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77화 (877/1,497)

EP.877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4

"반가워요. <오월>의 법률관리고문이자 현재 길드의 총책임자를 맡고 있는 <세이렌> 김상아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검은 정장을 입은 뿔테 안경의 여성, 김상아는 옆에 있는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회색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김상아를 손으로 제지하고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소개는 내가 직접하지. 반갑습니다. 오월에 파견나온 <중화>의 지사장, 류 요호라고 합니다."

오월 측의 인사가 끝나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던 누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눈으로는 슬쩍 옆에 흐뭇한 미소로 앉아있는 도윤과 서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리. 나이는 열아홉이고요...."

쑥스러운듯 쭈볏거리는 누리의 행동에 도윤이 무안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사장님. 아이가 이능력을 자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자리가 익숙치 않습니다."

"아하하! 괜찮습니다.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니 확실히 어려보이는구려. 암. 아직 한창 즐길 나이지. ...옆에 있는 서양분은 누리 양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어른 넷의 날카로운 시선이 금발벽안의 서양남, 시안에게 꽂혔다. 시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누리의 손을 잡으며 당당히 말했다.

"썸남입니다."

"...그게 뭔가?"

류 지부장은 슬며시 옆에 앉아있던 김상아에게 질문했다. 김상아는 지부장을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시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사귀는 사이시라고요?"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닙니다. 누리 부모님께서 교제를 허락하시지 않으셨거든요."

시안은 당당한 얼굴로 도윤과 시선을 맞부딪혔고, 서향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손이 잡힌 누리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황을 파악한 류 지부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허허, 청춘이야."

"지부장님.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이봐요, 시안이라고 했나요? 누리 양에게 설명을 들으셨나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네. 압니다. 오월을 통해 우리 누리를 육성하려고 지금 계약을 하자 하시는 것 아닙니까."

시안은 다소 안하무인이라고 할 정도로 도윤과 서향을 무시했다. 그에 류 지부장은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양인이 무례한 경우가 있다고는 익히 들었으나, 이건 좀 경우가 없군. 자네는 대체 누군가? 누리 양과 평생의 반려라면 모를까, 이런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 그리 경솔하게 누리 양의 결정을 강요할 수 있는가?"

"맞습니다. 저는 누리의 결정을 존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누리가 오월, 그 뒤의 중화를 선택한다면 저를 버리겠지요."

시안은 거만한 얼굴로 몸을 뒤로 눕혔다.

"그럼 어디 한 번 봐봅시다. 오월, 중화에서 어떤 계약으로 누리를 중국으로 데려가려 하는지."

"...건방진."

류 지부장이 혀를 찼다. 김상아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시안의 앞에 계약서 종이를 들이밀었다.

"이게 지금 저희가 누리 양에게 제시할 계약 조건이에요."

시안은 계약서 종이를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어디보자. C급 기준으로 주급 천만원? 연봉이면 대충 5억이네요?"

"그뿐만 아니지."

류 지부장이 계약서 아래 조항들을 가리키며 시안을 비웃었다.

"길드 내 모든 자원을 무상으로 활용 가능하며, 별도의 품위 유지비도 나갈 것이다. 각지의 던전을 순회할 수 있도록 전용기가 붙을 것이며, 누리 양에게는 SS급으로의 성장을 위한 모든 영약과 자원을 할애할 것이다. 물론 던전을 공략한 모든 부산물은 누리 양에게 주어질 것이지."

"한화로 치면 연간 약 50억에 달하는 지원팀이 무상으로 붙을 겁니다."

옆에서 계약서를 함께 보던 누리는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시안은 심드렁한 얼굴로 계약서를 내리다 놀라운 문구를 발견했다.

"상기 조건은 마력 등급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배로 지급? 와, 미쳤네 진짜. 상도덕도 없어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장래 SS급 암속성 이능력자를 영입하려면 이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나. 껄껄. 그런데 말이야, 왜 자꾸 자네가 계약을 주도하는겐가?"

류 지부장은 시안의 옆에 앉은 누리를 가리켰다. 누리는 이상하게 주눅들어있었다.

"자네가 누리 양 보호자라도 되는 양 행세를 하는데, 누리 양의 보호자는 이분들일세."

"배우자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시라면서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누리 양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거죠?"

류 지부장과 김상아는 시안을 쏘아붙였다. 시안은 누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건물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일단 여러가지로 지적하고 싶지만 말이야."

