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703화 (703/1,497)

〈 703화 〉Bed Ending # 000 (H) 01

<리스타트>.

* * *

<2002년 여름>.

그대---나의 챔피언.

광장에 함성이 울려퍼진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상처를 잊으려는듯, 또는 기억하려는듯 열광적인 함성을 내뱉었다.

"사람들 참 대단해요. 불과 2년 반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모였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호텔, 나는 유리창을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수 사태가 1년만에 안정되었다 싶더니 바로 월드컵을 진행해버리는군. 이야, 대단해. 옆 나라에서는 포기하는 바람에 경기장도 미어터지게 생겼는데."

"경기장이 부족하면 이능력자 인부를 동원해서 경기장을 만들고 월드컵 기간을 두 배로 늘리면 되는 거 아닐까요?"

"그걸 실제로 실현해버리니까 더 무서운 거지."

원래부터 월드컵이라는 것은 세계인의 축제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이 무려 두 달인 것은 너무 긴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든 한국인의 의지와 힘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 뭐? 월드컵이 취소될 위기라고? S급들 싹다 동원해! 콜로세움 경기장을 만들든 얼음 경기장을 만들든 경기장을 만들란 말이야!

- 뭐? 비행기로 와야하는데 비행 괴수가 걱정돼? S급 보내! 독일에 관광 좀 다녀오고 돌아오는 길에 같이 비행기 타고 오라고 하란 말이야?

- 뭐? 옆나라에서 무력시위를 벌여? SS급 보내! 마력시위다!

"이야, 세상에 S급이 가득해."

"그걸 만든 사람이 당신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나는 책상 위 보석함 안에 놓인 여섯 개의 구슬을 들어올렸다. 붉은색을 제외한 모든 속성의 구슬은 저마다 빛이 되어 잠들어있었고, 나는 구슬 중 우리가 가장 힘겹게 상대했던 존재를 떠올렸다.

"광검 말이야, 좋은 곳으로 갔겠지?"

"물론이죠. 루살카의 곁으로 갔을 거예요. 나라는 광검 말고 다른 101명의 S급이 해결해줄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게. 이 나라 S급 한 번 참 많다."

"그쵸. 누가 지나가다가 착해보이는 호구 전부 S급으로 마력을 집어넣는 바람에."

유구무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나는 여섯개의 코어를 이용해 수, 풍, 지, 광, 암, 환 속성의 S급들을 양산했다. 전세계에 있는 S급의 수를 다 더해도 이 나라에 있는 S급보다 더 적을 정도였다.

2000년.

나는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활동을 개시했다. 언제나처럼 20년의 기간을 설득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순순히 나를 받아들이고 밖으로 이끌어줬다.

- 원작이 1년만에 모두 끝났다고요? 그럼 1년만에 싹다 정리하고 오면 되겠네요. 당신이랑 나, 둘이서 더블 피닉스로.

- 뭐...라고....

나와 그녀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괴수들을 태워죽였다. 간부라고 예외는 없었고, 나와 창염-그녀는 청화라는 이름 대신 창염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는 모든 간부들의 육신을 태워죽이고 코어로 만들었다.

"신경쓰여요? 애들 전부 코어로 만든게."

"딱히. 시간을 들여 오염만 정화하면 언젠가는 돌아올테니."

잘하면 간부와 정령, 둘의 인격이 공존할 수도 있다. 나는 보석함을 닫아 봉인한 다음, 침대 위에 누웠다. 창염은 내 옆에 누워 리모컨의 전원을 눌렀다.

- 경기, 시작합니다!

월드컵의 개막전을 알리는 축포가 울렸다. 녹색의 필드에 모인 22명의 외국인 축구선수들은 휘슬이 울렸음에도 하늘에서 쾅쾅 터지는 불꽃에 순간 넋을 잃었다.

"훌리건이 따로 없네요."

"저러라고 SS급으로 만들어준 게 아닌데."

[수직상승로켓권!]

하얀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승천한다. SS급 화속성 히어로, <백염신권> 김철수의 궁극기가 2002년 월드컵의 시작을 알렸고, 심판은 아무도 듣지 못한 휘슬을 한 번 더 불어서 경기를 다시 재개했다.

와아아아아----!!

