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2화 〉2부 5장 06
<그 시각, ????.>
"...흐응."
긴 흑발의 여인은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마도기어로 보이는 영상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푸흡."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검게 물든 눈동자에는 옥색의 점액에 습격을 받는 금발벽안 청년들이 한가득이었다.
"펜릴 녀석, 할 때는 하잖아."
"아지다하카 님, 간식입니다."
아지다하카라고 불린 여인의 옆에는 금발벽안의 정장 남성이 트레이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았다. 어느 왕국에서 사용할 것 처럼 보이는 고운 접시에는 가운데 하얀 마시멜로우가 담긴 검은색 쿠키가 놓여있었다.
"고마워. 거기 두고 가."
아지다하카는 쿠키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시종은 눈썹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엎드려서 드시면...."
"않으면 뭐? 지금 이 꿀잼을 놓치라는 거야, 나보고?"
아지다하카는 여러 개로 펼쳐놓은 스크린을 보며 쿠키를 깨물었다. 검은 가루가 침대에 바스스 흘러내렸고, 시종은 침과 함께 하려던 말을 간신히 삼켰다.
"저거 봐, 저거. 지금 저런 식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는 거야. 지휘관이라는 놈이 금발벽안이란 걸. 영국 쪽은 신경 안써도 되겠는 걸?"
"그럼 어떻게 할까요? 병력을 물립니까?"
"......뭐, 그래야겠지? 펜릴이 지금 재미보고 있는데 내가 괜히 끼어들 이유는 없잖아."
아지다하카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쿠키를 입에 덥썩 집어넣었다.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이로 쿠키를 깨먹던 아지다하카는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야, 너 미쳤어?"
"예?"
시종은 갑작스러운 아지다하카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시종은 과연 그녀가 이번에 어떤 히스테리를 부릴 지 긴장했다.
"내가 이거 먹을 때는 우유 꼭 가져오라고 했지!!"
푸욱.
시종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러오는 검은 그림자에 격통을 느꼈다. 그림자에서 뻗어진 손은 시종의 가슴 속 심장-코어를 육체에서 뜯어냈다.
"고, 고작 우유 때문에...?"
"허, 고작 우유?"
아지다하카는 눈에 불을 켜고 코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럴 때마다 코어가 된 시종은 심장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우유 없으면 이걸 왜 먹냐?"
시종은 너무나도 억울했으나, 갑은 아지다하카였다. 시종은 육신을 잃고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아지다하카는 스크린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 참. 펜릴이 일을 하는 걸 다보네."
그녀의 이명, 마암룡.
"멸망이 다가오니까 쟤도 달라지는구나? 흐흥, 나는 안 나서도 되겠네."
절풍의 펜릴과 마찬가지로,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아시아의 절반을 책임지는 '괴인'이다.
"나는 넷플이나 봐야겠네."
...현대 사회에 너무나도 잘 적응한, 암속성 괴인이다.
* * *
아비규환이 일어난 가운데, 런던의 시민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꺄아아악!!”
날뛰는 괴인을 피해 도망치는 일반 소시민.
“뭐 해?! 거기 있으면 위험해!!”
시민들 중 서로 도우며 대피하는 용감한 시민.
“잠깐만! 이거 사진 좀 찍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와중에 목숨을 걸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으려는 이들.
“우오오! 괴인 직촬!”
“미친 새끼들아!!”
상식과 비상식이 충돌하는 현장은 유감스럽게도 비상식의 승리였다. 괴인이면 아무나 습격하는 게 상식인 세상에서, 괴인들은 금발벽안백인만 노리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캬아악!!
괴인 하나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어 도로에 착지했다. 사람들은 괴인의 모습을 보고 주저앉거나 비명을 지렀으나, 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습격한 이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으, 으아악!!”
모자가 벗겨진 청년은 금발이 드러났다.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지자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끼요오오옷!!
괴인은 금발벽안의 청년을 발견한 것에 환호성을 질렀고, 청년은 괴성을 질렀다. 그는 이미 괴인에게 잡힌 이들의 말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마! 씨발, 차라리 죽여!!”
큐륵.
괴인은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 청년의 허리띠를 끊었다. 그리고 그의 청바지를 손톱으로 북 찢어버렸다.
덜렁덜렁.
괴인의 손톱만큼 두꺼운 세 번째 다리가 덜렁거렸다. 청년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괴인보다 괴인 뒤에서 마도기어를 겨누며 사진을 찍고있는 자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퉤.
괴인은 입에서 녹색의 침을 뱉었다. 청년의 고간을 뒤덮은 점액은 청년의 하반신을 보호하듯, 팬티처럼 내려앉았다.
풀썩.
