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4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1
언젠가 꿈을 꾸었다.
청발의 소녀와 함께 옥상에서 석양이 지는 광경을 함께 바라보는 꿈. 그 속에서 소녀는 내게 말했다.
- 언젠가 당신은 선택하게 될 거예요. 나를 죽여서 세계를 구하거나, 나를 살려서 세계를 멸망시키거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나도 애처로웠다는 것만은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소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 *
<2025년 1월 1일 오전 10시. LA 국제공항.>
[올해의 최강 히어로는 누구일까요? 랭킹 1위는 바로...원탁의 기사, <가웨인 경>입니다! 세계 최초로 SS 랭크에 오른 그는 2022년에 열린 '맨체스터 게이트'에서 SS 랭크로 각성한 이후로...지직...지직....]
"뭐야, 이거 왜 이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청년은 귀를 덮은 금발을 손으로 헤쳐,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고장일까 슬쩍 확인해봤지만 별다른 손상은 없었다.
"아, 늘어졌구나."
청년은 늘어진 선을 만지작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마도구(魔道具)와는 달리, 청년이 쓰는 이어폰은 고전적인 디자인의 유선 이어폰이었다.
"이제 이거 단종인데...."
청년은 왼쪽 손목 시계처럼 찬 마도기어의 액정을 눌렀다. 청년의 지문을 인식한 마도기어는 곧 내부 코어에 내장된 마력을 움직여 허공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띄웠다.
약 13인치 정도의 평면 디스플레이는 마도기어의 마력에 의해 허공에 실체화하여 청년의 눈앞에 멈추었다. 청년은 그것을 태블릿 다루듯 터치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조작했다. 근처에 레트로 전자상가가 있을까 검색해봤지만, 죄다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제품들 밖에 없었다.
"어, 있다."
청년은 공항 근처의 골동품 상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자율주행차량을 불러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비행기 시간까지 안 될 것 같은데."
"뭘 그렇게 혼자 중얼중얼 거려? 옆에 누구 있어?"
청년의 옆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소년이 다가와 물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은 풍선껌을 불며 슬쩍 청년의 스크린을 흘겼다. 모자 아래 튀어나온 소년의 머리칼은 탈색이라도 된듯한 적회색이었다.
"유성(流星)? 한국 기업 거네? 되게 특이한 거 쓰는구나."
"쓰다보니까 익숙해져서."
청년은 스크린을 손으로 내렸다. 고착화된 마력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소년이 불었던 풍선껌도 함께 터졌다.
"코리안 타운 제집처럼 드나들던 이유가 있었네. 한식에만 미쳐있는 줄 알았는데 제품도 한국 거 쓰고 말이야. 그게 차석의 비결인가? 이게말로만 듣던 김치 파워?"
"전혀 관계가 없는 거 알잖아?"
청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어폰을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에 소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왜 그걸 안 버리고 챙겨? 야, 이 앞에 널린 게 면세점이야. 내가 사줄게."
"됐어. 아직 쓸만하니까 괜찮아. 한국까지 굳이 이어폰 없어도 되고."
청년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의 시간을 확인했다. LA의 국제공항에서 부산의 김해공항까지 직항으로 걸리는 약 12시간. 청년은 하루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하늘 위에서 보내야 했다.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있지 않을까?"
"하루에 두 시간 자면서 괴수나 히어로 분석하는 놈이 잘도 그러겠다. 야, 그냥 내 전용기 부를게. 내가 태워준다니까?"
청년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확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은 호의를 거절하는 청년의 완고한 태도에 혀를 찼다.
"얜 도와준 데도 싫다고 하네. 야, 너 '신서울'갈 거잖아. 내가 전용기 띄우면 '아이고, 오라클님 오셨어요'하고 넙죽 공항 문 열어줄걸?"
"괜찮아. 신경 써주는 건 고마운데, 나도 그냥 느긋하게 가고 싶어서 그래."
완곡하면서도 확실한 거절에 적회색 머리칼의 소년, <오라클>은 두 손을 들었다. 청년의 고집은 웬만해서는 꺾기가 어려웠다.
"네, 네. 좋으실 대로 하세요. 대신 이건 받아가라."
오라클이 제 마도기어를 조작해 지폐 모양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청년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덮자, 오라클은 눈을 반쯤 감고는 청년을 노려봤다.
"너 이것까지 거부하면 내가 비행기 결항시킨다?"
"...너무한 거 아냐? 위약금만 억 단위는 훌쩍 넘어갈텐데."
"물려주지 뭐, 나 돈 많아."
오라클의 시위에 청년은 질린 얼굴로 왼손을 내밀었다. 오라클은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지폐를 청년의 마도기어에 튕겼고, 곧 지폐를 구성하던 마력은 청년의 마도기어로 스며들었다.
