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4화 〉2부 4장 11
C급 괴인은 손쉽게 쓰러졌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괴인을 쓰러뜨린 이에게 쏠렸다.
- 신서울에서 광검이 아닌 다른 이능력자가 괴인을 쓰러뜨렸다는데?
바람처럼 오다니는 헬창괴인을 정면에서 쓰러뜨린 이능력자.
물의 검을 다루며 적의 공격을 갈라버리는 자.
싸우는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챙기는 자.
- 이게 갓 각성한 이능력자의 싸움이 맞나?
협회에 등록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과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C급 이능력자의 싸움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잘 다듬으면 전투력을 B급까지 올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소녀의 싸움은 대단했다.
- 괴인을 잡았는데 이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님?
사람들은 이름 모를 소녀를 부르는 호칭이 필요했다. 협회에서는 정식으로 등록은 되어있지만 이름은 알려줄 수 없다고 단호히 정보 개방을 거부했다.
- 그럼 우리끼리라도 이름을 정해서 부르자!
- 뭐가 좋을까?
- 기둥 커터!
소녀, 김누리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도 C급 이능력자인 소녀가 김누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매일 쭈그려지내던 왕따 소녀와는 달리, 사람을 구하고 괴인을 쓰러뜨리는 소녀의 전신에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이목이 소녀에게 끌린 가운데.
"으히힛, 으히히힛."
소녀, 김누리는 한창 커뮤니티를 돌며 자신의 활약상이 담긴 영상을 병상에 누워 구경하느라 밤을 새고 있었다.
"<야차>...."
언니인 <세이렌>과는 다른, 한국 히어로들이 주로 받는 두 글자 이명. 사람들이 직접 지어준 이명에 김누리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장님, 나 이 이명 써도 됨?"
나의 눈치를.
"뭐 어때? 사람들이 지어준 건데."
"그래도 뭐 그런 거 있지 않음? 지휘관은 자기 팀원들 이명은 직접 지어줘야 한다고 하던데."
"그런거 다 신경쓰면 제 명에 못살아. 야차면 준수하네. 혹시나 이상한 거 걸릴까봐 조마조마했거든."
야밤의 스트라이커라고 <야스>라거나,
쥬지를 피떡내서 터뜨린다고 하여 <쥬피터>라거나,
알을 깨부수는 자라고 하여 <란파>라거나.
"대중들이 말이야, 온갖 이명을 붙이잖아. 특히 첫 이명은 장난식으로 짓고 말이야."
"그거 다 첫 이름 빨리 떼라는 의미 아님?"
"그게 갖다붙이기 나름이지 실상은 뉴비 괴롭히는 거잖아. 야차면 나름 준수한 이름이야."
누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명 중 <야차>는 그 중에서도 무난한 이명이었다. 인도에 S급 히어로 였던 자와 동명이기도 하지만, 그 자는 어차피 이제 행방불명이 되었기에 야차의 이명을 쓰는 자는 없다.
"축하해. 이명단 거. 앞으로도 코드 네임은 야차라고 부를게."
"으으...나만 먼저 받는 것 같아서 느낌이 이상한데."
"어차피 나중에는 다 코드네임으로 부르게 될 건데 뭘."
마법소녀와 야차라는 이미지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언젠가는 <야황>이라고 불리우게 될 여인이다. 누리의 속에 잠재되어있는 사납고 흉폭한 기질을 사람들은 은연중에 눈치챈 것이리라.
"사장님, 그럼 나 이제 스타 되는 거임?"
"그래. 간판 스타지. 활동은 계속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지만."
"얼굴 팔린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거 되게 부끄럽네."
"걱정마. 각도 잘 안 찍혔어."
괴인의 공격에 의해 모자와 마스크가 벗겨진 순간, 전투의 여파로 인한 바람으로 누리의 머리칼이 이목구비를 가렸다.
워낙 전투가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다보니, 마도기어의 카메라는 좀처럼 누리의 얼굴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어, 혹시?' 하면서 의심은 하겠지만, 다들 누리가 야차인지 잘 모를 걸? 협회에서 기레기들한테 정보 일절 안 주고 있거든."
인재가 귀한 이 나라에서 C급 이능력자라도 알아내어 연줄을 만들거나 영입하려는 자들은 차고 넘친다.
"되게 무섭네, 사장님. 우리 엄빠 처음에 각성했을 때 돈 떼먹고 도망간 친척도 연락온다고 하던데."
