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753화 (753/1,497)

〈 753화 〉2부 6장 17 세계를 넘어오는 조건

지칭을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게임 속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건 엄연한 별개의 세상이었다.

제작사에서는 하나의 세계를 게임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신라가 즐겁게 플레이를 하고 있는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고, 나는 게임 속 세상이 아닌 게임의 배경이 된 원래 세계 그 자체에 빙의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게임 속에 빙의했다면, 시작하자마자 '상태창!'을 외치며 플레이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창염이나 여타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를 확인하며 움직였을테고, 그러면 내 공략은 정말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엄연히 하나의 세상이었다.

편의상 '2020년의 세계'라고 가정을 한다면.

사실상 모두 다 처녀인 히로인들이었다.

원작에서는 비처녀인 천가을도 촉수괴인이 달라붙었지만 결국 구해내는데 성공했고, 다른 히로인들과도 딱히 관계를 맺지 않았다.

오직 창염만을, 신라만을 생각하며 성주를 쓰러뜨리고자했기에 나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다른 히로인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가지고 논 것은 사실이다.

어장관리.

정작 신라만을 생각하며, 매드사이언티스트 히카리의 도움을 받아 내 영혼의 일부를 X로이드에 남긴 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사실 그렇게 남겨둔 건 신라를 위한 이상향이었다.

나만 없는 세계.

내가 없는 세계.

신라는 이제 그 세계에서 태양의 여신이 될 것이며, 2020년에서 남은 나의 기억과 파편과 살아가기를 바랐다.

물론 신라 또한 기적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 탈출하며 우리는 진정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신라는 지금 뉴하랑을 공략하려고 신서울 타임어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석하랑의 원본...그러니까 2020년의 석하랑과 마주보게 되었다.

"너...정말 석하랑 맞아?"

"그러는 나야말로 오빠야가 피닉스인지 묻고 싶은데."

선물포장에서 풀려나 가벼운 외투를 입은 석하랑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이죽거렸다.

"흥, 점마가 독점하려고 든 이유가 있었네."

"...칭찬이야?"

"칭찬이지. 아 씨, 근데 이 집은 와 딸기밖에 없는데? 블루베리 내놔라. 없으면 시키든가."

"일단 시켜놨어. 올 때까지 잠깐 앉아있어봐."

나는 석하랑과 부엌에서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딸기 이외에도 대접할 수 있는 차는 당연히 많았지만, 나는 머릿속이 그만 하얗게 물들어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 찔리면 나, 죽는 거 아닌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는데...."

"결론부터 빠르게 내리면 되는 거 아니가? 내, 하신라랑 똑같은 상황이라고."

"...미치겠네."

간단히 말해, 2020년의 세계에서 석하랑은 차원 이동을 한 셈이다.

"이거 보면 바로 알 걸?"

석하랑은 내 앞에서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서 얼음결정과 물방울이 함께 나란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음창이 되었다가 아름다운 한복 스타일의 옷이 되었다가 온갖 형태로 변했다.

"물과 얼음의 여신 석하랑 강림."

신라가 불과 태양의 여신이라면, 석하랑은 분명 물과 얼음이었다.

"간단하제?"

"...그."

"오빠야 어떤 상황인지는 다 들었다. 그...원작 게임도 내가 직접 해봤고."

"......."

"분명히 말하지만, 내는 게임 캐릭터라고 충격받고 그런 거 없다? 나는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다른 세계에서 남들이랑 섹스하고 막 그런 건 진짜 기분 좆같고 그런데...."

석하랑은 은근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

"내는 처녀니까, 상관 없겠더라고."

"뭐...."

"그냥 남들이 내 가지고 딥페이크 야동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지 뭐. 내가 딴 지휘관 놈들이랑 섹스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산에서 대량학살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가? 그래. 나는 오빠야 생각대로...2020년의 석하랑인 걸."

"너 혹시 내 생각을 읽는 능력도 있나?"

"표정 보니까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견적 나오는 구만."

