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1화 〉2부 5장 05
펜릴은 나의 지시대로 영국 상공에 날아다니는 비행 괴수들을 사냥하여 코어를 모았다.
허공을 뛰어다니며 직접 괴수들의 심장에 손을 찔러넣어 코어를 긁어모았다.
그 수가 무려 열일곱.
펜릴은 C급 이하 코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빅벤 위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괴수가 C급 이하가 있을 리도 없는데다가, 펜릴은 일부러 예쁜 B급 코어만 모아서 가져왔다.
"어서 칭찬하라냥."
"역시 펜릴이야."
나는 고개를 내미는 그녀의 턱 아래를가볍게 쓰다듬었다.
펜릴은 갸르릉거리며 내 손길을 즐겼고, 나는 펜릴이 가져온 코어를 한 자리에 모았다.
"펜릴, 이거 가지고 내가 뭘 할 것 같아?"
"코어 냄새를 사방에 풍겨서 괴수들을 끌어들이기?"
"내가 생각했던 2안이야."
빅벤 상공에 B급 코어가 17개나 존재한다. 냄새만 멀리 퍼져나가면 런던 뿐만 아니라 프랑스, 아니 그린란드에 사는 A급도 날아와서 런던을 습격할 것이다.
지금은 펜릴이 코어의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바람으로 감싸고 있지만, 반대로 순풍을 달면 유럽 전역으로 퍼뜨릴 수도 있다.
펜릴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고작 B급 코어 17개로 런던행 웨이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차선책'이며,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최선책은 아니다.
"지휘관이 런던에 등장했지. 그러면 누군가는 맨체스터 게이트고 나발이고 습격하게 되어있단 말이야?"
"그렇지."
"그러면 제일 강한 사람이 나를 습격해야하지 않겠어?"
나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담긴 통을 스푼으로 계속 저었다. 아이스크림은 녹아 민트빛깔로 끈적한 액체가 되었다.
주루룩.
나는 그걸 코어의 위에 끼얹었다. 펜릴은 귀와 꼬리를 쭈뼛 세우며 놀랐지만, 민트초코를 붓는 행위 만으로도 내 의도를 깨달았다.
"너 설마...?"
"이거로 괴인을 만들어."
나는 펜릴에게 괴인 제작을 의뢰했다.
"이러면 누가봐도 네가 만든 괴인이라는 걸 알 거 아니야."
괴수에게 깃드는 마력은 펜릴의 마력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은 '박펜릴'의 마력이다.
풍속성 95에 나머지 속성이 0에 가까운 절풍의 펜릴이 아닌, 풍속성 99에 나머지 속성은 '박라온'의 자질이 담겨있는 '박펜릴'의 고유 마력이다.
민트초코 향이 풀풀 날리는 괴인.
누가봐도 절풍의 펜릴이 만들어낸 괴인이라 확신할 것이다.
"마력 패턴이 다르면 나처럼 보여도 내가 아닌 거 아니냥? 네 보디가드 펜리스 박이 의심받을텐데?"
"그러니까 더 헷갈리지. 혹시 절풍의 펜릴이 더 강해진 거 아닐까? B급 괴인 17명 정도는 쉽게 만들 정도로 진화해서 마력 패턴이 바뀐 건 아닐까?"
나는 펜릴과 손을 맞잡았다.
"누가 의심이나 하겠어? 지휘관이 다크 레기온 간부를 영입해서 자기 몸값 높이려고 간부에게 셀프 암살을 의뢰한다는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거 아니냥?"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
펜릴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박라온의 몸에 깃들며 박라온의 지식도 공유-라는 이름의 일방적 확인-하게 되었고, 라온이 알고 있는 말도 제법 잘 활용하게 되었다.
"흐흥, 지휘관 지시로 만든 괴인으로 런던을 습격한다.... 재미있는데?"
"뿐만이 아니지. 절풍의 펜릴이 만드는 괴인인데, 어디 쉽게 격퇴당할 것 같아?"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냥?"
나는 펜릴의 불만을 입맞춤으로 잠재웠다. 그리고 빅벤 안으로 들어가는 외벽의 문을 열고 시계 안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괴인 만들고 지시내리면서 구경이나 하자고."
"...흐흥, 그러면 괴인들을 곳곳에 퍼뜨리게 한 상태에서 만들어야겠는데? 그래야 우리가 여기있는 거 모를 거 아니냥."
"물론이지."
펜릴은 민트초코를 잔뜩 버금은 코어를 한아름 안아들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의 꼬리를 붙잡았다.
"후냥?!"