세상을 뒤덮은 '푸른 악마'들은 깃발을 펄럭이며 세계인의 축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깃발을 장식한 푸른 불사조는 하늘을 향해 두 날개를 45도 각도로 펼치며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창염은 카메라에 잡힌 깃발을 보고 킥킥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창,염,개,진."

"으어, 젠장. 소름돋으니까 하지마라."

"푸흐흐, 미래에는 이걸 ASMR이라고 한다죠?"

창염은 나른한 목소리로 채널을 돌렸다. 여느 방송국 하나 빠질 것 없이 월드컵을 중계하고 있었고, 심지어 외국 채널마저도 월드컵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인류가 평화를 되찾고 난 뒤에 처음 열리는 세계인의 축제였으니까. 비록 과학계에서는 행성으로 생각하던 태양계 말석이 흔적도 없이 소멸한 것에 오열했지만, 60억 지구인이 나름의 평화를 되찾았으니 인류 전체에게는 더 큰 행운이었다.

성주, 소멸.

다크 레기온의 여섯 간부, 전원 사망.

비록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인 '테라와의 차원문'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령의 코어를 이용해 마구잡이로 이능력자를 양산하며 차원문에 관한 문제도 어느정도는 해결되었다.

S101, SS7.

이상한 암호같은 이 숫자가 바로 현재 이 나라의 S급 이능력자와 SS급 이능력자의 수를 알리는 수치였고, 그게 당연히 취소가 예상되었던 월드컵을 이끌어나가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 경기장이 부족해? 독도 옆에 월드컵 전용 섬을 하나 만들었다.

"지속성 SS급 아저씨가 애국축빠였던게 이 나라에는 참 호재였네요. 죽은 히드라도 분명 기뻐할 거예요."

"코어 속에 아직 남아있잖아. 안 죽었는데 무슨."

"후후, 제가 죽었다면 죽은 거예요. 아, 아직 한 명 덜 죽였는데."

창염은 슬그머니 내 위로 올라왔다.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녀는 기승위로 내 자지 위에 걸터앉으며 요염히 웃었다.

"당신 기억속의 전 여친, 미래의 창염을 죽이겠어요."

"...TV 가리는데."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죠."

찌걱. 창염은 나의 피닉스를 냅다 자신의 속으로 넣고, 내 몸에 상체를 붙이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한 손을 허리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엉덩이에 올리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경기 안 볼 거야?"

"저는 당신 보는 게 더 좋은데요."

"......."

같은 존재라고 한들 서로 다른 시간선에 있는 두 명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

"...나도 실은 너랑 섹스하는 게 더 좋아."

"푸흐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창염은 내 입술에 짧게 입술을 붙이고, 천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전 여친은 이런 거 안 해줬죠?"

"아니, 그게 너였다니까-"

"솔직히 꼴리잖아요. 그쵸? 아까보다 자지가 더 딱딱해지는데요?"

"......."

나는 침묵했다.

2002년 5월 31일.

인류가 되찾은 평화를 알리는 월드컵 첫 개막전은 푸른 불꽃으로 뒤덮였다.

* * *

<2002년 6월 3일.>

"어, 음, 익스큐즈미, 썰...."

"저 한국말 할 수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제가 영어를 못해서."

호텔리어가 영어를 못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앞에 나선 청년은 호텔리어가 본직이 아니니까.

그의 명패에는 '자원봉사자'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무슨 일 하다가 자원봉사 오셨어요?"

"날백수였습니다. 그러다가 파랑새의 은총을 받고 C급이 되어 히어로가 됐습니다. 지금은 이 호텔에 방문하시는 여러 S급 손님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영광입니다."

"아, 예...."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 몹시 부담스럽다. 아마추어 축구 유망주가 월드컵 국가대표를 선망하는 것처럼, 그는 S급 전용 호텔 투숙객인 내게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 S급 아닌데.'

만약 내가 그를 이능력자로 만든 축복을 내려준 걸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할까, 아니면 괴물이라고 공포에 빠질까.

"그런데 손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주문한 거 직접 가지러 왔는데요. 백청화라는 이름으로 주문했습니다."

"백청화...아! 스트로베리 크림파이 주문하신 고객님이시군요! 딸기만 한가득 주문하셨던! 죄송합니다, 외국분이셔서...."