석하랑은 기지개를 켜며 내게 거실을 가리켰다.

"내 방은 어디로하면 되는데? 후첩으로 들어왔으니까 부부침실 들어갈 생각은 없고, 거실에 빈백 하나만 놓아주면.... 아, 이 집은 거실에 TV도 없나? 미친 거 아이가?"

"부부침실에는 있는데."

"...그거 옮기는 건 좀 그렇제? 혹시 설거지 일당 얼만데? 내 TV랑 수신료만큼은 집안일 하면서 도와줄게. 내 이래봬도 청소 잘한다."

"하랑아. 한 가지 물어보자."

나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려는 석하랑을 앉히며 물었다.

"네가 거기서 나온 거라는 건 알겠어. 근데...너 지금 몇 살이야?"

"풋."

석하랑은 가디건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아주 자랑스럽게 내게 내밀었다.

"21살. 갓 성인이 된 따끈따끈한 처녀."

"...미친."

"오빠야가 신경쓰는 건 그 뒤의 일 아이가? 누가 리얼돌만 남기고 난 뒤의 일. ...오빠야 표정 보니까, 나도 혹시 무슨 순환 뺑뺑이 돌면서 개고생을 한 것 처럼 생각하는데...그건 아니데이."

"그러면?"

"내가 오히려 묻고싶은데. 오빠야는 그 날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데?"

"...1년 정도 지났나?"

"...내는 한 석달 됐나. 오빠야 리얼돌 보기만 해도 빡쳐서 창고안에 처박아뒀는데, 갑자기 그...청화단에 대머리 아저씨가 전화를 하더라고. 자기 정체를 밝히더니, 다시 보고 싶지 않냐고 하다가...."

석하랑은 정말 복잡해보이는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결국에는 오빠를 찾으러 오기로 한 거지. 모든 걸 버리고. 앞으로 다시 영영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너 설마."

"나라는 구했고, 세계는 평화로워졌지. 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엄빠도 이해할 거 아이가. 사랑을 찾아서 떠나온 건데. 나도 오빠야랑 똑같은 짓 하고 왔거든."

"...뭐라고?"

석하랑은 자신의 하복부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분령. 엄마 뱃속에 석하랑 MK.2가 자라고 있다 이 말이다. 엄마는 그래도 이해해주더라. 그리고 이 말을 꼭 전해라고 하던데...마침 나오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평상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신라가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흐응, 설마 루살카가 아니라 당신이 이 위치까지 올라올 줄이야."

"만나서 반갑네. 내가 그렇게 질투하던 사람이 사실은 당사자의 몸 속에 살고 있었다니. 그리고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 걸."

싸아아.

갑자기 거실의 공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제 남자가 탐이 났어요? 여신이 되어서 세계를 떠나올 만큼."

"니도 마찬가지 아이가?"

"맞아요. 당신의 사랑은 분명 존중해줄만한 일이죠. 제 남자가 아니라면."

저벅.

신라는 석하랑의 앞에 섰다.

키 차이 때문에 신라가 올려다봐야했지만, 신라는 결코 석하랑의 기세에 꿇리지 않았다.

애초에 신라의 기세가 더-

"저랑 레즈 섹스하면 섹스하는 거 허락해줄게요. 아니, 이 집에서 사는 것도 오케이."

"아다 떼는 것만 오빠야랑 둘이서 무드잡고 하면 안되나?"

"중간 난입 가능?"

"콜."

두 여자는 갑자기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였다가 동맹을 맺는 두 여자의 행태에 순간 납득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예요. 제가 저보다 못한 수준이라면 모를까, 저랑 동격으로 올라온 여신과 척을 질 이유가 없잖아요."

"누가 1년 동안 열심히 키워준 덕분에 내나 임마나 '신격'이 같아졌다는기다. 애초에 같은 신격이니까 이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거지."

"잠깐, 잠깐. 그러니까...내가 지금 대화를 못 따라가겠는데."

나는 신라를 가리켰다.

