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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773화 (773/1,497)

〈 773화 〉2부 7장 06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주인공은 영웅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은 '지휘관'을 뜻한다.

일반 노말 엔딩으로 따져도 명왕성이 지구에 처박히는 걸 막은 영웅이며, 세계 각지의 악명높은 괴수들과 괴인들을 쓰러드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정작 본인은 손이랑 좆만 놀린 거 아니냐고?

아래에 있던 히어로들이 열심히 움직인 거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지휘관이라는 구심점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로 뭉쳐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지휘관 자지 아래 대동단결(남자 빼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지휘관의 업적을 칭송하며, 그가 현대 사회와는 걸맞지 않는 하렘을 구축한 것에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세계를 구한 영웅이 한국에서만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S급 히어로만 되어도 한 나라의 차기 지도자가 혈연으로 엮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몸인데, S급 히어로를 찍어낼 수 있는 지휘관이라면 세계에서 오직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칭송하는 당연지사.

그래서 지휘관에게 과거 교토로부터 이어진 일본 공주님이 있든, 중국의 지도자가 낳은 수많은 사생아 중 한 명이 있든, 영국의 여왕님이 있든, 그리고 그 외에도 그에 준하는 미인들이 있든 배는 아파도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가져왔으며, 인류를 구했으니까.

그래서 지휘관은 인류의 영웅이다.

그리고 나는 지휘관의 업적을 고스란히 이루어냈다.

성주 격퇴.

이계신의 간섭 배제.

비록 모든 큐브를 없애는 건 실패했지만, 큐브는 일종의 수집요소였지 신라를 구하는데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신라를 구했다는 것.

영겁의 굴레에서 신라를 빼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만족했고, 나와 신라가 함께 그 굴레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이었다.

만약 신라가 없었다면 나는 공허함을 느끼고 20년의 지구에 대해 궁금해했겠지.

하지만 신라가 있기에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완전히 관심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이제는 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세계의 후일담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단적으로 말해서 오빠 덕분에 성주에게 강간당하는 걸 피할 수 있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유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주(星主).

그러니까 명왕성의 주인.

그 촉수달린 이형의 괴물은 유나의 안에 이계신을 넣어 임신시키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했고, 내가 직접 놈을 쓰러뜨렸다.

그래서 유나는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

나조차도 유사 싱크로를 이루어낸 창염의 피닉스 조차도 세뇌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는데, 성주의 직접적인 피조물인 유나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유나의 구원자가 맞다.

하지만.

"이거 소위 구원튀라고 하죠? 저 인터넷에서 봤어요."

"아니. 그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알아요. 하지만 오빠의 행동이 그렇잖아요. 자기가 죽거나 소멸할 걸 대비해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분신을 남겨두다니. 이걸로 대리만족 하라는 것도 아니고."

"......."

아닌 게 아니라 맞다.

유나가 포장한 것이며, 나는 남은 이들이 혹시나 자살하거나 폐인이 되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줄 분신들을 남겼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내 분신인 바이오로이드에게 화풀이를 하라고.

-바이오로이드가 강간당해도 좋다고요?

-그래. 그렇게라도 너희들의 화가 풀린다면.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예요, 고객님.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는 거지.

은유하에게 바이오로이드는 어떠한 짓을 당해도 괜찮으니, 모두의 심경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게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만처럼 보인 모양이다.

아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기만이다.

만약 창염이 자신의 소멸을 가정하고 분신을 남겼다?

나는 평생동안 괴로워했을 것이다.

남아있는 창염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신라'는 다시 영겁의 굴레에 빠져 고통받았을 지도 모르니까.

"...나쁜 짓 했네."

"잘 아시네요. 제 개인에게도 나쁜 짓 하셨구요."

"그건 조금...아니, 그래. 나쁜 짓이지."

사람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그냥 떠난다?

아주 나쁜 짓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말이예요, 저는 어쩌면 오빠가 괴인형으로 왔다면 진작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했을지도 몰라요."

"뭐?"

"저, 얼빠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잘생기기만 한다면 아무 남자한테나 반하는 존재였다? 그러면 유나는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고백할만한 여신이 오직 나만을 사랑해준다.

그게 유나의 메인 히로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으며, 유나의 성향이었다.

그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유나도 마찬가지.

"괴인형이 남자기는 하지. 하지만 그래도 남자인 상태로 만났다면 네 호감을 샀을 거라는 건 억지야."

"아뇨. 당사자인 제가 말하는 건데 왜 그게 억지예요? 제가 오빠 공략하면서 얼마나 설렜는지 알아요?"

유나는 태블릿을 꺼내 영상을 재생했다.

[인류를 잘 부탁한다. 너와 함께한 시간...썩 나쁘지 않았다.]

영상 속.

괴인은 투구를 살짝 벗었다.

푸른 불꽃이 그의 손에 담기며,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짧지만 행복한 인생이었다, YUNA.]

"......왜 내가 여기있는 거지?"

"그거야 오빠의 신체 모델링이 인게임에 사용되었으니까요."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는데."

내 말에 유나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오해를 산 것 같아서 유나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 때문에 그렇다는 게 아니야. 그냥...남자 지휘관인 놈들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좀 그래서."

