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4화 〉2부 2장 09
"망했어!"
OL 차림의 여인, 선겨울은 부리나케 인도를 달렸다. 첫 출근날부터 지각을 하게 생긴 자신의 상황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빠는 왜 그런 짓을 해가지고!’
외국계 회사, 그것도 오라클과 관계가 있는 회사에 취업을 시도한 건 바로 선의철의 귀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또다시 부녀지간에 사이는 멀어졌고, 결국 선겨울은 집을 나가겠다며 크게 싸우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결국 서너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이미 시간은 조금 늦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를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선겨울은 급하게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선겨울은 9시가 되기 딱 5분 전에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환기중인지 밖의 창문은 열려있었고, 호흡을 내쉬며 선겨울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출근했습니다…?”
어제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에 선겨울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큰 사이즈의 침대는 매트리스가 바뀌어 있었고,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출근한 게 아닐까 싶어 안심하려던 찰나, 샤워실 문이 열렸다.
“아, 유나 왔니?”
“.......”
선겨울은 알몸으로 나온 남자를 한참동안이나 응시했다. 그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몸의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오늘은 늦게 와도 된다고 하니까. 일단...어.”
남자는 그제서야 출근한 사람이 선겨울임을 깨달았다. 선겨울의 시선은 남자의 아랫도리를 향해 꽂혀있었다.
뿌----우.
선겨울의 머릿속이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것과는 다른, 구렁이 한 마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 어으, 그러니까.”
그리고 선겨울의 머릿속에 기억이 파릇파릇 떠오르기 시작했다. 농담으로 하던 말이기는 했지만, 자신과 섹스해야 할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이 갑자기 빛처럼 상기되었다.
“음….”
그는 젖은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감고 아래를 가리켰다.
“선겨울 씨, 오자마자 일 시켜서 미안한데요.”
“네, 네!”
“1층가서 음료 좀 사와주실래요? 선겨울 씨 마시고 싶은 거 하나랑, 딸기 스무디, 그리고...민트초코라떼.”
선겨울은 부리나케 1층으로 달렸다.
***
“넷은 잠깐 집에가서 씻고 오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여기 샤워실은 간이다보니 제대로 정돈하기는 그러니까.”
“네, 네….”
“여기서 해야할 일이라고 해봐야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저기 칠판 보이죠? 스케쥴따라서 움직이니까 그거에 맞춰서 해주시면 됩니다. 저 출장나가있는 동안 사무실 이 아이랑 지켜주시면 되고요. 소개할게요, 이름은 김펜릴.”
냐아아아-
그릇에 담긴 민트초코라떼를 핥던 펜릴이 기분좋은 울음으로 울었다. 선겨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으로 펜릴의 이름을 되뇌였다.
“상당히...독특한 이름이네요.”
“그쵸? 김펜릴 음식 챙겨주는 것도 겨울 씨 일 중의 하나예요. 정해진 시간마다 1층 카페에 내려가서 받아오시면 됩니다. 후안 사장님께는 미리 말해둘게요.”
사무원 선겨울의 첫 번째 임무.
그건 딸기 성애자인 나와 민초 성애자인 펜릴에게 정기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따로 할 일은...여기 사무실에 오는 손님을 쫓아내는 겁니다.”
“쫓아낸다고요?”
“공고는 내렸어요. 이제 모집할 인원이 다 마감되었거든요. 이제부터는 제가 직접 스카우트 하려고 합니다.”
“스카우트….”
겨울의 시선이 내 하반신을 잠시 스쳤다. 펜릴은 눈치좋게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 갸르릉거리며 누웠고, 나는 그녀의 털을 간질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일정은 세 명의 배틀슈트를 맞추러 가는 겁니다. 제가 직접 데리고 갈 거니까, 겨울 양은 가온이랑 함께 사무실에서 대기해주세요. 구체적인 건 가온이가 알려줄 겁니다.”
김가온은 마트료시카에서 일하던 경험이 있다. 스튜디오를 위장한 히어로 길드의 일을 가르쳐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세 명 맞추고 나면 가온 양이랑 같이 둘의 배틀 슈트도 맞출 겁니다.”
“저, 저도요?”
“물론이죠. 서울에 촬영하러 갈수도 있는데 안전하게 움직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일정은 배틀 슈트를 맞추는 것. 그걸 위한 자금도 엄청나게 확보했다. 이제 가서 셋의 신체 사이즈만 재면 끝나는 일이다.
“궁금한 거 있나요?”
“...마, 만약에 서울을 올라가면요. 막 안쪽도 돌아다니고 하나요?”
“안쪽?”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서울...괴수의 도시를 간다는 생각에 조금 그래서.”
“후후, 아버님때문에 걱정하시는 구나. 걱정마세요. 여차하면 겨울 양은 사무실에서 대기할 수 있도록 할테니까.”
“.......”
겨울은 침묵했다.
***
잠시 뒤.
내가 간단히 우리 팀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집에 갔던 넷은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가온 양, 사무실 잘 부탁할게요."
