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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772화 (772/1,497)

〈 772화 〉2부 7장 05 유나와 데이트

신라나 하랑이나 둘 다 집안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둘을 위해 어느정도 집안인을 하기 때문이지만-여신의 손에 락스를 묻힐 수는 없지-, 기본적으로 둘 다 인간이 아닌 여신이기에 '이능'을 사용한다는 생활습관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먼지조차 남지 않게 창염으로 태워버린다.

먼지? 석하랑이 물로 밀어버리고, 남은 물기도 전부 다 빨아들여 물 때를 제거할 일도 없다.

살림살이와 생활 전반을 인공지능에 맡길 필요 없이,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우리는 마력으로 해결했다.

보일러 온도도 신라가 아주 쉽게 맞출 수 있고, 에어컨은 설치할 필요도 없다.

신혼집을 장만함에 있어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이것 저것 집어넣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런 물건들이 필요없을만큼 편리하게 지내고 있었다.

"조금 안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안되겠네요."

유나는 들어온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부엌과 거실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밖에 좀 나가요."

"대화는 안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대화 때문이 아니예요."

유나는 들어와서 집을 한 번 훑어보자마자 바로 나를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그럼 데이트야?"

"데이트.... 데이트라고 볼 수도 있기는 하죠. 따라와요."

나를 어디 으슥한 곳에 가두고 범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내가 밖을 나가는 순간, 내 몸에 남아있는 불꽃이 위치추적기마냥 신라에게 연동되어 바로 신호가 날아간다.

[일단 따라가봐요. 그리고 유나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자고요.]

신라는 의외로 내 외유를 허락했다.

[유나가 과연 당신을 어떤 식으로 공략할 지 궁금하네요. 석하랑은 임신공격으로 공격했는데, 과연 유나는 무슨 방법을 동원할 지....]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은데.]

이제는 내 속에 자리잡은 석하랑도 거들었다.

[내도 게임 스토리 봐서 알지만, 유나 엄청 무서운 애더라.]

[당신은 스트리머들 플레이 영상 정주행 했잖아요. 유나는 직접 플레이했을 때 더 무서운 법이라고요. 당신, H씬은 넘겼죠? 그러면 안 돼요!]

[...섹스라고는 전혀 모르던 동생이 섹스여신이 되어있는데 그럼 그걸 보고 뭐하는데? 남자가 점마였으면 질투라도 나지, 내 아는 착한 동생이 한량한테 코 꿰인 것 같아서 보기 좆같기만 하더구만.]

[그러니까 유나가 하는 행동을 보고 대처하자고요. 여차하면 저희 둘, 워프 탈게요. 괜찮죠?]

물론.

아무리 유나나 히드라가 나를 원한다고 한들 범해지는 건 사양이다.

내 자지는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

따라서 함부로 외간 여자의 구멍에 꽂거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나가 언제 '지휘관'과 하고 싶다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자이던가?

아니다.

남자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잡아 끄는 박력은 게임 속 유나의 것이 아니다.

'히드라인줄.'

나는 나를 잡고 이끄는 그녀의 모습에서 히드라의 추진력을 보았다.

싱크로 상태는 아니지만, 싱크로한 과정에서 히드라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게 틀림없다.

유나에게는 약간의 이기심과 적극성을.

히드라에게는 유나의 순수함과 순결함을.

...좋은데?

유나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불평불만을 드러내는 점이 바로 '수동적인 태도'였다.

남자하자는 대로 하는 건 좋지만, 뭐든지 남자 하자는 대로 하는 모습에서 조금 불평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다들 유나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그 관점에서 볼 때, 히드라는 유나에게 최고의 파트너였다.

"오빠, 타요."

지하 주차장.

유나는 고급 국산차를 향해 버튼을 눌렀고, 삑삑 소리가 나는 차의 문을 열었다.

"국산?"

"너무 눈에 띄는 건 오빠가 싫어할 것 같아서. 면허증 가지고 왔어요? 한 번 드라이브 하실래요?"

"운전, 해줘."

면허증은 있지만 사고를 냈다가는 보험 처리도 골치아프다.

유나는 웃으며 조수석을 가리켰고, 나는 마치 복학생 오빠가 모는 구아방에 오르는 새내기 여대생마냥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벨트 매시고."

