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6화 〉3부 1장 08 탈옥
"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단이라뇨!"
델피아는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이상한 자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단으로 모는 것은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지?"
델피아의 앞에 앉은 금발의 노인은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으며 연기를 뱉었다.
"그는 우리의 신을 모독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잃은 것 치고는 행동이 너무 철저하지 않았나? 그래, 마치 기억을 잃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행동이었어."
"심문관!"
심문관이라고 불린 남자는 델피아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뱉었다. 델피아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검에 손을 올렸으나, 심문관의 근처에 있는 다른 기사들이 마찬가지로 검을 들어올리며 델피아를 위협했다.
"자네가 임무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헌신을 했는지는 내가 잘 알아. 스스로 범해지면서까지 자네는 화전마을에서 있었던 강간범들을 모조리 잡아냈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자가 정체불명이라는 문제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그 자의 죄목은 신성모독만 걸리는 게 아니라고."
심문관이 손뼉을 치자, 옆에 서있던 기사들이 길쭉한 종이를 넓게 펼쳤다. 그곳에는 마치 염사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장면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한 정령의 제보일세. 자네의 도플갱어와 함께 걸어가는 청년의 움직임보이나?"
"...예. 보입니다. 그냥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제된 움직임이죠."
"그래. 어디선가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 보여. 숙련된 베테랑 전사들조차 보이기 힘든 움직임이야. 그리고 이곳에서 저 자는 '정령을 살해'했네."
"......."
델피아는 침묵했다.
마을에서 자신이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폭주하며 마을을 쓸어버리는 정령을 향해 청년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탕.
청년은 손에 든 물건을 이용해 마력을 모아 아주 짧은 화살처럼 날렸다. 푸른 불꽃을 머금은 마력의 화살은 정령의 몸을 꿰뚫었고, 정령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그리고 정령은 아래로 고꾸라졌다. 금발의 여인은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졌고, 마찬가지로 청년 또한 앞으로 힘을 다 사용한 듯 쓰러졌다.
"...폭주하는 정령을 진정시켰던 건가요?"
"그래. 하지만 여기서 진짜 문제가 발생해."
심문관은 화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플갱어 델피아가 갑자기 주변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청년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깡, 깡, 깡!!
"저게 무슨…?"
"도플갱어도 본능적으로 위협이 되는 존재를 죽이려고 한 거야. 마침 기절도 했으니 죽이기 딱 쉬웠지. 하지만 보는 바와 같이...."
하지만 단검은 청년에게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단검의 칼날이 청년의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청년의 몸 위에 얇은 보호막이 펼쳐진 것 마냥, 단검은 푸른색의 보호막을 때릴 뿐이었다.
캬아악!
도플갱어 델피아는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성질은 바닥에 쓰러진 다른 정령을 향했다.
"저 정체불명의 정령이 도대체 어디서 온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정령을 구하고 난 뒤에 일어난 상황일세."
사아아.
도플갱어 델피아는 정령의 목을 졸랐다. 정령은 깨어나지도 못한 채 금색으로 흩어져 바닥에 흩날리게 되었고, 도플갱어 델피아는 정령을 죽인 것에 씩 웃기만 했다.
"아, 아아…."
"자네의 도플갱어가 정령을 죽였네. 왜 나타난 건지 주민등록도 없는 정령이라 당황스럽네만, 그래도 정령을 죽인 건 변함이 없지."
"하지만 그러면 정령살해라는 죄는 피닉스가 아니라 제가…."
"자네는 우리 비슈니아 왕국의 여기사일세. 감히 타인을 강간한 자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는 훌륭한 업적을 세웠지.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불의 정령과 빛의 정령의 싸움에 휘말려서 정령살해라는 죄를 덤터기 쓰는 걸 바라지는 않네."
"심문관. 그러나 그 자의 강력함은 심문관도 아시지 않습니까?"
델피아는 초조함에 손이 떨렸다.
"그의 강력함은...어쩌면 신관님과-"
"어허! 그 이상 말하면 신성 모독이다."
심문관은 날카롭게 외치며 밖을 가리켰다.
"자네는 휴식을 취하게. 자네가 적은 보고서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러니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큰일났습니다!"
다른 기사 하나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인이 탈옥했습니다!!"
"...뭐라?"
* * *
"이봐요, 아저씨. 너무 화려하게 저지르는 거 아니야?"
"시끄럽다. 고작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가두려고 하다니. 나는 이곳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방살이를 하며 느긋하게 기다릴 사람이 아니야."
나는 철창을 부수고 나왔다. 그리고 나오는 김에 나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줄 설명충...아니 미스 웨건을 고용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가명으로 말해도 되지? 내 친구들은 나를 '금빛연꽃'이라고 부르지."
"길다."
"그럼 짧게 '하리'라고 불러. 부르기 쉽지? 아까보다는."
"그래. 일단 내 뒤로 붙어라. 얌전히 여기를 나가고 싶으면."
"얌전?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얌전이라고 하는 거야?"
하리는 내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언제부터 경비병들을 다 패서 기절시키면서 앞으로 탈옥하는 게 얌전한 탈옥이 된 거야?"