"맡겨주세요, 사장님. 잡상인 오면 바로 쫓아낼테니까."
사무실에는 가온과 겨울, 그리고 펜릴이 남았다. 나는 셋과 함께 미리 앞에 대기시켜놓은 자율주행택시에 올랐다.
"오빠, 미쳤음?"
누리는 우리만 있는 자리에서 바로 내게 욕을 날렸다. 이미 유나에게 언질을 들은 라온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
"다크 레기온이잖아, 다크 레기온! 세계정복조직! 피의 일주일을 일으킨 주범으로 추정되는 놈들!!"
"그렇긴 하지."
전세계 괴인 조직의 정점에 있는 빌런 조직. 괴수들을 조종하며 괴인들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이 조직은 수장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일곱 명의 간부들에 의해 굴러가는 세계정복조직이다.
"근데 그 중 한 명을 설득해서 전향시켜? 김펜릴? 지금 장난함?"
"...절풍의 펜릴. 그의 손에 죽은 히어로의 수만 천 명이 넘습니다. 이게 세간에 알려지면 아무리 ...지휘관 님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 설화공주처럼 팀에 이름만 올리기로 한 녀석이니까. 덧붙여서 다크 레기온 간부로서의 일은 지금 휴업 중."
"......??"
둘은 혼란에 빠졌다. 이미 설명을 들은 유나도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직 슈트 매장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은 만큼, 나는 둘에게 내가 펜릴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설명했다.
* * *
새벽.
은유하를 보내고 난 나는 일부러 교묘히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체를 드러내라."
아무도 없는 골목에 말하는 나는 분명 미친 놈처럼 보이겠지만, 소리는 바람을 타고 흘러가기 마련.
"얻어마셨으면 얼굴 정도는 비쳐야지, 펜릴."
"...역시 들켰나."
골목에 녹색의 바람이 불었다. 내 앞에는 검은 라이더 슈트를 입은 녹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뵙겠습니다라고 하면 이상한가?"
"글쎄.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 인사 정도는 해도 상관없지."
펜릴은 아주 유유자적했다. 광검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도 펜릴 만큼은 아주 자유롭게 이곳을 드나들 수 있었다. 바람은 어디든 존재하니까.
"네가 내 주변에 있는 건 역시 나를 죽이기 위함인가?"
"그렇지. 언제까지인지는 말하지 않아. 얘기하면 분명 조치를 취할테니까."
"내가 온갖 발악을 해도 바로 죽일 거면서."
"나에 대해 은근히 잘 알고 있네. 영광이야, 지휘관."
펜릴은 요염하게 웃으며 손톱을 세웠다. 손등에 돋아난 녹색 바람의 칼날은 금방이라도 내 몸통을 두동강 내버릴 것만 같았다.
"안타까군. 아직 섹스을 해보지 못한 여자가 수두룩한데."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네가 섹스를 많이 할수록 우리가 피곤해지니까. 평화로운 세계 멸망을 위해서 죽어줘야겠어."
"지금 당장은 아니지 않나, 펜릴."
"...그렇긴 하지. 하암."
펜릴은 하품을 내뱉었다. 아주 여유가 철철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거래를 하지. 내 편이 되어라. 그러면 네게 아주 큰 도움을 주도록 하마."
"풋. 무슨 도움?"
"글쎄. 가볍게는 매일매일 민트초코를 제공하는 것?"
"......아무래도 나에 대해 어느정도 조사를 한 것 같은데 유감이야. 내가 고작 민트초코에 다크 레기온을 배반할 것 같아?"
"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닌데. 너 바보야? 세상에 고작 민트초코가지고 조직을 배신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충격. 펜릴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펜릴이 민트초코에 넘어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지금은 2025년이니까.'
임무 수행 모드로 들어간 펜릴에게는 민트초코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하루 3통의 민트초코를 포기하더하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가.
"P가 신경쓰이는 거지? 푸른 불꽃의 P."
"......네 놈."
펜릴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펜릴에게서 여유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펜릴, 아지다하카, 히드라, 카르나, 혼돈, 루살카. 그리고 베일에 가려진 일곱 번째 간부. 설마 내가 그 자의 존재를 모를 줄 알았나?"
"언제 어디서 알아낸 거지? 대답해!"
"대답해도 너는 모를 거다. 중요한 건 내가 P의 존재를 안다는 거지."
파앗. 목이 따갑다. 눈 한 번 깜짝이는 사이, 펜릴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목을 움켜쥐었다.
"대답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그대로 움켜쥐겠다."
"대답할 거야. 얘기하지 않으면 너는 나를 믿지 않을테니. 흐흐, 내가 왜 미국에서 한국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해?"
"......."
그 숱한 인프라를 두고 주인공이 헬조선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오라클이 목숨을 걸고 주인공을 한국에 보낸 이유도 단 하나.
"미국은 이미 그 자의 지배를 받고 있지. 정확히는 힘으로 대통령을 협박하는 셈이지만...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있어. 평범한 어중이떠중이 지휘관은 아니야."
