로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비밀만 지켜주신다면."
"......만약에, 저희가 일상으로 돌아가도 사장님이 지휘관인 걸 퍼뜨리거나 하면요?"
"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본게 되겠죠 . 하지만 저는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넷을 슥 눈으로 훑었다.
"저는 믿을만한 분에게만 몸을 허락하거든요."
"크흠, 흠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보통 남녀가 바뀌었을 때 아닙니까?"
"믿을만한 사람...."
"신뢰도만 따지면 당신께서 더 높으시면서."
넷은 저마다 반응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곧장 때려치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없어야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열심히 몸을 써줬는데.'
일상 생활로 돌아가도 과연 지휘관 없이, 나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설령 마력은 늘어나면서 힘은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밤의 침대가 그리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침 3명 이상...1명 더 늘어서 4명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떤 활동이요?"
"아이돌."
"예...?"
"여기 스튜디오잖아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다른 길드 견제를 받지 않고, 정부측의 의심도 사지 않고 '현장'을 돌아다닐만한 일이 뭐가 있겠어요?"
탁. 나는 마도기어에서 나의 계획을 뽑아냈다. 허공에 떠오른 달력에는 이미 유나, 라온, 누리, 가온의 스케쥴이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배틀슈트를 구매하는 이유는 나중에 영화 촬영을 더욱 실감나게 하기 위해. 전장에서 실전을 겪어보는 이유는 메소드 연기를 위해. 사냥한 마물로부터 얻는 부산물이나 코어는 기부하는 거죠. 활동 자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제가 알아서 벌어올테니까."
그 누구의 의심을 살 건덕지도 없다. 만약 의심을 사게 된다고 해도, 적당한 이유를 붙여 무마하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대신 여러분들이 하나 정해주셔야 할 게 있어요."
나는 처음으로 넷의 의견을 물었다. 스타팅 셋이면 아무 문제없이 해결될 일이었지만, 가온이라는 요인이 한 명 더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빚어진 문제였다.
"......일요일은 풍유환 만들어야하니까 패스. 그러면 나머지 요일마다 한 명씩밖에 못 하는데."
""""......!!""""
넷은 금방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넷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월화, 목금은 고정. 그러니까 수요일이랑 토요일에는 어떻게 할 지 정해주셔야-"
전쟁이 터졌다.
* * *
"아아, 듣고 있나요."
"말하라냥."
"타깃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대한민국 신서울."
"알았다냥. 언제까지 하면 되냥?"
"음...한국시 기준 2025년 3월 1일 오후 2시?"
"......너는 너무 사람을 굴리는 게 빡시다냥. ...흐흐, 알았다냥. 한국이니까 한국 기준으로 하면 되겠다냥."
"단기 쓰면 제가 당신 모가지부터 뽑아버릴 거예요. AD 2025년. 기원 후. 알겠죠?"
"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