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4화 〉3부 2장 01 지저제국 가이아나
달그락, 달그락.
짐마차 하나가 조용히 산길을 지나간다. 마부석에 앉은 백색 로브의 청년은 순례길에 오른 신관처럼 묵묵히 고삐를 쥐고 있었다.
"쉿, 온다."
그리고 절벽 위.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작은 체구의 무리들은 복면을 뒤집어 쓴 채 절벽 아래, 협곡을 지나는 짐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 봐봐. 제법 비싸보이는데?"
"멀리서봐도 반짝거리는 걸 봐서는 마력이 깃든 물건이 틀림없어."
"빼앗아서 여왕님께 바치자. 기뻐하실 거야."
철컥.
작은 인영들은 저마다 무기를 집어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정체불명의 기다란 원통이 있었고, 일제히 짐마차를 향해 아래로 겨눴다.
"준비, 조준...."
발사, 라고 외치려던 순간.
[숨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야.]
퍼ㅡ억!
아래에서 뭔가가 날아올라왔다. 그리고 아래로 원통을 겨누던 작은 인영의 턱을 아래에서 올려 치며 제압했다.
"뭐, 뭐야?!"
"독수리?!"
펄럭, 펄럭.
푸른 불꽃의 새는 1m가 넘는 날개를 펄럭이며 좌우를 훑었다. 마치 사냥감이 몇 마리나 되는지 헤아리는 맹수처럼, 불꽃의 새는 수를 파악한 뒤 바로 날개를 접으며 달려들었다.
퍽, 퍼억, 퍽.
새는 날개로 사람들을 후려쳤다. 새보다 절반 정도 더 큰 사람들은 새의 무차별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하나 둘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퉤.
새는 푸른 불꽃을 사람들의 머리에 뱉었다. 나름 풍성한 머리의 정수리에 붙은 불꽃은 동전만한 크기만큼 머리카락을 불태우며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푸쉬이이.
사람들의 몸에서 검보랏빛 아지랑이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딘가 악의에 가득차있는 듯했던 사람들의 눈매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달칵.
새는 원통형의 물건을 발톱으로 붙잡아 아래로 향했다. 아래에 있던 청년은 새로부터 건네받은 원통을 받은 뒤, 이리저리 살피다가 손잡이 같은 곳에 손을 올렸다.
"특이하게 생긴 물건이네. 그런데...아래에 방아쇠가 있다?"
"저기요, 주인님."
짐마차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광막 아래에 있던 금발의 여인은 머리만 빼꼼 내민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위험한 거니까-"
"빵."
콰앙ㅡㅡ!!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원통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황색의 구체가 원통을 따라 날아갔다.
"주인님!"
"위험할 것 같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멍하니 고개를 돌리더니-
"달려!"
고삐를 한 번 크게 당기며 말을 달리게 만들었다. 말도 앞을 바라보며 급히 네 발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왜 쏜 건데요!!"
"대포인 줄 몰랐지!"
"누가봐도 대포잖아요!"
"나는 이런 거 총으로 쏘고 다녔다고! 누가봐도 총 처럼 생겼잖아!"
"총은 주인님 그것같은 물건만한 거구요!"
"어차피 쏘는 건 똑같잖아! 쳇, 무슨 대포를 손으로 들고 쏘게 만들어놨어."
짐마차 뒤에 있던 금발의 메이드의 얼굴에는 절망이 내려앉았다.
"큰일났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황색 구체는 반대쪽 협곡을 향해 떨어지더니, 곧-
콰ㅡㅡㅡㅡ앙!!
강력한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협곡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넓은 협곡이 단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꺄아악! 빨리, 빨리 달려요!"
"정해진 길을 따라가야하는 입장에서 빨리 달리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더군다나...."
청년은 느긋한 얼굴로 마부석에서 두 발로 일어섰다. 고삐가 풀린 백마는 더 빠르게 협곡을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달리는 게 아니잖아. 쟤가 달리는 거지."
"고삐! 고삐!!!"
"괜찮아. 쟤도 창염의 사도야. 이름은 '유니콘'이지. 킨나라 리전폼이라고도 해.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하면 몸에 푸른 불꽃도 피어오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말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요?!"
"농담 아닌데?"
청년은 두 손을 45도로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날개를 펼쳐라, 유니콘!"
펄-럭.
청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니콘이라는 흰 말의 갈기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뭣...?!"
"유니콘은 보통 말이 아니야. 정령이라고."
머리 위로는 푸른 불꽃을 형상화한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등의 양 옆으로는 푸른 불꽃의 날개가 좌우로 펼쳐졌다.
"훗."
청년은 입꼬리를 씩 들어올리며 유니콘을 턱으로 가리켰다.
"암컷이야."
"누가 뭐라고 했어요?! 잠깐만요! 말이 당신의 마력을 품었다는 건...?!"
"넣는데 고생 좀 했지."
"미쳤어!"
금발 메이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말에게 그 짓을 한 거예요?!"
"설마. 인간형일 때 했어. 킨나라보다 살짝 작더라. 아무리 내가 그래도 그렇지, 말에게 그런 짓을 할까봐? 공주님, 상상력이 좀 역겨운데.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잖아!!"
"내가? 억울하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있기는 했는데,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는 안 하지."
청년은 두 팔을 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든 뒤, 그 안을 손가락 두 개로 푹푹 쑤셔넣었다.
"정령에게 마력을 준 것 뿐이라고. 큥큥뾰이는 섹스가 아니야!"
"미친 소리!"
"미쳤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그렇게 말하면 큥큥뾰이 한 유니콘이 상처받는다? 그렇지?"