"어딜 가려고?"
"괴, 괴인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냥!"
"그러니까 어딜."
나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서 만들어. '풀영창'으로."
"......."
펜릴을 사색이 되었다. 절풍의 펜릴으로서 괴인을 만들 때는 아무렇지 않게 만들었을테지만-
"네, 네 앞에서 하라는 거냥?!"
펜리스 박, 라온의 지식을 읽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하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왜? 부끄러워? 북풍의 바람이 몰아치는 이 땅에, 고귀하고-"
"냐아아앙!"
펜릴은 내 멱살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는 순순히 멱살이 잡힌 채, 그녀가 A급 괴인을 만드는 대사를 곧이곧대로 읊었다.
"오라! 전장의 바람이여! 신들의 시대를 장식할 황혼의 폭풍이 될지니!"
"그만! 그마아아안!!"
영창은 내가 하고, 마력은 펜릴이 집어넣는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이러면 내가 아빠고 네가 엄마가 되는 건가?"
"!!"
펜리스 박, 격침. 그녀는 내 가슴을 두드리다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백청화와 펜리스 박이 낳은 괴인들은 런던을 습격했다."
"그만하라냥!!"
애애애애앵--------
* * *
모든 이능력자에게는 고유의 마력 패턴이 존재한다. 마력 패턴은 사람의 지문과 같은 것이며, 일란성 쌍둥이 형제 이능력자도 마력 패턴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즉, 세상에 같은 마력 패턴을 가진 존재는 없다.
히어로나 빌런 뿐만 아니라 괴인도 마찬가지이며, 지구상에 지금까지 마력 패턴이 모두 동일한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건 '다크 레기온의 간부'도 마찬가지.
한 번 특정된 간부들의 마력 패턴은 워낙 특이하고 이질적이었다. 인간의 색이 하얀 캔버스 위에 일곱 가지 물감이 서로 뒤섞여 혼재된 색이라고 한다면, 간부의 색은 캔버스의 천을 오직 하나의 색깔로 물들인 것과 같았다.
그래서 히어로 협회는 간부의 마력 패턴을 하나의 색으로 지정했다. 그들의 색은 변함이 없었고, 다른 빌런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원색의 파장이 간부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히어로 협회는 펜릴의 것이 틀림없는 마력 패턴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절풍의 펜릴이...아니야?"
연구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괴인 특유의 이질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탁한 기운은 펜릴의 것이건만, 이전보다 녹색은 더욱 선명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괴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도 분명히 펜릴 계열이건만, 새롭게 나타난 녹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게 했다.
"이런 모습은...."
연구진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데이터 하나를 꺼내들었다. 좌우를 비교하며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한 연구원들은 현재 실시간으로 영국 런던이 패턴을 가진 괴인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있다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SS...?"
영국의 자랑스러운 히어로, <가웨인 경>의 마력 패턴보다 <펜릴 추정의 괴인>의 패턴이 더 선명하고 짙었다.
"설마 절풍의 펜릴이...각성을?"
삐비빅.
연구원들이 경악과 공포에 다리에 힘이 풀린 사이, 런던 일대를 빛처럼 돌아다니던 마력 반응이 소실되었다. 절풍의 펜릴으로 추정되는, 아니 확실한 존재는 영국 협회의 마도 레이더로부터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정말...다크 레기온의 간부가 SS급을 넘었단 말인가?"
연구실에는 연구원들의 허망한 목소리만이 가득 차올랐다.
* * *
키에엑!!
괴인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펜릴이 영창을 통해 만들어낸 17명의 괴인들은 저마다 주어진 목적에 따라 명령대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 금발벽안의 남자를 습격해라.
사실상 영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성들이 습격 대상이었다. 괴인들은 날개를 펄럭이며 사냥감을 찾아 눈에 불을 켰고, 런던 일대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시민 여러분, 이쪽으로 대피하십시오!"
왕실의 건물을 지키는 근위병은 정해진 교전 수칙에 따라, 패닉에 빠진 시민들을 시설 안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코어웨폰, 마나가 깃든 총검을 들고 시민들의 혼란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일수록 괴수는 더 많이 날뛰는 법. 놀란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시설 안으로 들어가다보니 근위병은 정신이 없었고, 그의 모자가 뒤로 넘어가 머리칼이 드러나버렸다.
금발. 근위병의 푸른 눈동자에는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넘쳐났다.
키에에엑!!
괴인은 근위병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며 뛰어올랐다. 한순간에 근위병을 깔고 앉은 괴인은 근위병의 어깨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혔다.