[<오라클>님으로부터 5만 달러가 입금되었습니다.]
제 마도기어의 알람에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적지인 한국의 원화로 환전하면 대략 5천만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야, 야! 이건 너무 많잖아?!"
"B급 코어 하나 값인데 뭘. 던전 하나 제대로 털면 5만 달러는 커녕 500만 달러도 금방이에요, 이 양반아. 너 지난번에 던전 공략 지원 나갔던 거 보수는 어디에 썼냐? 2만 달러 정도 된다며."
청년의 고개가 창밖을 향했다. 오라클은 금방 청년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 깨닫고 화를 냈다.
"야! 내가 너 재료 사는데 돈 막 쓰지 말랬지?!"
"...아니, 협회를 막 지나가는데 D급 히어로 한 분이 애걸복걸하면서판매하더라고. 이거 팔아야 오늘 할당량 채운다면서. 솔직히 이무기 이빨이면 하나에 탄환이 몇 개냐? 이득이야, 이득."
청년은 머쓱한 얼굴로 제 뒷덜미를 쓸었다. 오라클은 가슴을 탕탕 치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야 이 등신아! 너 내가 길드 재료 그냥 갖다 쓰라고 했지!? 그 사람이 진짜 D급이겠냐?! 너 누군지 알고 후려치려고 한 거 아냐?!"
"......확인해볼게."
청년은 무안한 얼굴로 스크린을 띄웠다. 이무기의 이빨을 판매한 히어로는 새롭게 맞춘 제 장비를 SNS에 자랑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청년은 오라클에 이 보라는 듯 헤실거렸다.
"세상이 아직은 그렇게 흉흉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 그렇게 다 퍼줘라. 젠장. 어쩌다 이런 놈이랑 친구 먹어서...."
오라클은 답답함에 의자에 퍼질러 앉았다. 곧 청년이 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청년은 옆의 캐리어를 끌며 오라클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다."
"어휴. 알겠어. 일단 가서 연락해라. 까먹지 말고."
청년과 오라클은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악연으로 시작한 인연은 어느새 둘도 없는 지음이 되어, 이렇게 이별을 눈앞에 두고 왠지 발걸음을 떼기 어려워졌다. 오라클이 청년의 손을 꾹 붙잡았다.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되냐? 거기 가봐야 너 아는 사람도 이제 없잖아."
"그렇지. 다 돌아가셨으니."
"야. 그냥 여기 뿌리내리고 살아. 나 말고도 너 지원해 줄 사람 차고 넘친다고. 너만한 인재가 왜 그런 곳에 가서 생고생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향수병이라는게 참 무시하지 못하겠더라고."
청년은 오라클의 손을 다른 손으로 툭툭 치며 꽉 잡았다. 오라클은 그게 청년의 완곡한 거절임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라. 가. 혹시나 너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이렇게 대답해. '김치 좋아요, 불고기 좋아요, 사랑해요 연예가 섹션'. 알겠냐?"
"왜 이렇게 잘 알아? 혹시 당했어?"
"나 말고 내 전 직장 동료가."
"......내가 다 미안하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으로 둘은 대화를 끝맺었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탑승 수속을 마감할 시간에 이르렀다.
"잘 가라."
"너도 몸 조리 잘 해. 괜히 무리하게 '관측'하려고 하지 말고."
오라클은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청년은 웃으며 제 콧잔등 위에 걸린 안경테를 중지로 고쳐올리며 화답했다. 오라클이 투덜투덜거리며 대합실에서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조용히 탑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년만에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청년은 제 티켓을 다시금 확인했다. 대한민국. 부산. 김해공항. 현재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 가능한 '유일'한 국제공항.
"가는 동안 신서울 가는 버스나 알아봐야겠다."
청년은 낡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사람들의 뒤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여전히 소리는 지직거렸다.
* * *
<2025년 1월 2일 오후 6시, 부산 김해공항.>
비행기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혹시나 비행형 괴수라도 습격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기우에 그쳤고, 사람들은 재빨리 제 짐을 챙겨 목적지로 사라졌다. 단 한 명, 금발 벽안의 청년을 제외하고.
"Um...Mr.Hibi...scus...?"