"그거라면 괜찮아요. 남자 지휘관 상대로는 철저히 '우정'으로 끝나는 거니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물고 빠는 거, 일절 없어요. 그건...조 회장이 싫어하기도 하고."

"의외인 걸. 그 놈 그런 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조 씨에 대한 불쾌감이 아주 살짝 내려갔다.

"그럼 여자 지휘관 상대로만 열린다는 건가?"

"그렇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자 지휘관 모드로 괴인 피닉스 업적 따보겠다고 하지만...피닉스에게는 '혼'을 볼 수 있다는 설정이 붙어있거든요. 그럴 때는 그냥 철저하게 동료로 대하지, 뭐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고, 유나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유나야. 그런 쪽으로는 사소한 빌미라도 주면 안 돼. 인간의 망상은 끝이 없고,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되거든."

"실수 아녜요?"

"그들이 하는 건 실수가 아니니까. 봐봐. 솔직히 검색하기도 두렵고 좆같지만...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그렇잖아."

나는 차마 검색하기 두려웠던, 신라를 게임에서 구해내며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벌어진 사태를 보였다.

"유나는 누가 공이라고 생각해?"

"......오빠는 절대 박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 내 말을 듣고 바로 이해했다는 것 만으로도 너는 잘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유나는 시선을 피했다.

패드 속.

그곳에는 금발서양남과 흑발청안의 청년이 서로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그림이 가득했다.

차마 여기서 더 내리기는 힘든, 그런 그림.

지휘관과 서로 장밋빛 분위기를 보이는 청년은 대부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얼굴이 가려진 모습이었지만, 극히 일부 얼굴이 보이는 그림에서는 지휘관의 디폴트 얼굴 중 하나를 닮아있었다.

"내가 이걸 감수하면서까지 지구를 구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신라를 위한 일이었지, 너를 위한 일은 아니었어."

나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너를 구한 건 성주를 죽이면서 부수적으로 얻은 결과였을 뿐, 내가 이유나를 구하기 위해 성주를 죽인 게 아니었다는 말이야. 더 솔직히 말해? 이유나라는 사람을 동료로 맞이하고 싱크로까지 하면서 구한 이유는...신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요."

일부러 정 떨어지는 말까지 감행했음에도 유나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빠 안의 신라 님은 언제나 0순위겠죠. 하지만 오빠의 근본은 변하지 않아요. 질문 하나. 제가 게임 속 괴인 피닉스를 공략하고 왔거든요? 거기서 제가 섹스를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

괴인 피닉스는 남자다.

당연히 남성체로서 존재하는 만큼 성욕도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

- 끼요오옷! 여러분! 본인, 유팬보! 오늘 방송 역사상 최초로 피닉스랑 섹스합니다! 현실 처녀 떼기 전에 가상 처녀부터 떼고 가즈아아아아!!

- 오고곡...♥

- 이게...섹스...? 이런 게 섹스라면...흐끅, 성년 인생 전부 손해봤어...!!

나는 그것을 '유팬보'의 플레이 영상을 통해서 봤다.

- 부끄럽네요. 하아, 근데 너무 좋았어....

최초로 피닉스 루트의 존재를 밝히고 공략했던 그녀는 가상 현실 속에서 피닉스와 섹스를 했다.

정확히는 피닉스가 성행위를 요구했다기보다는 여자 지휘관이 섹스해달라고 청했고, 그에 피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응했다.

그 너무 황홀하고 좋아보여서 많은 여성들의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지만....

- 신라야, 왜 그래?

- 흐응.... 너무 당신 같아서 살짝 빡치네요.

소름이 돋았다.

진짜로 내가 섹스를 하는 것 같아서.

옆에서 진짜로 기분이 나빠진 신라를 달래주느라, 영상 속 피닉스가 하는 그대로 애무하고 섹스를 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그런데 유나가 가상이지만 내 데이터가 적용된 피닉스와 안 했다?

그럴 리가-

[내팬티보라색. 이제 작별이다. 행복해라.]

[마지막으로...한 번만 안아봐도 돼요?]

유나는 울먹거리며 물었다.

마치 진짜로 나와 최후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안는다라...너는 여전하구나, 정말.]

피닉스...아니,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유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움찔거리며 바로 손을 당긴 다음 유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 말은 네 마음 속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라.]

[당신....]

[하지만...그래. 솔직히 부럽군. 너처럼 예쁜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나는 아래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과연. 사랑인 건가....]

나는 뭔가 홀가분한 얼굴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사랑을 하고 싶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화륵.

[이 한 몸,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겠지.]

나는 사라졌다.

"...봤죠?"

유나는 영상을 중지하고 실실 웃으며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

나는 당장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오빠는 이런 남자예요."

"...인게임인데? 나 아닌데? 조가놈이 장난친 건데?"

"아뇨. 마찬가지예요. 게임 속 이유나가 저와 근본이 같은 것처럼, 오빠도 인게임이랑 결이 같죠."

유나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다는 거...어떤 여자가 바라지 않겠어요?"

"......."

망할 인게임의 나.

'지가 로맨티스트인 줄 알아.'

썩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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