"제가 괜히 오해를 하게 만들었네요."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나의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금발벽안-원작 주인공이자 지휘관 시안.W.히비스커스의 모습이었다.

...나는 인간형을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휘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모습은 불가능했다.

SSS급의 인간으로 떨어져나온 대신, 창염이 간부로서의 피닉스를 가지게 되었다. 내 몸속에 잠재되어있던 핵폭탄은 그녀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만약 창염이 피닉스에게 오염되고 만다면-

"여기있습니다."

청년은 내게 잘 포장된 크림파이를 건넸다. 가운데 반으로 잘려진 딸기가 한가득 쌓여있고, 크림 색깔도 연분홍빛을 띄는게 참 그녀가 좋아할 것 같은 빛깔이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아 참, 몇 시간 뒤에 우리 나라의 경기가 있습니다. 시간 되시면 꼭 봐주십시오. 16강 안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내기 걸었으면 4강까지 거세요."

"네? 하하, 농담도 참."

나는 청년에게서 파이가 든 상자를 받아 엘레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에 모인 사람들은 넓은 스크린 앞에 모여 푸른 유니폼의 선수들을 향해 환호성과 욕설을 뿜어내고 있었다.

"씨발, 내가 뛰어도 저거보다는 잘 하겠다!!"

'아무렴 S급이 축구 뛰면 당연하겠지.'

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홧병이 난 중년 남자를 지나쳐 엘레베이터를 탔다. 내가 타기 무섭게 일곱 명의 남녀가 엘레베이터를 탔다.

"다 아는 얼굴인데."

"당연하지요. 이 나라 SS급 7명이 다 모였는데."

아는 얼굴 중 확실히 아는 얼굴, 백염신권 김철수가 나를 정면으로 내려다봤다. 나름 키가 큰데도 2m에 이르는 화권의 키는 높기는 엄청 높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BB."

"용건만 말 해."

"언제 그녀를 죽이실 겁니까?"

"꺼져. 죽일 생각 없으니까. 용건 다 말했으면 사라져."

나를 둘러싼 여섯 남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자신들을 SS급으로 만들어준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나를 협박하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사람들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BB."

"간부는 단 한 명 남았어요. 그녀가 만약 폭주한다면...."

"절대 폭주할 일은 없다. 안심해라."

이 세상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크 레기온의 흔적이 있다. SS급 히어로들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 남아있다는 것에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핵폭탄과 함께 지구를 멸망시키면 멸망시켰지 창염을 제거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가서 축구나 보러가. 스포일러 하기 전에."

"어차피 질 경기입니다."

"이기면 어쩔래?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들 열받게 하지말고. 4강까지 올라가면 우리 가만히 냅둬라."

"하,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띵동.

엘레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철수는 소태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고, 나는 크림파이를 챙겨 내 방으로 향했다.

"나 왔다."

"죽여, 죽여버릴 거야!!"

흠칫.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들린 비명에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다행히 바로 결계를 친 덕분에 밖으로 소리는 흘러나가지 않았고, 나는 문고리를 걸고 급히 안으로 달렸다.

"창염!!"

"아, 오셨어요?"

"......둘?"

침대위의 광경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침대에는 푸른 불꽃의 사슬로 사지가 묶인 창염이 있었고, 그 위에 알몸 69 자세로 올라타 보지를 핥고 있는 창염이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척 보면 몰라요? 얘 눈 봐봐요."

창염은 하반신을 옆으로 놓으며 아래에 깔린 창염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마도 죽여버릴 거라고 비명을 질렀던 창염에게는 검은 바이저가 씌워져 있었다. 괴인 모드를 연상케하는 각진 바이저 마스크가.

"...설마."

나는 아래에 깔린 창염의 바이저 마스크를 벗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청명한 푸른색과 다른 탁한 보라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간부 피닉스?"

"네. 축구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반으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곧장 제압해서 보비려고 했는데...."

창염은 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하실래요? 반띵하실?"

"...기적."

끼요오오오오옷.

하반신에 박힌 나의 피닉스가 하늘을 향해 부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창염, 결계 확실하게 쳐."

"다 태워버릴 거야, 이 개씨발변태새끼들아아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지르는 피닉스의 아래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서 키스하자."

".......푸흐흐."

할짝.

나와 창염은 피닉스의 클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설육을 섞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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