안내데스크의 안내원이 여권의 성을 보며 답하다 목소리에 의문이 실렸다. 사람 성이 '히비스커스?' 안내원은 순간적으로 여권으로 장난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스크를 벗었다. 여권처럼 전형적인 히스패닉계의 얼굴형의 청년은 안내원이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제법 외모가 출중했다. 안내원이 마음을 가다듬고 직접 영어로 말하려던 찰나, 청년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
안내원은 여권상의 이름을 확인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Cyan.W.Hibiscus. 독특하고 특이하다 못해 괴이쩍기까지 한 이름이었지만, 안내원은 애써 그 티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시안 고객님. 확인 결과 고객님과 똑같은 캐리어를 가지고 탑승하신 다른 고객님이 캐리어를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어쩐지."
시안은 제 앞에 늘어진 참상에 눈을 가렸다. 캐리어 안에 얼마나 옷을 많이 쑤셔넣었는지 공항 보안요원이 캐리어를 열자마자 폭발하듯 옷이 쏟아졌고, 그 중에는 분명히 시안의 것이 아닌 여성용 속옷도 섞여있었다.
그 덕분에 시안은 공항 보안요원에게 잡혀와 취조를 받듯 심문당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 변태 아닙니다."
"아뇨, 설마요."
시안은 자신이 변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제 결백을 주장했다. 다행히 공항에서는 빠르게 상황을 인지하고 항공사와 연락을 취해 문제를 파악했다.
"다행히 다른 고객님도 캐리어를 잘못 가져가셨다는 걸 아시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이 캐리어의 주인 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시안의 말에 직원들은 난색을 표했다. 나름 캐리어 싸기의 전문가를 자처하던 직원도 미믹처럼 옷을 뱉어낸 캐리어를 다시 닫는데 어려움을 겼었다.
"어떻게 캐리어 두 개 분량을 하나에다 욱여넣었을까요?"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아, 저기 오십니다."
직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갈색 단발의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등에배낭을 메고 회색 캐리어를 끌고 오는 여인은 갓 성인을 넘긴 듯 상당히 어려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단발 여인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시안의 앞에 멈춰 섰다. 토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시안이 오히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고 시안과 열린 제 캐리어를 번갈아 보더니-
"I'm SORRY---!!!"
공항이 떠나가라 사과를 외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릴 지경이었다. 시안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고, 공항 직원들은 이 촌극에 킥킥 대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허리를 편 여인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Um...I'm Lee Yuna.... Nice to meet.... 아, 이게 아닌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지 여학생은 애써 저 스스로 말을 하려고 애를 쓰다가,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제 마도기어를 조작했다. 시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키고 자기를 '이유나'라 소개한 것에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이유나 씨. 저는 그 캐리어 주인 시안이라고 합니다."
"한국말...하실 줄 아시네요?"
"한국인이니까요."
거짓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수군거렸다.
시안이라는 청년의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형이었고, 무엇보다 선명한 금발 벽안은 한국인에게서 볼 수 없는 색채였다. 시안은 난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유나는 자신이 잘못 가져간 캐리어를 시안에게 내밀려다가 사색이 되었다. 시안은 제 캐리어의 비밀번호가 맞춰진 것에 놀라 흠칫거렸다.
"어떻게?"
"...저도 1225쓰거든요."
유나는 손가락으로 입이 터진 제 캐리어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시안은 눈앞의 소녀가 어떻게 공항에서 연락을 하기도 전에 캐리어를 잘못 챙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시안이 허리를 숙여 유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범죄자를 엄하게 추궁하는 형사의 눈빛이었다.
"안의 내용물...보셨군요?"
"그...네. 저, 저기...."
쭈볏대는 유나의 행동에 옆에 있던 보안 요원이 위화감을 느꼈다. 캐리어의 외형과 색깔이 똑같아 흔치는 않지만 으레 있을 수 있다 싶은 헤프닝일 뿐인데, 저 유나라는 소녀는 과도하게 동요한 기색이 엿보였다.
자연히 그 시선이 남자의 캐리어로 이어졌다. 보안 요원은 양해를 구하고 시안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 더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실례입니다."
단호한 시안의 거절에 보안 요원은 오히려 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보안 요원의 시선이 유나에게로 향했다.
"이 분의 짐에서 뭔가 특이한 거라도 있었습니까?"
"이보세요. 실례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시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음에도 보안 요원의 고집은 확고했다. 둘 사이에 끼여 새우등이 터지게 생긴 유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애애애애앵-------!
고막을 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모두의 마도기어에서 경보가 시끄럽게 울렸다. 공항 경비대들이 황급히 무기를 챙겨 일어나고, 대합실의 승객들이 혼란에 빠졌다.
"뭐, 뭐야?!"
"괴수경보?!"
유나가 당황하면서도 제 캐리어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뻗은 손목이 시안에게 붙잡혔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시안은 제 코트 안으로 유나를 끌어안아 몸을 숙였다.
끼에에에에엑!!!
거대한 괴조가 유리창을 부수며 대합실을 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