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5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2
후드득. 시안은 코트를 한 차례 크게 털었다. 유리창이 깨지며 흩어진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사람들을 덮쳤지만, 유나를 향해 날아오던 것들은 시안의 코트에 막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꿀꺽. 이유나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만약 이 남자가 괴수의 습격에 먼저 반응해 유나의 팔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유나는 전신에 유리 조각이 박혔을지도 모른다.
"저기-"
"조용."
유나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시안은 유나의 어깨를 짓누르며 자세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시안을 따라 몸을 숙인 유나는 대합실 천장을 날아다니는 괴조를 보며 숨을 참았다.
"아르겐타비스...!"
유나는 한눈에 괴조의 정체를 파악했다.
좌우로 펼친 날개가 10m에 달하는 저 B급 괴수-<아르겐타비스>는 움직이는 먹잇감을 먼저 추적하여 사냥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이 대합실 전체가 괴조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기에,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괴조의 습격을 먼저 받을 수 있다.
이 남자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을까. 유나가 고개를 올린 순간, 남자의 목에 흐르는 피를 보고 기겁을 했다.
"사, 상처가?!"
"...포션 바르면 나아요. 지금은 조용히."
유나는 손을 뻗어 상처를 당장에라도 치료하고 싶었지만, 괜히 마력을 일으켰다가 괴조의 이목을 끌 수는 없었다. 고작 유리 파편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아, 남자는 무능력자였다.
끼에에에엑!!
아르겐타비스는 천장을 원형으로 돌며 괴성을 질렀다. 대합실에 있던 이들 모두가 겁에 질렸다. 누군가는 무작정 도망치고, 누군가는 의자 아래로 숨고, 극히 일부는 괴조의 습성을 깨닫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어떤 행동을 취하든 괴조 자체를 없애지 않는 이상, 이 대합실의 모든 인간은 괴조의 사냥감이었다.
유나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오히려 시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히, 히어로가 곧 올 거예요. 김해공항에는 항상 상주하는 경비대와 히어로가 있으니까-"
"기다려 줄 생각이 없네요, 저 괴수는."
시안이 혀를 차며 유나를 일으켜세웠다. 손목이 잡아당겨져 시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유나는 시안의 이어진 말에 숨을 헛들이켰다.
"날갯죽지에 칼이 박혔어요. 곧 힘을 잃고 떨어질 듯."
칼? 유나는 고개를 들어 괴조의 등을 노려봤다.
마력으로 강화된 안력으로 관찰한 아르겐타비스는 날갯짓이 좌우가 불균형했고, 기울어진 오른쪽 날갯죽지에 괴수 사냥용 단검이 박혀있었다.
'그러고보니 근처에서 레이드가...!'
그제서야 유나는 저 괴조가 공항을 습격한 이유를 깨달았다. 사냥 도중에 놓친 괴수가 눈에 뵈는 것도 없이 무작정 공항으로 날아온 것이다. 저보다 훨씬 강한 히어로가 공항에서 제기척을 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지금 저 괴수는...."
"'폭주'상태. 뛰죠."
키에에에에에엑!!
천장에 크게 부딪힌 괴조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 * *
<5분 전.>
"B급 괴수 <아르겐타비스>가 근처에?! 무슨 소리야?!"
"모르겠습니다. ...이리로 옵니다!"
와장창! CCTV 영상 속에는 벽의 유리창이 깨어지며 거대한 몸집의 괴조(怪鳥) 한 마리가 대합실을 습격한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공항 경비대에 소속된 이능력자들이 황급히 장구를 챙겨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 멀대! 얼타지 말고 당장 따라와!"
"네, 네!"
경비대 제복 차림의 장신 여인은 모자를 눌러쓰며 선배들을 따라 장비를 챙겼다. 묵직한 창대를 쥔 손이 저도 모르게 벌벌 떨렸지만, 여인은 공포를 꾹 참으며 대합실로 달렸다.
"꺄아아악?!"
"살려줘!"
대합실로 향하는 통로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공항 직원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사이, 경비대원들은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피해 가까스로 대합실에 도착했다.
끼아아아아아악!!
괴조는 비명을 지르며 천장을 빙빙 돌고 있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듯 중간중간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다시 날개를 펼쳐 탈출할 곳을 찾는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여인은 고개를 올려 본능적으로 괴조의 상태를 파악했다.
"저건...?"
날갯짓의 밸런스가 맞지 않다고 느낀 순간, 여인은 괴조의 날갯죽지에 박힌 작은 단검을 파악했다.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전류를 뿜어내는 대괴수용 사냥 장비가 분명했다. 여인이 다급히 보고했다.