끼이익.

유나는 거칠게 차를 밟았다.

슬쩍 보이는 눈동자에 보이는 진지함으로 보아, 지금 히드라의 감각을 사용하는 게 눈에 띄었다.

땅 위를 달리는 '차마(車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 누구도 히드라를 따라올 수 없는 만큼, 유나는 네비게이션의 인도 따위는 필요없이 도로를 쌩쌩 달렸다.

"유나야, 칼치기 하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다."

"칼치기 아니예요. 넉넉하게 들어가는 건데."

순간, 옆으로 도로 주변에 있는 무인모텔이 보였다.

나는 왠지 유나가 무인모텔의 주차장을 흘깃거리는 것 같아 먼저 선수를 쳤다.

"설마 모텔 가는 건 아니지?"

"갈 생각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지금 당장 가야할 곳이 있어요."

갈 생각은 있다.

라고 말한 것 자체가 무섭다.

"...내가 설레발 친 것 같아서 미안해졌었는데 뭔가 이상해진 것 같네. 어딜 간다는 거야?"

"마트요."

이게 무슨 일이람.

끼이익.

"내려요. 장 좀 보려고 왔어요."

유나가 나를 붙잡고 나온 곳은 집 근처 대형 마트였다.

소위 SSM이라고 부르는, 건물 전체가 마트로 이루어져 있는 그곳.

"오빠, 집에 이런 거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부엌 선반에 고리가 없더라구요. 이것도 사죠."

"......음."

나는 유나와 마스크를 쓰고 집 근처 대형 마트로 왔다.

그리고 둘이 함께 카트를 몰며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청소기는 이거 어때요?"

"신라가 먼지는 쓸어버리니까 괜찮아."

"그렇구나. 마력은 참 대단하네요. 집에 먼지 조금만 쌓여도 청소하기 힘든데."

모든 생활의 불편함을 '마력'으로 해결하는 신라나 하랑과 달리, 유나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렌지 좋아하세요? 보니까 따로 음식물 쓰레기 모으는 통 같은 건 없던데. 압착기는...아, 다 태우시겠다."

"따로 버리지는 않아. 전부 태워버리지."

"집 안에서 뭘 태워도 화재경보 울리지 않으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하네요."

"그건 그렇지. 스프링클러가 작동을 안 하니까."

생각해보면 이게 정상이다.

유나와의 대화가 평범한 남녀가 함께 집을 꾸려나가는 모습이며, 서로 대화와 배려를 통해 살림을 꾸려나가는 과정-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이미 살림은 신라와 차려놓았다.

아무리 유나가 '내 편의'를 위한 물건들을 사러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유나는 우리 집의 일원이 아니다.

"아. 여기도 저거 있구나. 오빠, 커피 한 잔 하고 갈래요?"

"좋지. 너는-"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한 잔, 따뜻한 걸로 한 잔."

유나는 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신라나 하랑이처럼 확고한 취향은 없지만, 그래도 얼죽아와같이 한 겨울에도 무조건 아메리카노를 마시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한 것이....

"오빠는 뭐 마실래요?"

"나 저거 마시려고 했는데."

베리 후르츠 믹스 요거트.

딸기와 블루베리가 섞여있는 요거트.

"거짓말. 아무거나 주문하려고 하다가 그냥 저 떠보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의미부여 안 하셔도 돼요."

"...들켰는 걸."

유나가 사람이기는 해도 역시 여신은 여신이다.

딸기와 블루베리를 일부러 주문하고자 한 내 알량한 속내를 바로 알아챘다.

"저건 나중에 집에 갈 때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도록 하죠. 일단...이쪽으로 와주실래요?"

유나는 내게 자리를 제안했고, 우리는 커플석에 둘이 함께 마주앉았다.

평일 오전.

오는 사람들이라고는 유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님들뿐.

장을 보기에는 애매한 시간이기에, 우리는 제법 조용히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오빠.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오해 안 하지. 네가 섹드립치는 거 이외에는."

이미 유나의 섹드립에 대해 나는 내성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얼굴로 진지하게 섹드립을 치며, 그 소리에 '혹시'하며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게 이유나다.