"복권 1등 당첨되는 거랑 비슷한 거야. 알리려고 안 해도 다들 알게 되는 거지."
복권 1등보다도 더 가치있는 이능력자 각성은 더하다.
"그래도 누리야, 내가 있으니까 네 마도기어 지금 잠잠한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 고딩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 전화오고 난리났을 걸?"
"그러게.... 새삼무섭네. 사장님 뒤에서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임?"
"어른의 세계에서 뒷공작을 하고 있지. 푸흐흐."
평소같았으면 은근히 뒷돈을 받거나 향응을 제공받아 정보를 알려줬을 협회에서도 누리에 관한 정보는 일절 제공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금 입이 가볍다고 할 수 있는 누리의 부모도 누리에 대한 정보 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사장님. 나 이번에 괴인 상대하면서 느낀 거 있음."
"뭔데?"
"괴인 말이야, 사장님이 조종한 거 아님? 아무리 나타날 걸 예상했다고 해도, 미쳐날뛰는 것 치고는 제법 정교하게 움직이던데."
역시 야황. 빌런에 관한 건 정말 기깔나게 잘 파악한다.
'괴인이 나타날 거라고만 말했지, 내가 괴인을 만들어 조종하도록 지시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저기 창틀에 누워 달빛을 쬐고 있는 작은 고양이가 헬창 괴인을 조종했다는 것을. 그러나 누리는 괴인을 직접 상대해봤기에 아는 것이다.
괴인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괴인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누리야. 네 말에는 큰 어폐가 있어."
"뭔데?"
"내가 남자 괴인을 뭐하러 조종하겠어?"
"......그건 인정."
누리는 완전히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의심은 거두어들였다. 나의 지시대로 움직인 것과 괴인의 움직임이 너무 딱딱 들어맞는 바람에, 누리는 잘 짜여진 각본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일단 오늘은 쉬어. 가온이가 곧 부모님 모시고 오실 거니까, 그때까지 너무 마도기어로 영상 보지말고 누워있고."
"......사장님, 나 이미 들었음."
누리는 내 소매를 잡고 슬쩍 웃었다.
"여수 호텔에서 정말 잠만 자고 왔음?"
"......."
"아닐텐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누리는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이불을 들어올렸다.
"언니랑 엄빠 오려면 한 시간은 남아있는데, 나 오늘 좀 잘 하지 않았음? 칭찬 도장 찍어줘야 하는 거 아님?"
"......."
먀아아.
고양이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던 병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누리의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걸려도 나는 모른다?"
* * *
강약약강.
슬프게도 이 말은 가온과 누리의 부모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했을 때, 가온 스스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말이었다.
"아시겠습니까, 두 분. 누리 양에 관한 정보는 일체 외부에 빠져나가서는 안 됩니다. 국가기밀에 준하는 것으로...."
협회에서 나온 B급 히어로는 누리가 머물고 있는 병실 앞에서 부모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가온은 부모가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굽신거리는 걸 보며 조금 많이 씁쓸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참 뭔지.'
권력에 굴종하는 것이 신서울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온의 부모는 협회에 순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서는...."
"그만하세요, 이제."
"알겠습니다, <세이렌> 님."
너무 과하다 싶은 요원의 지시에 가온이 한 마디를 하자, 요원은 바로 자세를 바꾸며 가온에게 허리를 숙였다.
"...크흠."
가온의 부모는 어색하고 복잡한 시선으로 딸인 가온을 쳐다봤다. 가온의 부모로서 22년 동안 윗사람으로 살아왔으나, 자신이 굽신거리던 대상이 딸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에 몹시 어색해했다.
"드, 들어갑시다."
그렇다고 딸의 위세를 빌어 고개를 빳빳히 세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가온이 자신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 외국으로 갔다는 걸 알기에, 두 부부는 긴장한 얼굴로 누리가 있는 병실 문을 열었다.
"아, 엄빠왔음?"
"누리야?!"
병실에 누워있던 누리는 온몸이 땀에 절어있었다. 이불을 꽁꽁 뒤집어 쓴 누리는 어색한 미소로 가족을 맞이했다.
"조, 조금 일찍왔네."
"아이고, 괜찮냐?! 다친 곳은?!"
"다치기는. 멀쩡하다 못해 쌩쌩함. 자, 잠깐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거지."
"땀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나는 거야?! 혹시 설마-"
촤라라락!
누리의 어머니가 이불을 걷어내려고 하기 전, 거대한 물방울이 누리의 이불을 짓눌렀다. 창백해진 표정의 누리는 자신의 몸을 덮는 물의 이불에 살짝 안도했다.