청년의 말에 유니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유니콘의 입에서 푸른 불꽃이 입에서 뿜어져나왔고, 청년은 유니콘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최소한 준 A급 정도는 되겠다. 역시 나야."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해주세요!"
"너한테 이해하라고 한 말 아니야."
청년은 스스로의 귀를 두드리며 웃었고, 창염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유니콘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협곡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협곡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금방이라도 붕괴에 휘말릴 것 같았다.
협곡 길의 특성상 수많은 커브길을 돌아야하는 짐마차와 직선으로 붕괴되어 무너져내리는 협곡의 속도는 당연히 협곡 쪽이 더 빨랐다.
그만큼 폭발이 엄청 거대했으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네. 협곡이 무너지겠어."
"당연하죠! 폭탄을 터뜨렸으니까!"
"그럼 안 되지. 하리야, 머리 숙여라."
청년은 두 손을 합장하듯 반듯하게 모은 뒤, 눈을 번뜩이며 좌우로 쫙 펼쳤다.
"창염개진!"
청년의 외침과 함께, 유니콘은 협곡을 달리다가 전력으로 직진했다. 길을 크게 꺾어야 할 위치에서 절벽을 향해 달려나가니, 하리는 두려움에 몸이 벌벌 떨렸다.
"뭐하는 거예요!!"
"의심하지 마라."
청년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창염은 신이고, 피닉스는 무적이다."
"그게 무슨-"
달그닥, 달그닥.
유니콘은 하늘을 달리기 시작했다.
짐마차의 바퀴에는 푸른 불꽃이 붙었고, 유니콘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듯 하늘을 달렸다.
"하리야, 잊지마라. 창염의 사도는 기본적으로 비행타입이 붙는다는 것을. 샐러맨더도 호버크래프트 하는 식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 하하...."
금발 메이드는 짐마차 안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도대체...."
"뭐냐니."
청년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창염의 피닉스지."
펄-럭.
푸른 불꽃을 몸에 두른 유니콘은 날개를 펄럭이며 협곡을 빠져나왔다.
* * *
[3시간 전, 현실.]
지하 왕국 가이아나.
땅속성 신, '대지모신'의 권역인 이 땅은 현실 지구의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다.
지상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는 밀림의 세계이며, 지하에는 땅의 권속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게 맞아?"
나는 하리로부터 정리한 정보를 가지고 신라와 교차 검증에 나섰다.
"정말로 인간은 지저에 살고 있고, 짐승들이나 정령들은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거야?"
"네, 맞아요. 지륜의 땅에 사는 인간들은 전부 지하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괴인이 되었을 때는 모두 지저괴인이 되어버렸죠."
"조금 충격적인데."
"테라는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정령이 세계의 주인이니까요."
빛이국, 비슈니아 왕국도 상대적으로 인간들이 주축이 된 국가다. 하지만 그들은 태양빛을 받으며 살아가지, 태양으로부터 숨어 지하에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인간들이 지하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도 아니예요. 가이아나는 지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문명이 가장 발달한 곳이니까요."
"문명?"
"음...지구 판타지 적으로 이야기하자면...드워프의 국가?"
"아, 한 방에 이해했어."
가이아나는 드워프의 나라였다.
"20년의 테라에서 그렇게 연구하던 마법공학 있잖아요? 이게 사실은 가이아나 왕국에서 온 거거든요. 진짜로. 코어웨폰도 그렇고 마력을 이용한 무기를 만드는 거라든가 기계를 다루는 거라든가, 그런 것들이 전부 가이아나와 관련이 깊어요."
신라는 아프리카 지도를 두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흔히들 그렇잖아요. 아프리카 지하에 로봇제국이 있더라!"
"20년의 테라에서는 괴인 제국이었지. 여기서는 그러면 인간제국이야?"
"그런 셈이죠. 지상의 짐승과 지하의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갈랐어요. 땅을 경계로 인간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죠. 그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다들 키가 작아요. 음...."
신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 세계에서의 모습이 아닌, '창염' 시절의 150cm 전후 되는 체구로 자신의 비율을 줄였다.
"아마 거기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이 정도 될 거예요."
"그럴 리가. 히드라가 거의 172cm 정도 되는 장신이었는데?"
"히드라는 간부잖아요. 간부가 뭐겠어요? 정령을 타락시킨 거잖아요. 자신이 대지모신이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세뇌를 한 거겠죠."
신라는 내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당신이 실은 풀발 3cm였다면? 피닉스로 타락하기 전의 당신은 그런 존재였다면? 그걸 믿고 싶겠어요? 알고 있어도 부정할 걸요?"
"당연하지. 차라리 타락하고 18cm로 살겠어."
"18? ...푸흐흐, 요즘 사이즈 안 잰지 꽤 오래 되셨나보네. 괜찮아요. 당신 사이즈는 제가 여기로 매일 측정하고 있으니까요."
어?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나 지금 엄청 중요한 걸 들은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큥큥하고, 히드라랑 가이아나 왕국 사람들의 차이로 돌아가서."
신라는 자신의 몸을 마음껏 늘였다 줄였다.
"간부는 정령의 워너비 같은 거잖아요? 지륜도 그랬을 거예요. 가이아나의 사람들은 전부 체형이 작았으니까, 자기가 체형이 커지고 싶었던 거죠."
"뭐...라고...."
"그래요. 생각해봐요."
신라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륜이나 히드라나 둘다 자지 사이즈를 가지고 대립했지, 쇼타라는 건 똑같았잖아요."
"......."
"히드라가 왜 거근쇼타를 원했는지 알아요? 그런 존재는 현실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히드라의 세뇌도 쉽게 풀리지 않겠죠."
지저제국 가이아나.
우리는 이 나라에 대하여, '페도의 나라'라고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