괴인은 청년을 상냥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린 청년은 바지와 팬티가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괴인이 뱉은 침은 무해한 마나 덩어리였으나, 감히 누구도 그걸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크르릉!
또다른 괴인이 착지하여 청년을 살폈다. 혼이 나간 청년의 머리와 눈을 확인한 뒤, 끼요옷 하며 괴성을 지르던 괴인은 고간부에 이미 가득한 점액으로 눈을 돌렸다.
뀨르륵.
괴인은 몹시 실망한 얼굴로 청년의 얼굴에 침을 뚝뚝 흘렸다. 녹색의 점액은 청년의 이마를 중심으로 크게 X자를 그리고 있었다.
“...하, 하하.”
사람들은 깨달았다.
괴인들이 금발청년들에게 내뱉는 점액은, 서로가 서로 습격하여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는 증거라고.
* * *
아직까지 우리는 다른 자들의 개입을 확인하지 못했다. 절풍의 펜릴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걸 눈치챈 덕분인지, 다른 속성의 괴인들은 영국으로 날아와 돕는다거나 하지 않았
“다행이네. 괜히 아지다하카나 히드라가 뛰쳐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우리가 낳은 괴인들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다냥.”
펜릴이 만든 괴인들은 말그래도 미쳐 날뛰고 있었다. 금발벽안만을 노린다는 걸 인지한 사람들도 미쳐 날뛰고 있었다.
- 여러분, 보이십니까?! 저기 녹색의 괴인이 히어로들을 농락하는 모습을! B급 괴인이 같은 등급의 히어로들을 상대로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걸 중계하는 사람도 있네.”
“자기는 금발벽안 아니라 이거지.”
“쟤는 좀 휘말리게 만들어야겠다. 펜릴, 지나가다가 건물 유리창 소닉붐으로 박살내줘.”
“죽이진 말고 식겁하게 만들라는 거지? 알았다냥.”
와장창.
내가 전략을 짜고, 펜릴이 전술을 지시한다.
B급 괴인은 히어로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건물을 수평으로 달렸고, 근처에서 마도기어로 생중계를 하던 검은 머리 청년은 자신을 덮치는 유리조각에 기겁을 하며 자빠졌다.
“남들은 전쟁났는데 거기서 구경하는 걸로 돈 버는 건 아니지.”
“전쟁 일으킨 당사자가 할 소리는 아니다냥.”
“괜찮아. 인류 평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희생이야.”
재산상의 피해는 많다. 하지만 그건 영국에서의 레이드를 통해 얻을 코어로 충당할 수 있다.
인명피해도 많다. 금발벽안 청년들은 만천하에 녹색의 점액에 파묻혀 알몸이 공개되어버렸다. 죽는 것보다 낫기야 하지만, 아랫도리에 자신이 없는 청년들은 죽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울 것이다.
‘나중에 고마워 할 거다.’
‘간부 펜릴’의 마력에 한 번 절여졌기에, 추후 인류의 재앙에서 인간들을 학살하고 다닐 테라리스트들의 습격 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괴인은 아니지만 그들의 몸에 남은 펜릴의 마력 성분 덕분에 괴인으로 인식이 될 테니. 게임이기는 하더라도 마냥 그들에게 피해만 끼칠 수는 없었다.
“펜릴, 슬슬 한 곳으로 모으자.”
“어디로 모으면 되냥?”
“스톤헨지.”
역사적, 문화적 유적 지구만큼 괴수와 괴인들이 날뛰기에 좋은 곳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낼 차례.
“푸흐흐, 아마 받자마자 자지러질걸?”
나는 영국 히어로 협회에 ‘괴인 공략을 위한 전술 대응 체계’를 전송했다. 이른바 [대 절풍계 괴인 공략집]으로, 펜릴의 마력에 의해 괴인이 되어버린 풍속성 괴인들의 패턴을 일부 수록한 공략집이었다.
“우와...지독하다냥.”
그리고 그걸 본 괴인 제작자는 넌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선 갈아타서 정말 다행이다냥.”
“그럼 당연하지.”
펜릴이 내 편이 되지 않았다면 이 공략집에 의해 공략당했을 사람은 바로 펜릴 본인이 되었을테니까.
“우리는 이제 뭐하면 되겠어?”
“굿이나 보고 떡이나 치자?”
“정답이야.”
나는 큥큥 울려대는 펜릴의 배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꼬리를 자지 쓸어올리듯 애무했다.
“여왕님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한 번 지켜보자고.”
대 절풍계 괴인 공략 계획.
장소는 영국 런던으로부터 약 100km 떨어진 원시 고분군, ‘스톤헨지.’
“문화재를 점거한 괴인들을 한꺼번에 제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과연 여왕님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지속성 최강자, 영국 여왕 아르엘이 ‘바위’를 조종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