"그냥 몸 좀 식히면 되는 일이에요. 그거 호들갑이에요."
"그, 그러니? 난 또...."
"...크흠, 무사하면 됐다."
부모는 누리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온은 쌔한 기운에 병실 한 켠, 특별실마다 설치되어있는 '패닉 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패닉룸의 문 틈에 김누리의 환자복 바지가 살짝 삐져나와있었다.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는데 흐트러진 바지는 구석에 처박혀있다?
"세상에."
가온은 누리의 이불 속의 모습을 생각하며 경악했다. 누리는 부모의 설교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 이거 해제하면 죽는다!
"......."
킁킁. 가온은 병실안에 남은 달콤한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문이 열려있는 이유는 더워서 그런게 아니라, 환기를 위함임을 직감했다.
"저기요."
"말씀 편히 하십시오, 세이렌 님. 제 선배님 아니십니까."
"...그럼 좀."
속닥속닥. 가온은 요원에게 에둘러 말을 전달했고, 요원은 헛기침을 하며 부모를 불렀다.
"죄송하지만 면회시간은 5분 정도입니다. 잠시 뒤면 그분들이 오실 예정이라, 죄송하지만 부모님께서도 자리를 비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분들이 누군데요?"
"아니, 그래도 딸이 지금 쓰러졌는데...."
"제가 옆에서 같이 있을게요. 저는 괜찮죠?"
"예. A급이신 세이렌님이시라면."
요원의 퇴거 명령에 부부는 궁시렁거리면서도 누리를 꼭 끌어안았다. 누리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부모를 보냈다.
끼이익, 쿵.
"푸하아---."
문이 닫히자, 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온은 곧장 물의 이불을 해제하고 하반신을 덮은 이불을 걷어냈다.
"세상에."
"벼, 변태야!"
"이 꼴을 해놓고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바지랑 빤스도 벗고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다니...."
가온은 한쪽 구석에 던져진 바지와 속옷을 누리에게 집어던졌다. 누리는 무안한 미소로 옷을 챙겨입었다.
"그래서 좋았니?"
"......언니."
누리는 가온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당근빳따지, 씨바."
"하아, 부모님 아시면 난리가 나겠네."
"왜? 자매가 한 남자한테 덮밥 되버려서?"
"......."
가온은 부정하지 못했다.
* * *
"후아아, 고맙다. 김펜릴아. 하마터면 걸릴 뻔 했네."
펜릴의 결계에 숨어 병실을 빠져나온 나는 간신히 복도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닦지도 못하고 그냥 싸고 숨어버렸네. 미안하게."
"1분만 더 늦었어도 걸렸다냥."
"안 걸렸으니까 됐잖아."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누리와 열락을 즐기고 난 다음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누리의 부모가 들이닥쳤고, 나는 펜릴의 도움을 받아 몰래 숨을 수 있었다.
"가온이 센스도 좋았어."
"안 덮었으면 바지 안 입었던 거 분명 들켰다냥."
"하하하, 들켰으면 조졌지. 근데 안 걸렸으니 됐잖아."
나는 펜릴을 어깨에 올린 채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이제 남은 건 딱 하나 뿐.
"A급 이능력자만 대련으로 이기면 되겠...응?"
저 멀리,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펜릴과 함께 숨을 죽였다.
"......."
구릿빛 피부에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화마인.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만났다, <아그니> 정슈리.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그녀는 주변을 살핀 뒤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자판기 안쪽으로 밀쳤다.
"야, 씨발놈아."
다짜고짜 욕부터 받는 슈리는 나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네가 우리 유나 임신시킨 개새끼냐?"
"......저기요, 뭔가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이 개새끼! 순진한 유나를 홀려서 먹고 버리려는 거지! 말 해! 현지에서는 질펀하게 즐겨놓고, 미국으로 튀려고 하는 거잖아!"
"분명히 말하는데, 반대입니다."
내 말에 슈리의 눈에 의아함이 비쳤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유나한테 당한 건 저, 저라고요...!"
"......에?"
"그...."
뚝. 내 멱살을 쥔 슈리의 손에 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울컥한 마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코, 콘돔은 꼭 껴야한다고 했는데...!"
"아...?"
선즙필승.
"저 무능력자라고, 강제로 힘으로...흑!"
유나가 먼저 나를 가지고 사기를 쳤으니, 나도 유나로 사기를 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