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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85화 (685/1,497)

〈 685화 〉2부 4장 12

<3주 전, 히어로 아카데미 기숙사>.

"방을 뺀다고? 야, 거짓말 하지마."

슈리는 유나가 사온 크림파이를 집어먹으며 실실 웃었다.

"뭐 룸메 바꾸려고 하는 거야? 어머, 우리 유나는 내가 싫어진 건가?"

"방 바꾼다는 게 아니라, 나 진짜 방 뺄 거야. 농담 아니야. 기숙사 나갈 거라고. 아니, 학교를 나갈 거야."

"개소리. 그러니까 네가 왜 방을 빼냐고."

유나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지만, 슈리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방을 빼? 학생처 새끼들, 퇴학같은 거 시킬 것 같아? 꼴에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없는 학교라고 광고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딴 규정, 자기들이 다 알아서 바꿀 거라고."

슈리는 아카데미 측에서 보내온 편지를 들어올렸다. 작년 12월에 작성된 유나에 대한 자퇴 권고서로, 유나가 큰 충격을 받아 여행으로 정신을 가다듬게 만든 계기가 된 편지였다.

"이거, 다 지랄이야. 지랄."

찌지직.

슈리는 편지를 세로로 길게 찢어버렸다. 원본은 추후의 고소전에서 증거 자료랍시고 고이 모셔뒀지만, 복사기를 통해 복사한 사본만 벌써 수 십통 넘게 갈기갈기 찢어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지들이 진짜로 퇴학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못 해."

"슈리야."

"만약에 규정이 그렇고 어쩌고 지랄하면 애초에 받지를 말았어야지. 이능력자 최초 각성 이후에 마력 늘어나는 케이스, 100명 중에 한 두 명 있을까 말까 한 거 아니야. 지금까지 먹은 영약들, 앞으로 1년만 더 버티면 졸업과 동시에 폭발해서 B급도 충분히-"

"나 자퇴할 거야."

슈리는 포크를 움켜쥐고 크림파이를 푹 찔렀다. 유나는 슈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슈리는 당장이라도 유나의 침대 옆에 있는 크림색 캐리어를 폭파시켜버리고 싶었다.

"너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응, 이미 서류 내고 왔어."

겉으로는 슈리가 막무가내처럼 보이기는 해도, 유나의 쇠고집은 슈리도 막을 수 없었다. 한 번 정한 이상 유나의 선택은 슈리가 꺾을 수 없었다.

"좋아, 좋아. 유나야, 쓰레기들 때문에 그래? 너보고 뭐라고 하는 애들 때문에 상처입지마. 그 새끼들은 앰생인생이라서 그런 거고, 다 너한테 질투하는 거라니까? 그 새끼들이 지랄하는 거, 다 상갓집 개가 짖어대는 거라고 생각하라니까?"

"그건 이제 상관없어. 내가 자퇴하는 건 남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그런게 아니라, 히어로 아카데미에 내가 바라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야."

"U튜브에 보니까, 퇴사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레파토리 중 그게 있더라. 비전이 없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갈 것이다. 근데 유나야, 하아...."

슈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그 뭐시냐, 꼰대가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이상한 거 아니지?"

"아니야. 성공이 보장된 히어로 아카데미를 자퇴하는 건 인생 쫑낸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안되겠다. 내가 너희 부모님이랑 이야기를 한 번 해봐야겠어."

"이미 집에 얘기하고 왔어. 제일 먼저 부모님께 말씀드렸는 걸."

슈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외국인은 자신인데 왜 순수 한국인인 유나에게 이 지옥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방학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집이 없는 관계로 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는 슈리와는 달리, 유나는 방학 동안 집에 있었기에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만날 시간이 있어도 유나가 바빠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방학.

고작 1월-2월 사이에 유나는 사람이 달라져있었다. 유나가 바뀐 계기라고 한다면 단 하나, 오라클 스튜디오에서의 아르바이트였다.

"너, 진짜 길드에 취직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응. 실은 진작에 정직원으로 채용됐어. 단지 아카데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랬을 뿐."

"나는 진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하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대한민국 10대 계열사에서 모셔가지 못해 안달이 나는 고급 인재가 될 수 있다.