캬아아악!
"으, 으아악!!"
괴인은 입을 쩍 벌리며 무언가를 토해냈다. 녹색으로 반짝이는 형광물질은 근위병의 얼굴을 덮었고, 형광물질은 근위병의 옷을 순식간에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저리가, 이 괴물아!!"
곁에 있던 근위병들이 괴인을 향해 총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괴인의 외피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크륵, 크르륵.
괴인은 바닥에 깔고 앉은 근위병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성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퉤.
아이스크림처럼 꾸덕하게 흘러내리는 옥색의 점액이 근위병의 성기를 덮었다. 괴인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날아올랐다.
"어, 어어...?"
괴인에게 습격당해 알몸이 된 근위병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놀랐다. 동료들은 차마 그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삐비빅.
마도기어에 긴급 연락이 전해졌다. 근위병은 멍하니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문구에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 영국 전역의 금발벽안 청년들은 지금 당장 대피할 것.
"설마.... 지휘관이...?"
근위병은 괴인이 자신을 습격한 이유를 깨닫자마자 기절하고 말았다. 얼굴과 고간을 덮은 점액은 코를 찌르는 강렬한 민트초코의 냄새를 풍겼고, 근위병은 민트초코 냄새가 나는 마력 아래에 쓰러졌다.
영국, 런던.
곳곳에서 민트초코 괴인들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 * *
"햐아앙. 사방에 민트초코 향이 가득해."
박펜릴은 내 허벅지에 머리를 뉘이고 뭉그적거렸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털처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런던 전역이 박펜릴의 마력으로 가득찼네. 잘했어."
17명의 괴인들은 런던 전역에 자신들의 존재를 흩뿌렸다. 그들의 체액에는 펜릴의 마력이 진하게 남아있었고, 괴인들에게 테러를 당한 이들은 모두 점액 범벅이 되었다.
테러를 당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금발 벽안의 20대 청년이라는 것.
심지어 그들을 죽이지도 않고 확인만 하고 사라지니, 눈치빠른 이들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아, 금발벽안의 백인이 지휘관이구나!
"사실 토종 한국인인데 말이야."
"지휘관이 협회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지휘관 실격이다냥."
"어차피 외국 히어로 협회는 다 적이야. 어그로를 끌려면 확실하게 끌어야지."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히어로 위키를 뒤졌다. 런던의 기이한 현상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 몇 가지 단서는 금방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하나, 절풍의 펜릴이 갑자기 런던을 습격했다.
둘, 괴인들은 금발 벽안의 남자들을 무차별 습격했다.
셋, 최근 지휘관이 영국에 방문한다는 소문이 있다더라.
"우리가 굳이 알릴 필요도 없이, 전 세계에 외치는 거지. 지휘관이 영국에 있고, 펜릴이 지휘관을 습격했다!"
"그래서 나한테 잡힐 예정이냥?"
"아니. 미안하지만 이건 보여주기라서 말이야."
나는 펜릴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네 이번 작전은 실패해줘야겠어."
"그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 나는 이렇게 지휘관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는데, 왜 내가 실패한 거로 알려져야 하냥."
펜릴은 내 목을 꼬리로 휘감으며 간질였다. 나는 그녀의 볼을 앞뒤로 문질렀다.
"그래야 사람들이 속을 거 아니야. 지휘관이 영국에 있는 것처럼, 절풍의 펜릴도 지금 영국에 있구나."
"그래서 노리는 건?"
"절풍의 펜릴이 죽는 것. 정확히는...'펜리스 박'이 절풍을 죽이는 것."
펜릴은 부스스 일어나 내 위에 몸을 붙였다. 그녀의 눈에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아가는 아이처럼 흥미가 가득했다.
"풍마룡 있지? 걔를 강제로 각성시킬 거야. 그리고 난 다음...."
나는 펜릴의 손을 붙잡아, 왼손 약지 위에 입술을 붙였다.
"놈을 다크 레기온 간부처럼 세상을 속이게 만든 다음, 너는 우리 팀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신분세탁?"
"물론. 절풍을 죽이고, 펜리스 박이 이 지구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나는 펜릴에게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했다.
"펜릴 양의 탄생을 축복하는 기념으로 섹스 어때? 나 지금 민초맛이야."
"......비겁하다냥."
펜릴은 내 볼을 붙잡았다.
"이 몸은 최강의 암살자. 절풍 따위, 단칼에 죽여버리겠다냥."
댕, 댕, 댕.
빅 벤이 울리는 때, 나는 펜릴과 다시금 계약을 공고히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