"가볍게 커피랑 같이 먹을 것도 같이 주문할까요? 잠깐만요...."

"크림파이 주문하려고 하지마."

"오빠는 지금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나는 나를 흘기며 볼을 부풀렸다.

"저는 그 유나 아니예요."

"...미안. 아닌 거 알면서도 자꾸 그러네."

나는 괜히 유나에게 미안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20년의 유나다.

섹드립마스터, 10만번 플레이, 원작 게임 속 학사경고 자퇴생이 아니다.

공부에 환장하고, 수능에 목숨을 걸었고, 수능 시험 연기와 폐지라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지구를 지키기로 마음먹은 공부천재.

그런 존재가 내가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얻고자 한 이유나이자, 히드라와 싱크로에 성공한 이유나였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

"괜찮아요. 오빠가 생각하는 이유나나 저나 근본은 같으니까요. 그럼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너 먹고싶은 걸로 해."

"그럼 이거, '속에 생크림 가득한 식빵'으로."

"......."

"농담 한 번 해봤아요."

사람이 암만 자존감이 떨어지기 전이라고 해도 근본 성향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역공이다.'

당하고만 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야. 내가 생크림인지 커스터드 크림인지 어떻게 알아?"

"...흐음, 의미심장하네요. 근데 저야 모르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유나는 커피를 받아오며 자연스레 내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놓았다.

"직접 보려면 역시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어떤 자리?"

"어디든 좋아요. 저는 오빠가 가자는 곳이면, 하자는 곳이면 어디든."

"...이렇게 선문답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새삼스럽지만 확실히 유나는 그녀, 그러니까 신라의 모습이 확실히 남아있었다.

"그래요? 예전에 20년의 지구에서는 자주 그러셔서 지금도 그러시는 줄."

"그 때는 몸의 영향이 있었고, 지금은 아니거든?"

"그렇구나. 음...확실히 그 때랑은 다르네요."

질문에 다른 질문으로 답하며 답변을 회피하거나 하는 식으로, 유나는 내 질문에 대한 즉답을 피했다.

내가 아는 게임 속 이유나라면, 그렇게 하겠지.

"저는 오빠가 원하면 어디서든 치마 올릴 수 있어요."

...히드라의 영향을 받은 이유나는 다르다.

"원하신다면 이곳에서도 가능하죠. 콘돔은 필요없으니까, 필요한 건 오빠의 의지 뿐이랍니다."

"...매콤하네."

내가 알던 순하고 달콤한 유나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금 눈앞의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유나가 아니라는 걸 자각했다.

"오빠가 방금 물어보셨잖아요. 오빠가 하얀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려면 직접 몸으로 확인해야겠죠? 자...어디서 하실래요?"

"솔직히 답하면 확인하러 갈 수는 있어."

나는 유나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히드라 때문이야, 아니면 네가 진짜로 바라는 거야? 대답하지 않으면 해도 되냐고 물을 생각도 없어."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약속할게요."

유나는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해서 그래요. 저는 오빠랑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오빠가 아는 유나는 왜 오빠랑 십만 번을 그랬는지."

뭐?

"잠깐만, 그건-"

"알아요. 게임 속 이야기라는 걸. 하지만 근본은 같잖아요? 이유나는 가장 힘든 순간에 손을 내밀어준 사람에게 사랑을 빠진다는 거. 저도 마찬가지예요."

"너 설마...."

"오빠."

유나는 발그레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왕에게 범해질 뻔한 걸 용사님이 구해주셨는데, 공주가 잘생긴 용사에게 반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

성주로부터 유나를 구했다.

그것이, 내가 20년의 이유나에게서 호감을 산 이유였다.

"그러니까 오빠에게 있어서는 성주와의 싸움이 엔딩이었지만, 제게는 프롤로그였던 셈이죠."

유나는 내 손을 맞잡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니랍니다? 원래 순애물이 완결나면 그 뒤에 나오는 팬디스크는 서비스 차원에서 하렘 전개가 국룰이라고요."

"그래서 나보고 하렘을 만들라고?"

"오빠."

유나는 너무나도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명왕성이 지구랑 랑데뷰하는 걸 막은 영웅인데, 여자 여럿 좀 임신 시킬 수 있는 거 아녜요?"

"......."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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