"오른쪽 날개 끝에 단검이 박혀있습니다! 사냥꾼들이 쓰는 그 거!"
"뭐?! 너는 어떻게 그걸, 아! 위험해?!"
괴조는 천장에 부딪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듯 건물이 흔들리고, 괴조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키야아아악?!
바닥에는 괴조를 미치게 만든 단검이 망가진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온 벽에 몸을 부딪히며 단검을 빼낸 괴조는 눈에 핏발이 선 채 제 분노를 풀어낼 대상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
아주 가까이,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남자가 지닌 마력은 형편없었지만, 그 코트 아래에 숨긴 소녀에게서는 맛있고 정순한 마력의 냄새가 흘렀다.
캬아아악!!
먹잇감이 도망친다. 괴조는 날 생각도 없이 대합실 바닥을 달리며 부리를 쩍 벌렸다.
"위험...?!"
여인은 제 창대를 들고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발이 얼어붙은 것 마냥 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D급의 이능력자로 구성된 경비대원들이 B급 괴수에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그들로는 부족했다. 더 강한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영웅은언제나 그런 위기에 나타나는 법이었다.
부우웅--!
괴조가 깨뜨린 유리창 사이로 녹색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옥색의 전투 슈트를 착용한 남자는 전신에 마력으로 된 바람을 두르며 공중에 멈춰 섰다.
"안심하십시오! 저 <풍마>가 도착했-"
"꺄아아악!!"
앳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괴조는 어느새 코트의 남자를 십 수 미터 거리만 남겨두었고, 남자의 옆에는 넘어진 단발의 여인이 있었다.
"이런!"
풍마는 혀를 차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지금 날아가도 막기에는 늦었다. 그렇다면 이 거리에서 괴조를 일격에 쓰러뜨릴 방법이 필요했고, 다행히 풍마에게는 그런 기술이 있었다.
"흐아아!"
기합과 함께 오른 주먹에 바람이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풍마는 오른팔을 한껏 뒤로 당기고는 바깥으로 크게 휘둘렀다.
쿠아아아아! 세찬 질풍이 용오름처럼 풍마의 주먹에서 쏘아졌다.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는 질풍은 괴조를 향해 휘어지며 날아갔다.
캬아아악!
괴조는 제 뒤에서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군침 도는 냄새가 나는 인간을 잡아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땅을 크게 박찼다. 쩍 벌어진 부리가 사람 하나는 충분히 삼킬 것처럼 벌어졌다.
"안 돼...!"
경비대 여인은 어떻게든 몸안의 마력을 일으켜 자리를 박차고 뛰려 했으나, 여전히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든 발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
□□□□--!!
거대한 폭음과 함께 녹색 빛이 번쩍였다. 섬광탄이라도 터진듯 시야가 온통 새하얘졌다. 귀는 이명이라도 온 듯 삐---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툭. 경비대 여인의 발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겨우 시력이 돌아온 여인은 제 경비대 제화 앞에 떨어진 것을 보며 숨을 참았다.
폭사한 괴조의 시체였다.
* * *
"아."
넘어지며 다리가 삔 소녀, 이유나는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괴조 너머로 풍마가 쏜 질풍이 괴조의 뒤를 쫓는 것도 보였지만, 아무리봐도 괴조의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 잡아먹힌다. 유나는 제 죽음을 직감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락. 시야가 가려지며, 코트 안의 안감이 드러났다.
제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며 달리던 남자-시안은 홀로 도망가지 않고, 넘어진 유나에게 달려와 코트로 유나를 보호하듯 앞을 가렸다. 유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도망-"
철컥. 격철이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코트 아래에서 은색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총? 권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그 은색의 총구는 괴조를 향해 겨눠졌다. 유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시안에게 돌아갔고, 시안은 슬며시웃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귀 막고, 비밀 지켜요."
키에에에에에엑!!
괴조의 부리가 코트를 삼키기 직전, 시안은 방아쇠를 당겼다. 유나는 교본대로 귀를 손으로 막고 외이도를 마력으로 채웠다.
□□□□□!!
우레같은 폭음과 함께 총구가 녹색 빛을 뿜었다.
두꺼운 총열 사이로 터져나간 마탄은 유나가 시안의 캐리어에서 보았던 여섯 탄환과는 다른 녹색이었다. 탄환은 코트에 구멍을 뚫으며 괴조의 부리 안으로 쏘아졌고, 탄환은 목젖에 닿는 순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코트 구멍 사이, 괴조가 터져나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유나는 후속으로 도착한 풍마의 질풍에 잘게 갈려나가는 괴조의 사체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새까맣게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쉿."
