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6화 〉2부 6장 20 선겨울 납치
우리는 서울 지하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 광경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하고, 누군가는 분노에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손에서 피가날 정도로 화를 냈다는 것 정도만 알면 되리라.
원시 밀림의 야생에서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불과 1시간 거리에 문명인들이 살아가는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통스러운 야만인 생활을 하는 것에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선의철, 어떻게 안 될까요?"
유나를 비롯한 모든 히로인들이 선의철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원래 선의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라온부터 시작하여, 이제 투표권을 가지게 된 누리도 선의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만.
"선겨울 씨…지금은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모습을 봤다면 진짜 아버지를 축출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해는 해요."
우리 팀원 중에 선의철의 딸이 있다는 것이 다들 마음에 걸렸다.
딸이 아버지의 편을 든다는 것 보다는, 딸이 아버지를 물러나게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아버지가 보여주는 폭정에 환멸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선겨울 양은 지금 어디에 있지?"
"갑자기 사라졌는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일났습니다."
마스터 텐타클, 촉수마스터는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자신이 든 패드를 보였다.
"여왕님의 GPS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GPS요? 마력 신호가 아니고요?"
"그...마력은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 구형 GPS입니다. 옛날 휴대폰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
선겨울의 반응이 사라졌다.
이것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선겨울이 납치되었다.
누구에게?
"아니, 잠시만요. 선겨울 양, 이 지하의 여왕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존재가 왜 납치를 당하는 겁니까?"
"저희가 장악한 영역 이외의 장소에서 다른 놈들이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기도 쪽의 지하에서 흘러들어온 놈들이거나...아니, 어쩌면...."
촉수마스터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움직였을 수도 있겠군요."
"그녀?"
"예. 얼마 전, 저희 흑화단을 상대로 거래를 하러 왔던 흑발의 여자입니다."
흑발의 여자.
누군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녀의 특징은?"
"스스로를 다크 레기온의 간부, 아지다하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특히 김펜릴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는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언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 가지. 아지다하카니까 가능한 일이야."
그녀는 어둠을 틈타 움직이며, 빛 한 점 없는 이 지하는 그녀가 움직이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릴의 감각을 뛰어넘어 선겨울을 납치했다?
"...그게 있겠네."
큐브.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한한 마력의 보물을 사용할 수 있다면, 펜릴의 감각에서 벗어난 상태로 선겨울을 납치할 수 있다.
"저기, 사장님...."
"응, 유나야."
"그...."
자작극.
유나는 입모양으로 작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는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고, 유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자의로 같이 따라갔을 가능성도 있지.'
서울 지하에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악당'이 된 경우지만, 악당인 건 마찬가지다.
특히 아지다하카와 연계가 되었다면, 선한 부류의 악당이어도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수도 있다.
가령, 지하의 다른 괴인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서 우리 팀을 몰살시켜야 하는 경우.
아무리 우리가 지휘관 일행이고 마법소녀들이 강해보인다고 한들, 열 명도 되지 않는 여자들을 상대로 수 천에 이르는 남자괴인들이 덮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누구나 들기 마련이리라.
'히어로 등급이라도 알고 있으면 두려워할텐데, 그것도 아니잖아.'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A+인 슈리 뿐.
나머지는 전부 비공식적으로 강한 이들이기에, 힘순찐으로 지내면 시비가 붙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빨리 얼굴마담을 내세워야 하는 건가?"
감히 우리 팀원들을 상대로 껄떡거리거나 음습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지다하카 넘기면 그 뒤부터는 슬슬 두각을 드러내도 괜찮아.'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초반부는 웅크리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일어날 때다.
"...모두 주목."
함정이든 아니든, 아지다하카가 연루된 이상 '악'을 상대해야 함은 변함이 없다.
"내가 이런 날을 대비해서 선겨울 양에게 특별한 추적장치를 마련해뒀지."
"특별한...추적장치요?"
"그래."
시스템, 온.
[미니맵에 녹색 하나 다른 곳에 있는 게 선겨울이군.]
'그리고 동시에 아지다하카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보스룸까지 가려면 최소한 지하철 역 열 개 이상은 넘어가야한다.
"...근데 하필 여기야?"
이름부터 뭔가 찝찝하다.
나를 향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건지.
녹색 불빛이 반짝이는 그곳의 이름은 "가능"역이었다.
"의정부로 가자."
서울의 위기를 넘어 히로인을 되찾아, 아지다하카라는 간부를 넘어선다.
가능.
* * *
뚝, 뚜둑.
선겨울은 잠에서 깨어났다.
오랫동안 깊게 잠들어있다 깨어난 듯한 느낌에 정신이 몽롱했다.
"...!!"
그리고 정신을 차린 선겨울은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주변을 살핌에 앞서, 가장 먼저 살핀 곳은 자신의 가슴 사이.
"이걸 찾으시나?"
