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화 〉2부 2장 08
4명을 순차적으로 보낸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유나가 입으로 받아낸 정액은 여분의 풍유환이 되었고, 나는 미리 만들어놓았던 풍유환을 챙겨 밤거리로 나왔다.
싸아아아--
야밤의 찬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신서울이라도 새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신서울이라고 하더라도 야밤에는 싸돌아다니지 않는게 상책.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밤은 언제 어디서 괴인이나 괴수가 나타날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간이다. 설령 광검이 신서울 전역을 틀어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물론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항상 보디가드 아닌 보디가드가 뒤따르고 있다. 은유하가 내 주변을 배회하게 만드는 X로이드가 있고, 히어로 협회에서 나를 감시하는 히어로가 있고, 선의철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보는 호국청년단의 빌런이 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죽이고 싶어하지만 죽이기 귀찮아하는 암살자가 있다.
나는 그녀가 내 주변에 배회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24시간 편의점에 들렸다.
짜랑짜랑.
“어서오세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은 나를 향해 고개만 꾸뻑 숙였다.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에 다소 흠칫했으나 크게 꺼리지는 않았다.
“이거 계산 부탁드립니다.”
“........”
대신 내가 집어든 두 개의 음료에 상당히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두 개의 우유 바코드를 스캔했다.
“6000원입니다.”
“여기요.”
350ml 우유 치고는 살인적인 가격이지만-심지어 2+1도 아니다-신서울에서는 이게 기본이다. 애초에 대관령 젖소 농장을 제외하고 모든 축사가 괴수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것보다 살인적인 물가가 지갑을 찌르는 게 더 날카롭다. 나는 두 개의 우유를 챙겨 밤의 공원에 나왔다.
“.......”
벤치에 앉은 나는 마도기어를 눌러 경매창을 꺼냈다. 유나의 도움으로 풍유환을 만들기도 전에 이미 경매에 올려둔 풍유환은 압도적인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2천억. 이 정도로 돈지랄을 하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다. 나는 경매를 올린 주인으로서 판매자에게 바로 문자를 넣었다.
[지금 구매하실래요?]
[장소.]
[신서울 XX공원 벤치.]
[10분내로 갑니다.]
아니나다를까 신속하다. 누가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역시 다른 이가 효과를 보니 안달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다.
‘효과 보려면 조금 많이 복용해야 할텐데.’
석하랑은 S급에서 SS급으로 올라가는 경계에 있었기에 바로 체형이 보정되는 효과가 발생했다.
하지만 나에게서 2천억을 주고 풍유환을 구매할 고객, 은유하는 사정이 다르다.
A급으로 각성한 그녀는 레벨로 따지면 광속성 77. 무려 13개의 풍유환을 먹어야만이 S급으로, 그리고 B컵으로 각성할 수 있는 것이다.
‘안쓰러운 사람들.’
신은 그들에게 이능력의 재능과 명예, 재력을 주었지만 유방만은 하사하지 않았다.
히로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야말로 히로인의 공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 만큼, 석하랑-은유하-백희아 트리오에게는 가슴이 공략 포인트 중 하나였다.
‘물론 꼭 그것만 공략 포인트는 아니지.’
정석은 그들의 이익에 응하는 것.
석하랑은 히어로서의 행보를, 은유하는 경제적 이익을, 백희아는 국가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 한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 특히 음식이 대표적이다.
석하랑은 블루베리와 양식을, 은유하는 커피와 그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백희아는 국내산 차와 떡을 가장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선물하는 것도 히로인을 공략하는 방법이다.
먀아-
바로 지금 처럼. 나는 벤치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검은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배고프니?”
먀아아아.
“지금 가진게 이것밖에 없는데...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일부러 마시지 않고 있던 우유의 입구를 뜯었다. 검은 고양이는 풀쩍 벤치로 뛰어올라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고양이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마셔. 조금 차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먀아아.
고양이는 우유곽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의 윤기나는 털을 손으로 쓸었다.
“고양이가 초코 먹어도 되던가…?”
흠칫. 열심히 우유-민트초코우유를 할짝이던 고양이는 꼬리까지 빠짝 서버렸다. 나는 고양이를 안심시키듯 등을 토닥였다.
“배고프면 어쩔 수 없지.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병원 데려가줄게.”