시안은 코트 안주머니에 오른손을 집어넣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기치려면 목소리에 마력부터 빼."

"뭣-"

김상아가 놀라 마력을 일으키기도 전에, 시안이 꺼낸 총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앙!

뇌성이 울렸다.

* * *

"벌써?"

유나는 사무실 유리창을 깨뜨리는 천둥에 화들짝 놀랐다.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짜고짜 신호를 보낸단 말인가. 유나는 재빨리 창문을 내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둘에게 소리쳤다.

"라온 언니! 누리야!"

"씨바!"

누리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자리를 잡았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불안한 예상은 실제 상황이 되었고, 이제 진짜로 부모를 구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라온이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신체를 강화했다.

"옵니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며 중년의 부부가 사무실에서 밖으로 내던져졌다. 정신을 잃기라도 한 듯 두 부부는 지상을 향해 낙하하면서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누리 양!"

"알아!"

라온이 도윤을, 누리가 서향을 향해 달려가 자세를 잡았다. 쿵! 두 부부는 밖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라온과 누리의 품에 안착했고, 둘은 의식을 잃은 부부가 다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탑차의 뒤로 달렸다.

"엄마...!"

누리는 기절한 서향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분노를 할 새도 없이, 다시 유리창이 깨지며 두 남녀가 사무실에서 뛰어내렸다.

"가온 씨!"

"알았어!"

누리, 아니 교복으로 누리를 변장했던 가온이 마력을 끌어올려 낙하지점에 물로 된 쿠션을 만들었다. 시안과 가온은 그대로 물침대에 떨어져 바닥을 구른 뒤, 차를 향해 달렸다.

캬아아악!!

사무실의 깨진 유리창. 붉은 불꽃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는 인영에 유나가 숨이 멎었다. 시안이 쏜 화속성 탄환에 불에 타들어가는 이는 분명 부부를 납치하려던 길드의 일원이 틀림없었다.

촤락! 거대한 물줄기가 불에 타는 이의 몸에 쏟아졌다. 손에서 물을 뿜어낸 남자는 악귀같은 얼굴로 창틀을 짚고 사무실에서 뛰어내렸다.

"쓰레기 같은 놈!"

쿵! 아스팔트 도로가 주저앉았다. 남자의 눈에는 보라색과 회색이 섞여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끈질기네. 정말."

아직 차에 오르지 못한 시안이 총의 덮개를 열었다. 매케한 연기를 피우며 사무실을 불지른 화속성 탄환은 희게 열화되어있었다. 시안은 그 탄환을 빼내어 코트 주머니 안에 챙겼다.

"그냥 쿨하게 보내주면 안 되냐?"

"어떻게 알았지?"

"뭘?"

"어떻게 우리의 의도를 알았느냔 말이다!!"

남자, 류 지부장은 악을 쓰며 성질을 부렸다. 시안은 잠시 조수석 쪽을 쳐다봤다가 두 손을 들었다.

"좋아. 그게 그렇게 궁금해? 대답해줄게."

시안은 왼손으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우선 첫번째. 사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근데 누리가 계속 불안하다는 거야. 그래서 누리한테 점수 좀 따려고 오버했지. 이게 오기 전까지는."

시안은 오른손에 든 총은 류 지부장을 향해 겨누고, 왼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흔들었다.

"누리 어머니인 이서향 씨랑은 이미 한 번 통화를 했단 말이야. 거기서 잠깐 수신호를 주고 받은 적이 있어요. 직접적인 은유는 아니지만, 암시는 충분했지."

시안은 고개를 두번 끄덕이며 키득였다. 여전히 류 지부장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두번째. 이거는 정황인데, 왜 중국에서 자본을 출자한 오월 길드에서 굳이 인천까지 오라고 했을까 싶더라고. 신서울에서 영입을 시도하면 눈치가 보여서? 뭐가 문제야? 너네 길드에서 누리 부모님 내친 거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인데. 납치라는 사고를 계속 하다보니까 자꾸 이런 가정이 생각나더라고."

시안은 불꽃에 타들어가는 사무실을 슬쩍 보며 피식 웃었다.

"혹시 지금 인천에 데려오게 한 다음 중국으로 납치하려는 건가? 근데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부모님이 인질극에 동참한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지금 보험을 들어놨지."

"나 김누리 아냐."