"진짜로 그런 것 같네. 그치만 그럼 뭐해?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이 가버리는데."
맞는 말이다. 죽으면 다 똑같다. 하지만 그건 간부에게도 마찬가지.
"사실은 너 맞아죽기 싫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
펜릴은 침묵했다. 정곡이 찔린 것이다.
펜릴이 임무에 충실하는 이유는 단 하나. 윗사람이라고 할만한 자가 미칠듯이 쪼기 때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놀고 먹기 좋아하는 펜릴이 굳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임무에 충실한 이유는 안 하면 본인이 맞아죽기 때문이다.
"논리를 만들어주지. 네가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그냥 그...P라고 하지. P가 실소하면서 넘어갈만한 것으로."
"논리...라고?"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P와 이야기한 로그가 필요해."
"......."
펜릴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P와 관계된 내용이기에 선뜻 자신의 정보를 풀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보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너희의 대화는 모두 현지어로 하는 게 기본이지?"
"그렇지. 괜히 한국에서 영어 쓰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럼 너는 한국어로 말했다 치자. P는 뭐로 말했지?"
"영어?"
"그래. 그렇다면 P가 지정한 임무 지정 기한은 언제지?"
"......코리아 타임?"
"그래.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도를 두 개 켰다. 하나는 푸른 색의 남한, 그리고 또 하나는 붉은 색의 북한.
"한반도에는 두 개의 Korea가 있지. Republic of Korea, 그리고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한 쪽은 아직 시계가 흐르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시계가 멈춘 곳이라 이 말이다."
"......?"
펜릴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펜릴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이 무적의 논리에 해당하는 정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모르겠냐? 노스-코리아에서는 연도를 세는 기법이 달라. 북조선의 수괴가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원년으로 삼는 거지."
"......."
펜릴은 급히 자신의 마도기어를 검색했다. 그리고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이거면 1900년은 더 벌 수 있어...!"
"그래. 메시아보다 1900년 더 늦게 태어난 놈이니까."
"하, 하지만 P는 서기로 계산하라고 했는데.... 정확히 A.D.2025년 3월 1일에 너를 죽이라고...."
"흐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네가 그런 해괴한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P에게 강력하게 어필을 하는 거지. 나는 임무를 수행하기 싫다. 나는 좀 더 놀고 먹고 싶다. 나는 이 임무를 좀 더 끌어서 12월까지 한국에서 놀고 싶다."
"장난해? 내가 그런 걸 안 해 본 줄 알아?"
펜릴은 진심으로 내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던진 미끼를 덥썩 문 순간, 펜릴은 이미 나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애교를 부리는 거지. 어차피 세계는 12월 25일에 멸망하지 않나. 나야 11개월 동안 세계 지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너는 12월부터 움직여도 되는 거 아닌가?"
"...대범한 거야, 아니면 또라이인 거야?"
"어느쪽이든 중요한 건 네가 11월 말까지는 나의 팀원이 된다는 거지. 나로서도 개인적으로 실험하고 싶은 게 있거든."
턱. 나는 펜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 옆 벽을 짚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붙였지만, 펜릴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간부에게도 마력공급이 가능할까?"
".....에."
펜릴의 얼굴이 붉어졌다.
"간부도 결국에는 이능력자 아니겠나. 그러면 나와 네가 섹스를 한다면 마력도 늘어나지 않겠어? 그럼 너도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자, 잠깐만."
당황한 펜릴이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뒤는 벽으로 막혀있었다.
"뭐...이건 내 개인적인 바람이고, 이제부터가 진짜야."
나는 목소리를 깔고, 펜릴이 P를 설득할 진짜 방안을 알렸다.
"P에게 딸기 케이크 한 판을 갖다주면서 이렇게 전해. 적진 깊숙히 침투한 스파이가 되겠다고. 아직까지 놈은 나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완벽한 캐릭터를 만드는 거야. ...그래, 녹색 고양이귀 메이드 미소녀가 되면 좋겠지. 그러면서 우리 팀원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내는 거다. 누가 동료가 되었고, 누가 나와 섹스를 했는지."
"......."
"그래. 내부의 적이 되는 거다. 분명 그런 거 좋아할만한 녀석이니까. 인류 마지막 지휘관의 곁에는 히어로들이 모이게 되겠지. 그러면 그 때 일거에 우리를 소탕하면 되는 거라고 설득해. 적당히 네 힘이라면 나같은 놈이 100명을 모으든 1000명을 모으든 다 쓸어버리를 수 있지 않냐고 적당히 기 좀 세워주고."
"그, 그게 통할까?"
빙고. 효과가 있는지 묻는 다는 것 자체가 설득되었다는 증거. 나는 펜릴의 어깨를 토닥이며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내가 P에 대해서 잘 알고 있거든."
펜릴을 설득하여 우리 팀으로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
"P가 설득 안 되잖아? 그럼 바로 내 모가지를 날려도 좋다."
펜릴의 모가지에 칼을 겨누고 있는 자가 칼을 거두게 하는 것이야말로, 펜릴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