먀아아…
고양이는 다시 우유를 핥는데 집중했다. 역시 2월이 지난만큼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챕터를 원래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베스트이기는 하지만, 꼭 정석대로 할 필요는 없다. 원작의 흐름은 결국 히로인들과 함께 하기 위한 사건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나중에 장난 좀 쳐야겠는데.’
일단 당장은 경계심을 낮추는 것부터 시작. 이미 경계심은 풀어져 내 손길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상대는 나를 노리는 그 어떤 적보다도 강력한 존재다.
절풍의 펜릴.
다크 레기온의 간부이자 최강의 암살자가 내 옆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나타났다.
물론 너무나도 사랑해마지않는 민트초코우유에 낚여 우유팩에 혀를 들이밀기는 했지만, 그런 대범함은 어디까지나 내게 걸리더라도 언제든지 목을 뎅겅 날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3월 1일에 제대로 대처 못하면 펜릴에게 게임오버 당한다.’
당연히 그런 엔딩은 사양이다. 나는 펜릴의 털을 간질이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또각, 또각.
뒤에서 구두굽소리가 들린다. 나는 펜릴의 등을 쓰다듬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0분 딱 맞춰서 오셨네요?”
“물건을 보고싶습니다만.”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나는 풍유환이 담긴 케이스를 꺼내며 몸을 돌렸다.
“여기있습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검은 롱패딩으로 몸을 가린 여인이 내 눈앞에 있었다. 어두운 밤 중에도 훤히 드러나는 붉은 립스틱에 자연히 시선이 흘렀다. 밤인데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게 특이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변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신분세탁 대외 활동용 X로이드구만.’
이미 내가 그녀의, 은유하의 인형을 훤히 꿰고 있는 이상 은유하는 나를 속일 수 없다. 본인이 사놓고는 인형을 보내 대리구매를 하는 깜찍한 행동에 나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이게 그것입니까?”
“예. 사용해보시면 효과를 아실 겁니다.”
“제가 사용할 건 아니라서.”
유하는 케이스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바로 마도기을 두드렸다. 한순간에 2천억을 지불하는 포부에 나는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쿨거래 감사드립니다.”
“쿨하지는 못할 겁니다. 제가 부탁을 드려야 할 게 있어서.”
“부탁이요? 설마 더 구매하시겠다는 건 아니죠?”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제가 어디의 사람인지는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선공은 유하가 날렸다.
“물론이죠. 유성에서 오신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회장님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손녀 사랑이 지극하시어 이런 물품을 모으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하실 말씀은?”
“앞으로 귀하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의외. 은유하는 대놓고 나와 거래를 트기를 제안했다. 일부러 내가 은유하에게 나의 정체를 어느정도 어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나에게 접근하는 것은 조금 이르기는 했다.
“어떤 거래를 말씀하시는 거죠?”
“풍유환에 대한 독점 거래를 바랍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풍유환은 고통받는 분들을 위한 모두의 것. 한 사람이 독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억만금을 준다고해도?”
“조 단위로 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신념이지요.”
은유하 루트를 탈 것도 아닌데 굳이 은유하에게만 팔 이유는 없다.
“진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아까 하신 말씀이 그분의 진의는 아닐텐데요.”
“반쯤은 진담이었습니다. 가치있는 물건에 대한 독점은 기본이니까요. 그럼...인적 자원의 지원은 어떠십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X로이드를 지원하겠습니다.”
은유하가 진짜 목적을 내밀었다.
“원하는 체형의 여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그에 맞춰 새롭게 X로이드를 제작하여 발송하겠습니다. 기존에 있던 연예인, 유명인, 심지어 히어로도 가능합니다. 로열티는 저희 쪽에서 지불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저 특별주문 하겠습니다.”
나는 인형의 손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회장님 손녀분과 똑같은 X로이드를 보내주시길.”
“......그건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인형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게 아닐까 하는 고민. 물론 그 고민은 모두 허사다.
‘X로이드라도 체형을 99%까지는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지.’
은유하와 똑같은 몸매의 X로이드.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제가 은유하 님의 X로이드를 요청한 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지요.”
“무엇입니까?”
“X로이드 본연의 임무. 섹스요, 섹스.”
먀앗?!