"하랑이가 레즈 섹스를 해주면 너는 하랑이가 이 집에 들어와도 된다는 거야?"

"대만족이죠. 신격이 낮으면 모를까, 저랑 동격이면 첩이 아니라 아내로 들이셔도 돼요. 물론 첫 부인은 저지만. 푸흐흐."

신라는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면 석하랑에게 묻는 수밖에.

"하랑아. 너는 정말 괜찮아?"

"첫 섹스만 좀 분위기 잡고 하면 뭐...."

"우리, 부산으로 한 번 놀러갈까요? 데이트 코스 한 번 싹 돌아버리죠. 그러고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처녀 섹스. 콜?"

"...하 씨. 끌리는 소리만 해서 밉지가 않네. 엄마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소리만 하는 애를 왜 그렇게 싫어한 거지?"

어느새 석하랑과 신라는 의기투합하여 부산 데이트 코스를 짜고 있었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새집으로 이사오는게 아니었어."

원래 집에서는 신라랑 둘이서 조용히 지내기에 딱 좋았는데, 신라와 이사를 하면서 너무 큰 집으로 온게 화근이었나.

새 아파트라고 처음에 분양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가 중간에 좋은 매물이 나와서 들어갔더니 이런 일이 생긴게 분명하다.

"...아직 방 몇 개 남았는데."

비어있는 방에 왠지 사람이 하나 둘 채워질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오한이 들었다.

"...혹시 더 넘어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건 내도 모르지. 간절하면 이루어지겠지만, 그 대머리 아재가 말하기를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

"중요한 요소?"

"어. 그러니까...."

석하랑은 헛기침을 하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비처녀 탈락 수고."

"...그게 뭐야."

"당연한 거 아이가? 오빠야를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라면...오빠야가 남기고 떠난 X로이드 따위랑 할 생각 하면 안 되지."

석하랑은 실실 웃으며 주먹 쥔 손에 손바닥을 두드렸다.

"내도 처녀 아니었으면 못 넘어왔다, 이거야."

"처녀면 인정이죠. 비처녀면 제가 쫓아냈을 거예요."

"내도 처녀 아닌데 이 집 들어올 염치는 없다."

"축하해요, 하랑. 그리고 거실에 일단 세팅은 할 건데...이왕이면 당분간은 부부거실 같이 쓸래요? 당신 방은 당신이 꾸미는 걸로."

"좋지. 배려해줘서 고맙데이."

"그럼 키스해줘요."

"......키스는 그."

석하랑은 나를 눈으로 흘겼다.

"...당신."

신라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하랑이랑 키스해줘요! 아주 농밀하게! 그래야 제가 하랑이랑 키스할 수 있으니까!"

"잠깐만. 하랑이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는 괜찮은데? 오빠야랑 키스하고 난 뒤에 한 번 더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고...."

석하랑은 베시시 웃으며 신라를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내도 오빠야가 오빠야인지 몰랐을 때는, 오빠야가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진지하게 여자라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너 진짜...."

"그래서, 오빠야는 싫나?"

석하랑은 나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이제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는데."

"......."

위이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는 현관으로 가서 배달로 주문한 음료를 꺼냈다.

"...일단 마셔."

"...응!"

신라에게는 딸기 요거트를.

그리고 하랑에게는 블루베리 요거트를.

"......에라, 모르겠다."

허리 흔들다 죽을 것 같으면 둘이 알아서 살려주겠지.

"흐흐흐, 하랑이랑 셋이서 섹스...."

"셋이서는 괜찮은데, 니랑 둘이서 할 생각은 없다?"

"보는 앞에서는 괜찮죠?"

"오빠야가 보는 앞이면 뭐...."

혹시나 내가 섹스를 하다 죽으면 다 신라 책임이다.

"마력으로 선즙필승이라니. 여신 다됐네요. 푸흐흐."

"아직 부족한게 많으니까 잘 가르쳐주라."

"임신하는 법 가르쳐드려요?"

"......우리, 자지만 두고 싸우기로 약속."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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