유나의 집이 그다지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는 중산층이라고 해도, 이유나라는 존재가치만으로도 사자돌림 들어가는 이들로 마라톤 경기장 트랙에 줄을 세울 수 있다. 이능력자인 신부는 존재만으로도, E급이어도 미모와 몸매가 보장되는 존재이므로.

"유나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너 혹시 그거 기억나? 유성 그룹 계열사 사장 중에 한 명, 조강지처한테 위자료 왕창 물어주고 D급 이능력자 부인 새로 들였던 거."

"알지. 몸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되라는 건 아니지만, 네 가치가 최소 그런 수준이라는 거야. 왜 너같은 애가...하아. 아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이유나가 한 번 정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끝."

수능 전국 2등이였던 자가 영웅의 길을 걷기 위해 E급 재능에도 불구하고 히어로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부모조차도 꺾을 수 없는 자의 고집을 아무리 절친이라고 한들 꺾을 수 있을까.

"알았어. 응원할게."

"고마워."

"대신 나도 같이 해."

"...응?"

슈리의 말에 유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슈리는 유나의 두 손을 꼭잡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유나 가는 곳에 정슈리 가야지. 어차피 유나 없는 학교 다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외국계 회사라고했지? 잘 됐다. 아예 성공해서 아버님 어머님도 같이 해외로 이민가버리자. 내가 도울게."

"......그건 안 돼."

슈리는 큰 맘을 먹고 유나를 옆에서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정작 유나가 거절하는 것에 상처를 입었다.

"왜? 왜 안 되는 건데? 내가 안되는 이유가 뭐야?"

"너는 아카데미에서 우등생이잖아."

"너 스스로도 지금 네가 말하는 거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지? 실기만 지금 거의 안되고 있지, 이론은 네가 항상 1등이잖아. 너도 우등생이야. 너랑 나랑 다르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

유나는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슈리는 유나의 앞으로 달려가 얼굴을 붙잡아 시선을 맞춘 뒤, 추궁을 이어나갔다.

"마력의 한계는 있지만 이론 하나만큼은 아카데미 교수들 뺨치는 수준으로 똑똑한 사람이 너야. 졸업하고 아카데미 조교로 간다고 해도 연봉 2억은 넘게 벌거라고. 그것뿐만이겠어? 학계에서 너 지금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는 너도 알잖아."

"그건...."

"그런 네가 현장에서 구르는 일이 더 많은, 괴수랑 당장 맞딱뜨리는 길드에 들어가는데 왜 내가 옆에서 도우면 안 된다는 거야? 유나야, 나 진짜 네가 원하면 나도 때려치고-"

"...슈리야. 실은."

슈리의 간곡한 추궁에, 유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 방학 때 알바하다가 만난 남자랑 실수로 그만...."

"......왓?"

유나가 던진 폭탄에, 슈리는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번 달, 생리 안 왔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던가. 유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마도기어의 사진을 하나 꺼내들었다.

"힉."

그곳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갈색 단발의 여인이, 우람하고 두꺼운 막대기를 입에 살포시 문 채 손가락 두 개로 눈을 가리듯 V자를 그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체로, 그리도 소중히 아끼는 머리칼에 하얗고 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된 채.

"그, 오, 오빠랑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슈리는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 * *

정슈리.

그녀는 현재 시안.w.히비스커스, 백청화라는 남자를 따로 창고로 데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간신히 숨을 골라쉬었고, 슈리는 문을 잠그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눈을 감았다.

"......이봐요. 내가 울리려고 한 건 아니에요."

"알아요. 아는데, 흐끅."

살면서 남자를 울려본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이런 경우는 아니었다. 슈리는 눈가가 붉어진 백청화의 모습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쪽 성생활에 간섭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는데,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유나는 제 동기이자 절친이에요."

"알아요. 화마인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유나가 왠 금발양...인이랑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애가 갑자기 자퇴를 한대요. 그리고 성공이 보장된 아카데미는 때려치고 길드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세상에, 애를 가졌대. 솔직히 얘기해봐요. 이거 맞아요, 아니에요?"

"......맞습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진정한 듯한 청화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맞아요?"

"예."

"...유나 임신시킨 거 맞다고요?!"

"......그, 그거 순서가...흐끅."