벤치에서 우유를 핥던 고양이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인형의 손을 붙잡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 됩니까?”
“...은유하 님의 어디가 그렇게 섹스하고 싶으시길래?”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 그건 어떤 남자든 마찬가지죠.”
“만약 본인이라도 건드릴 수 있다면 바로 덮치시겠습니다?”
“무리도 아니죠.”
“.......”
나의 노골적인 섹스어필에 은유하는 침묵했다. 은유하가 자신을 은유하라고 속이는 이상, 내가 은유하와 하고싶다고 해도 본인은 결코 싫은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나는 유성 그룹의 직원, 그러니까 회장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회장이 은유하든 본체가 은유하든 뭐든, 이 이야기에서 은유하는 철저한 제 3자였다.
“...제 선에서는 대답하기 힘든 문제로군요.”
결국 은유하는 장고끝에 한 수 물러나기로 했다. 과연 어느쪽이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될 지 판단을 내린 다음 제 이익에 맞게 결정을 내릴 터.
“꼭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나는 인형의 손을 꽉 붙잡으며 눈을 맞췄다. 선글라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금빛의 눈동자는 정확히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질내사정 가능한 사양으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
“아, 애널 플레이도요.”
“.......”
은유하의 인형은 부리나케 자리를 이탈했다.
* * *
"아, 오빠. 오셨어요…?"
유나는 나를 반겼다. 소파에 차례대로 기절해있던 넷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사무실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다들 집에 안 갔나봐?"
"...다리 후들후들 거리는데 어떻게 가요. 시간도 많이 늦었고.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어요."
"여기가 친구 집인가?"
"남자친구 집?"
나는 유나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렸다. 유나는 눈을 흘기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돈 벌고 왔지. 오늘 옷 맞추러 갈 건데 돈이 있어야 사지 않겠어?"
나는 마도기어에 찍힌 우리의 군자금을 보였다. 유나는 눈을 손으로 비비며 0의 수를 확인했다.
"......얼마에요?"
바로 포기. 무수히 많은 0의 향연에 유나는 잠기운이 확 달아는 듯 했다.
"2천억."
"...혹시 오빠 지휘관인 거 걸렸어요?"
"그런 셈이지. 걱정마.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왔으니까. 풍유환을 계기로 현지 협력자가 생긴 셈이야. 누군지는 비밀."
라온이 알면 상당히 꺼려할테니 당장은 숨겨야했다. 자본이 2천억이나 있다는 걸 유나 이외에 다른 이들이 알면 그건 그거대로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데 오빠. 저 진짜로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요."
"응, 뭔데?"
"......어깨에 있는 고양이는 도대체 뭐예요?"
"아, 이 친구?"
나는 내 어깨에 앉은 고양이의 턱을 간질였다. 갸르릉거리는 검은 고양이는 길게 하품을 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우리 새 팀원."
"팀원이요?"
"응. 스쿼드."
"...고양이한테 하시려는 건 아니죠?"
냐아앗!
고양이는 유냐를 향해 입을 벌리며 역정을 냈다. 나는 고양이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에이, 설마 그러겠니. 자, 본모습을 드러내줄래?"
고양이는 내 어깨에서 뛰어올라 소파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몸에서 녹색의 마력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 어…?"
고양이는 점점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나와 엇비슷한 키로 성장한 녹발의 여인은 하얀 메이드복에 고양이귀 카츄사를 머리에 달고 있었다.
"수인계 이능력자, 김펜릴이다냥!"
"......컨셉 정말 확실하네요. 그보다...조금 엄청 강하신 것 같은데…."
"맞아. S급이야."
"......처음뵙는 분인데요?"
"아, 그거 내가 설명하겠다냥."
펜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당히 말했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 <절풍의 펜릴>! 오늘부로 지휘관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냥."
"전향했어."
"......예?"
유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펜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득했어."
민트초코보다도 더 달콤한 말로, 나는 펜릴을 나의 편으로 만들었다.
"...섹스로 설득하신 건 아니죠?"
"아직은 아니다냥."
"......아직은?"
"얘 좀 무섭다냥."
"여신이니까."
잠시 뒤.
아직 다른 셋이 잠에 취한 사이, 나는 여신의 추궁에 따라 김펜릴을 설득한 방법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