유들유들한 목소리의 여인은 손에 든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큐브를 가슴골 사이에 숨겨두다니. 그러다가 사이로 빠지면 어쩌려고 그래? 차라리 뱃속에 집어넣고 다니지 그랬어? 언제든지 빼낼 수 있게 조치도 하고."
"윽.... 너는...뭐야!"
"나? 다크 레기온의 간부, 아지다하카. 아, 이 모습으로는 처음 보는 건가...? 뭐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선겨울이고, 큐브는 부가서비스 같은 거니까."
아지다하카는 선겨울의 턱을 들어올렸다.
"자, 여기는 뭐처럼 보이니?"
"여기는...."
"그래. 모텔이야. 아주 시설이 낡고 버려졌지만...그냥 버려진 것일 뿐 조치만 조금 취하면 이렇게 보일 수 있지."
타닥.
천장에서 퍼진 주홍빛 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바닥과 천장의 높이도 낮아 불빛이 직접 아래로 닿고, 그 광경이 너무나도 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를 이용해서...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나? 대통령을 협박할 재료를 만들려고."
"...그래서 딸인 나를 납치했다?"
"그래. 물론 당사자 허락은 받았어. 자기 딸보다 자기 딸치는 게 더 중요했나봐. 딸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자지를 자른다고 하니까...벌벌 떨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하던 걸."
"뭣...."
선겨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목숨은 붙여둔다고 했는데도 그러더라. 너를 인질로 잡으면서도 고민했던게, 네가 이 나라 대통령한테 정말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
아무리 그곳이 중요한 급소라고 하지만, 친딸을 팔아 그곳을 지키고 싶을까?
"...이런."
선겨울은 좌절했다.
그리고 아지다하카는 낙담한 그녀의 어깨를 휘감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랑 거래를 하자."
"거래...?"
"그래.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거야. 친딸보다 딸치는게 더 좋다고 하는 남자에게 아주 제대로 복수하는 거야. 바로...."
삑.
아지다하카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허공에 화상을 띄웠다.
그곳에는 하나의 폴더창에 온갖 영상 파일들이 가득했고, 아주 적나라한 단어로 민감한 내용이 적혀져있었다.
[맑음]_정원녀_19호_도촬.avi
"어때?"
"나보고...지금 비디오를 찍으라고?!"
선겨울은 아지다하카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마음대로! 절대 그러지 않아!"
"남자는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해줄게. 그래...지휘관 어때?"
"?!"
아지다하카는 어느새 선겨울의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타났다.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귀에 속삭이듯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이랑 진짜로 하고 싶지 않아? 네가 지휘관이랑 하는 걸...찍어서 네 아버지에게 보내주는 거야. 금발백인에게 범해지는 자기 딸을 보고...과연 그 자는 어떻게 움직일까?"
"너는...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나? 그냥 취미생활."
아지다하카는 기대감 가득찬 눈으로 혀를 낼름거렸다.
"여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 나는...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을 뿐이야. 히어로, 행정가, CEO...특히 나랏님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온갖 이슈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지위를 상실하고 명예를 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래."
"...지휘관 님은 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데?"
"지휘관?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당연한 일이야, 그건. 그리고...개인적으로 궁금하거든."
아지다하카는 선겨울과 손깍지를 끼며 입술을 혀로 훑었다.
"지휘관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길래 과연 배신자가 나왔는데도 그 잘난 파랑새가 가만히 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지구의 유일한 존재니까 당연한 거지."
"아냐, 아냐. 그런 의미가 아니라구. 고작 그런 이유였으면 그런 식으로 살려두지도 않았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데도 살려줬단 말이야? 근데 살려준 이유가 뭐냐. 그건 간단해. 지휘관은...."
소곤소곤.
"......."
아지다하카의 말에 선겨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항, 맞나봐?"
"......."
"그래서 거래를 하자는 거지. 너는 아무 잘못 없어. 나쁜 건 악인인 나고, 내가 너를 조종하는 거니까. 너는 얌전히 몸만 빌려주면 돼. 그치?"
"윽...."
아지다하카의 몸이 서서히 안개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겨울의 피부 위로 스며들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영상을 찍고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고, 나는 네 몸으로 지휘관이 얼마나 대단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느끼고. 나중에 지휘관이 묻는다면, 아지다하카가 너를 조종했다고 해버려."
"나, 나는...!"
"아, 그리고."
스륵. 정면에서, 허공에 상체를 꺼낸 아지다하카는 선겨울의 얼굴을 붙잡았다.
"네게 거부권은 없어."
"!!"
츄릅.
잠시 뒤.
"...헤에."
선겨울의 눈은 짙은 어둠으로 가라앉아있었다.
"처녀네...흐흥. 미안."
선겨울, 아니 아지다하카는 배를 쓰다듬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네 아다는 내가 가져갈게."
그 미소는 너무나도 사악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