청화는 잔뜩 겁을 먹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유리창에 비친 둘의 모습은 누가봐도 이능력자가 힘으로 민간인을 겁박하는 빌런의 모습이었다. 슈리는 순간 상대가 그냥 돈 많은 무능력자라는 걸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니까 정리해봅시다. 유나랑 좋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고, 콘돔끼고 엔조이하다가 유나가 노콘섹스로 덮쳤다?"

"저, 적나라하지만 그게 팩트입니다...."

"왜 저항 안했어요!"

"저항을 어떻게 해요! 마력으로 찍어누르는데!"

맞는 말에 슈리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당장 지하쇼핑센터에서 있었던 일만 하더라도, 마력의 힘만 있다면 140cm 소녀가 3m 넘는 괴인을 때려잡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이미 세상은 남자가 여자를 강간한다는 프레임을 초월하여, 이능력자가 비능력자를 억압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저는 콘돔을...쓰자고 말했는데...!"

"어, 음. ...."

슈리는 마냥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유나와 같지만 유나보다 어려서부터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기에, 비록 처녀의 몸이라고 한들 콘돔을 쓰고 안 쓰고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황은 한 가지 뿐이었다. 슈리는 바로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슈리야? 무슨 일이야?]

"야, 이유나. 내 앞에 지금 백청화 씨 있거든?"

[.......]

유나는 침묵했다. 슈리는 입술을 깨물며, 제발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임신공격했니?"

[슈리야, 어, 음, 내가 아는 친한 동생이 한 말인데....]

유나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솔직히 임신하고 싶은 사람이다, 인정?]

"......."

슈리는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유나가 뭐라 뒤이어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슈리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생각에 잠겼다.

"흐, 흐끅."

백청화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헐떡이고 있었다.

"......."

짝!

슈리는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때렸다.

"뭐, 뭐하는 겁니까?!"

"이렇게 안 하면 정신 못 차릴 것 같아서."

슈리는 청화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이, 일단 알겠어요. 제가 큰 오해를 했네요. 그럼-"

"자, 잠시만요!!"

청화는 황급히 슈리의 손목을 잡았다. 마력 하나 없어 여자에게 강제로 노콘을 해버린 무능력자였으나, 슈리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남자의 행동에 기이하게 저항하지 못했다.

"부,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오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순진한 유나 꼬드긴 건 마찬가지거든요? 이거 놔요. 사람 부르기 전에."

"저희 팀원이 되어주십시오!"

"팀원?"

청화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슈리에게 전했다. 분홍색에 금박이 박힌 명함에는 '오라클 스튜디오'라는 문구가 떡하니 박혀있었다.

"오라클...."

"이번 실습, 저희 길드에서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생각은 해보겠는데...조건이 있어요."

슈리는 청화의 손을 떼어놓은 뒤, 자신을 가리켰다.

"저를 이길 수 있다면."

청화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슈리는 왠지 모를 수렁에 빠지는 기분에 오한이 들었다.

* * *

잠시 뒤.

나는 가온으로부터 건네받은 눈물방울을 전부 닦아낸 뒤,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나야. 미안."

[사장님 나빠요.]

나는 유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정확히는 슈리가 확인 전화를 할 경우, 유나가 내게 저지른 짓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기로 약속했다.

"근데 유나야,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 않니? 우리 사이에 그런 건 필요 없잖아. 후후."

[콘돔 필요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리셨으면서.]

"그래서 쓸래?"

[사장님 거짓말에 입 맞춰준 대가가 콘돔이에요? 너무해요.]

유나의 울상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유나가 아무리 슈리를 내 마수에서 빼내려 한들, 히로인으로 태어난 이상 운명은 정해져있다.

"유나야, 거기 애들 있지? 잘 들어. 우리 A급 상대 정해졌다."

[왠지 처음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꼭 그런 건 아니지. 쉬운 길이 있는데 누가 어렵게 만들었잖아."

유나로 인한 스노우볼이 구르는 덕분에, 우리의 미션 3는 조건이 바뀌어버렸다.

"A급 이능력자, <화마인>을 이기는 것."

정슈리를 상대로 1:1로 이기는 것이야말로, 그녀를 침대로 들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어, 하랑아. 난데."

자고로 화속성 카운터는 수속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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