시안이 옆을 슬쩍 가리켰고, 어느새 교복 상의를 벗고 셔츠만 입고 온 가온이 코어웨폰을 챙겨 시안의 옆에 섰다.

"언니인 김가온이지. 어떻게 부모가 딸들을 구별 못해? 쌍둥이도 아니고."

"뭐...라고...."

류 지부장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시안은 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눈썹을 으쓱였다.

"처음에는 그냥 모른척 하시는 줄 알았어. 그런데 어이쿠, 저 아줌마 목소리에 마력 실었네? <세이렌>이라고 사기치시네? 이거 완전-"

캬아아악! 쿠웅!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괴인, 김상아는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류 지부장의 옆에 섰다.

마치 생명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바디 슈트, 그리고 회색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보라색 마기(魔氣)가 흐르는 눈동자.

가온이 숨을 삼켰다.

"괴인...!"

"역시. 환술로 두 분을 홀렸구나. 예상대로야."

"다 죽여버리겠어!"

김상아-괴인 채문희가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려하자, 류 지부장이 그를 제지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라색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시안이 혀를 차며 물었다.

"참 나. 둘 다 괴인이네? 어느쪽이야? 오월이 처음부터 괴인들의 길드였던 거야, 아니면 너희 괴인들이 오월에 잠입했던 거야? 이거 중화에서 알면 난리가 날텐데?"

"난리가 나는게 우리가 바라는 바지. 크큭."

류 지부장은 신이 나서 시안의 말을 받았다. 채문희가 탐탁찮은 눈치였지만, 괴인으로서의 등급이나 조직 내 직급은 류 지부장이 훨씬 높았다.

"김누리가 중화 산하 조직에 의해 중국으로 납치된다고 하면 이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까? 못해도 길드 단위에서는 중화를 규탄하며 달려들겠지."

"누리를 길드 분쟁의 기폭제로 삼고, 너희는 중간에서 누리를 빼돌린 다음 괴인으로 만들겠다? 허이구, S급 괴인 만들어질 뻔 했네. 아주 큰일이 날 뻔 했어."

"왜 벌써 구한 것 처럼 이야기하는 지 모르겠군."

비꼬는 시안의 말에 류 지부장이 두 주먹을 들어올렸다. 보라색 마력이 들끓기 시작하는 모습에 둘은 흠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고작 두 명, 아니지. 뒤에 더있군. 이 소수 인원으로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우리는 감당 못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왜 벌써 죽인 것 처럼 이야기하는 지 모르겠네."

시안은 콧방귀를 뀌며 왼손으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세번째. 만약에 진짜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당연히 그만큼 대처를 해야할 거 아냐. 당신들 전력이 히어로 위키에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내가 멍청하게 진짜로 그냥 몸만 온 것 같아? 바보같기는."

"......뭐라."

시안은 가온을 슬쩍 쳐다보고는 류 지부장을 향해 뻗었던 손을 뒤집어 검지와 엄지를 접었다.

"난 말야, 정말 이해가 안 돼. 악당이라는 것들은 왜 이렇게 싸우기 전에 잡담하는 걸 좋아해? 안 급해? 어디 내가 급하게 만들어줄까?"

애애애앵--

시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경찰차의 사이렌이 울렸다. 시안은 사색이 된 류 지부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난 신고 정신이 투철한 모범시민이라서. 어디 한 번 엿 먹어봐라."

상쾌한 미소와 함께 내달렸다.

뒤로. 차를 향해.

"안녕!"

"저 새끼가!"

류 지부장이 화가 나서 앞으로 내달리려던 순간, 둘 사이를 가로막듯 거대한 물의 장벽이 생겼다. 심상찮은 마력량에 류 지부장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사이, 가온이 활을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괴인을 상대로라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지."

"넌 또 뭐야!"

"원탁 히어로 <라스푸틴>의 에스콰이어 길드 <마트료시카> 소속 히어로, <운디네>."

가온을 중심으로 물줄기가 솟구쳤다.

"내가 지금 부끄럽고 억울하고 빡쳐서 눈에 뵈는게 없거든? 딱봐도 혼돈 쪽 조무래기들인 것 같은데, 순순히 체포될 생각은 없지?"

"이 놈!"

류 지부장이 물의 장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가온은 활대를 꾹 쥐고 장벽을 뚫고 달려드는 괴인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파아아앙--!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물의 화살이 괴인의 심장을 찔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