유나는 의식을 잃었다. 시안은 총기를 코트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는 유나를 재빨리 부축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사람들은 괴조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풍마 또한 제 일격에 죽어버린 아르겐타비스에 당황했지만, 곧 목에 마력을 실어 크게 소리쳤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제가 괴수를 쓰러뜨렸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환호와 갈채를 풍마에게 보냈다. 공항 경비대가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하고 괴수의 사체를 정리했다.
"괜찮으십니까?!"
풍마가 바닥으로 내려와 괴수의 지척에 있던 이들을 살폈다. 금발 외국인이 갈색 단발의 여인을 부축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시안은 자신을 애매하게 바라보는 풍마의 시선에 곧장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두 시간 뒤.
이유나를 의무실로 보낸 시안은 공항 경비대가 보는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괴수가 달려들면서 그저 그 아가씨를 구해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능력자도 아니신 분이 어떻게 그런 용감한 행동을 하셨습니까?"
시안은 제 목에 감긴 붕대를 손으로 쓸었다. 앞에 마주앉아있던 기자는 감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몸이 아카데미 후보생을 구하러 갔다, 크으.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혹시 괴수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보셨습니까?"
"이봐요! 내가 죽였다니까! 내 '풍권'에 괴수가 터져나간 거 몰라요?!"
옆에 있던 <풍마>, 김규민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전공(戰功)을 자랑했다.
분명 A급 히어로로서 B급 괴조를 일격에 쓰러뜨린 그 위용은 높이 살만 했으나, 기자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기자가 알기에 풍마에게는 아르겐타비스를 한 번에 '터뜨릴만한' 공격력은 없었다.
기자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풍마님 덕분에 괴수가 쓰러졌죠. 혹시 어떻게 아르겐타비스가 죽었는지 보셨나요?"
괴조를 중심으로 터진 녹색빛의 마력 때문에 모두가 눈을 감았다. 영상 장비들도 그 섬광에 먹통이 되어버렸고, 결국 산산조각이 난 괴수의 사체만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유일하게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던 풍마는 제 전과를 자랑하고 있으니, 진실을 알고 있을법한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서 있던 시안뿐이었다. 유나는 아직 기절해 의식을 찾지 못했다.
시안은 난처한 미소로 기자의 마이크를 손으로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 풍마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히어로님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흐, 흥! 귀중한 한국의 예비 히어로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하지. 하지만 명심해! 앞으로 이런 요행이 계속될 리가 없다는 걸! 힘없이 나서는 건 오만이고 만용이야!"
"당연하죠. 뼈에 새기겠습니다. 기절한 그 아가씨도 풍마님께 진심으로 고마워할 겁니다."
시안은 풍마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겨우 기자들 속에서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풍마에게로 돌아갔고, 시안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네, 여행 왔습니다. 불고기 좋아해요, 김치 맛있어요. 한국어는 친구가 가르쳐줬어요."
입국 심사처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앵무새처럼 모범 답안을 답하니, 이제 시안에게 관심을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안은 재빨리 인파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보안 요원들과 경비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괴수의 사체를 한군데 모으고 있었다. 난리통에 벽에 굴러간 제 캐리어를 챙긴 시안은 은근슬쩍 코트 안에 숨겨둔 물건을 꺼내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조작했다.
철컥. 위이잉. 캐리어 안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계 움직이는 소리에, 시안은 몸으로 제 캐리어를 가리며 전전긍긍했다. 혹시 누가 보고 있지 않을까. 시안은 슬쩍 제 코트 안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저기, 잠시만!"
사체를 정리중이던 여성이 황급히 달려와 시안을 불렀다. 시안은 손을 빼내어 캐리어를 닫은 뒤, 황급히 비밀번호를 바꾸며 표정을 바꾸었다.
"또 뭔가 절차가 남았나요? 이미 제 신원조회는 끝난 걸로 알고있습니다만."
"그보다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시안은 눈썹을 으쓱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제 가슴팍의 명찰로 내려가는 시안의 시선에 여성은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제 소개를 했다.
"김해공항 공항 경비대 제 3팀 소속, D등급 요원 박라온이라고 합니다. 잠시 협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협조 말입니까? 아르겐타비스에 대한 건 이미 다른 경비대 분들 앞에서 진술했고, 캐리어가 바뀐 것은 그 학생이 착각해서 잘못 가져간-"
"아뇨. 그 캐리어 때문에 그럽니다."
시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라온의 눈이 번뜩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시 그 캐리어 안에 밀수품을 반입하셨습니까?"
시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