"죽이지 않았다. 불구로 만들지도 않았어. 어디 불태우지도 않았다. 그냥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내가 아는 탈옥은 경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데?"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장비를 전부 빼앗긴 것도 아니고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탈옥하는 나를 막아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년의 지구나 테라나 마력을 통한 전투력 지표는 거의 비슷하다. 이 세계의 신들이 SSS급, 싱크로한 여신과 동급이라고 한다면….
델피아를 비롯한 기사나 경비병들은 최소 C급에서 B급 정도 된다. 내가 벌써 쓰러뜨린 경비병 30명이 전부 C급의 힘을 가지고 있던 걸 생각해보면, 20년의 지구보다도 훨씬 이능력자가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적도 많다는 거지.'
테라의 괴수와 괴인들이 지구로 넘어왔다고 생각해보면, 2000년부터 2025년까지 넘어온 모든 괴인과 괴수들이 테라에 바글바글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즉, 이곳에서 내 앞길을 가로막을 자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
"아저씨, 진짜 이대로 빠져나갈 거야? 그러다가 현상금 걸린다?"
"죄를 짓지도 않은 자를 가뒀는데 현상금까지 건다? 상관없다. 나는 이곳에서 하나만 확인하고 가면 돼."
"하나? 뭔데?"
"거기 까지 말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하리의 손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내게 안겼고, 나는 하리의 허리를 꽉 잡아당겼다.
'절대 몸에 닿는 거 아님.'
나는 내 속을 향해 변명했다. 현재 내 몸 위에는 마력의 보호막이 펼쳐져있고, 이 여자와 딱 달라붙어있어도 실제로는 얇은 공기층이 사이에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마치 콘돔을 씌운 자지와 보지의 만남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감촉이야 보호막 너머로 느껴지기는 한다만….
"네 죄는 뭐지?"
"자기는 말 안하면서 왜 내 건 확인하는 건데?"
"죄질이 억울하면 같이 탈옥하려고. 아니면 여기다가 버리고 가게."
"...가차없네."
하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웃었다.
"내 죄는 너무 예쁜 게 죄야. 신관 님이 내가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나를 감옥에 가둬버렸거든."
"신관이?"
"응. 억울하다면 억울하지. 내 미모를 두고 남자들이 서로 다투다가 죽었거든. 한 두 번이 아니라서 그 뒤로 나는 감옥에 갇혔어."
말도 안 되는 이유기는 하지만, 하리의 외모를 생각하면 확실히 그럴 법도 하다. 그녀의 외모나 몸매는 솔직한 말로 카르나보다 더 대단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떻게 해?"
"탈옥, 도와줄까?"
"탈옥하면 그 뒤에 나를 책임져줄 거야?"
"아니. 탈옥만 시켜준다. 그 뒤에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하리는 눈을 끔뻑이며 놀랐다. 설마 내가 자신을 밖으로 빼내주기만 하고 뒤에는 방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처럼 억울한 사람을 그렇게 가차없이 버려도 돼?"
"억울한 건 이해가 가지만, 탈옥하고 싶어서 탈옥을 도왔을 뿐이다. 그리고 너는 나와 동행하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는 어느새 감옥에서 밖이 보이는 넓은 마당까지 나왔고, 마침 푸른 하늘에는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은 오직 하나 뿐. 그렇다면 태양의 색은 무슨 색이지?"
"당연히 금색이지!"
"틀렸다. 정답을 맞추지 않으면 탈옥을 돕지 않을 것이야."
나는 등 뒤로 날개를 펼쳤다. 마침 근처로 새로운 경비병들이 무기를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아, 안 되는데…."
하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힘을 빼고 날개를 펄럭이며-
"파, 파란색!"
"정답이다."
하리를 안고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정말, 이렇게까지 날아올라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높이 날아올랐다.
"와…."
아래에 보이는 감옥의 경비병들은 개미처럼 작아졌다.
"나, 나 내려놓으면 안 된다?!"
하리는 기겁을 하며 내게 꽉 달라붙었다. 지상으로부터 떨어진 그녀는 행여나 내가 자신을 떨어뜨릴까봐 진심으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걱정마라. 장난으로라도 떨어뜨리는 척 하지 않을 것이니."
"그,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하리는 안도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안도감이 금방 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왜냐?
내가 하늘로 날아오름과 동시에 저 멀리서 이상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
'오는 건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고, 반갑기도 하며, 동시에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에서 나는 이 세계의 상황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갸오오오오ㅡㅡㅡㅡ!!
하늘을 뒤흔드는 파공성.
나의 날개를 순간적으로나마 흔들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샤우팅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아니라는 건가."
"호, 혼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다, 당신 좆된 거라고!!"
하리의 눈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사신이 찾아올 거야!"
"사신?"
"그래! 죄를 저지른 자들을 단죄하는 신관 님의 팔부신장 중 한 명! 그 중 가장 속도가 빠르다고 소문난-"
사아악.
우리의 앞에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 거대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은 거의 20m는 넘고, 노출도가 심한 황금 갑옷의 여인은 머리에 매처럼 생긴 투구를 쓴 채, 한손에 칼을 들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죄인을 단죄하겠다.]
"훗."
가루라, 어서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