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9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6
결국 시안은 그 누구의 환대도 받지 못한 채 병원을 떠나야했다.
김누리는 협회와 원탁-범세계적 최고의 히어로 길드-의 중재 때문에 당분간 협회 측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고, 누리의 부모는 아직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병실에 눕게 되었다.
의사 왈, 괴인의 세뇌에 심지가 흔들려 정신에 큰 데미지를 입었고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문제의 원흉도 찾지 못해 지금은 그저 경과를 볼 수 밖에 없다고 의사는 단정했다.
졸지에 납치당할 뻔 하고 양친이 식물인간이 된 누리의 비극은 전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오월>과 같은 외국계 길드에 대한 반향으로 확산되었다.
사실상 외국인에 의한 길드 개설은 막힌 상황.
시안의 활약은 사실상 '없는 일'이 되었고, 그걸 증명해줄 이들은 시안의 일행 뿐이었다. 아무리 누리와 라온이 시안의 행적을 읊어봐야 그걸 대외적으로 알려주는 이들은 없었고, 가온마저 길드가 있는 러시아로 급히 돌아가야했다.
시안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유나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포기하지 않겠다.
그런 다짐으로 시안은 잠에서 깨어난 유나와 함께 아침밥을 먹으러 나왔다.
* * *
<2월 10일 오전 8시, 병원 인근 분식집>
"유나야. 나랑 끝가지 가자. 내가 전부다 책임져 줄게."
"좋아요. 책임져주세요."
"응?"
유나는 오늘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투로 답했고, 시안은 제 일생일대의 고백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 당황했다.
"유, 유나야? 지금 내가 하는 말 이해했니?"
"당연하죠. 제가 쑥맥인 줄 아시나요?"
시안은 벌게진 열기를 가라앉히느라 안간힘을 썼다. 손을 흔들며 어떻게든 진정하려 하는 시안의 모습에 유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제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길드장님 편이라고."
"어? 응, 그, 그랬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흘러봐야 저는 히어로 길을 포기하거나,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 되겠죠."
유나는 물컵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길드장님 의견을 존중할게요. 길드를 계속 고집하신다고 한다면 그걸 따르고, 다른 길을 선택하신다고 해도 따라갈 거예요. 설령-"
유나가 시안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히어로 아카데미를 포기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나야, 그건-"
"히어로라는게 꼭 아카데미 나와서 자격증 따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안은 지난 1년간 유나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저 말이 무슨 생각으로 나온 건지 한 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너 정말...."
"그러니까 여기서 확실히 말할게요. 길드장 님, 아니 시안 님께서 그 어떤 길을 선택하시든."
유나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의 옆에는 항상 제가 있을 겁니다. 시안 님이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그럴 리가 없잖아."
시안은 확고한 유나의 선언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내 첫 팀원이자 파트너는 너야. 내가 너 끝까지 데리고 간다. 설령 네가 내가 생각한 SSS급이 아니라 E급이라고 하더라도."
"......예?"
시안의 말에 유나는 제법 당황했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너 SSS급이라고. 아마도. 그러니까 지금부터 확인하러 가자."
"확인하다니, 어딜-"
"우리 보금자리."
* * *
<오전 10시, 시안의 사무실.>
"보금자리가 맞기는 하네요."
"그치?"
시안은 길드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캐리어를 가져왔다. 유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캐리어가 있는 것에 의문이 들었고, 시안은 곧장 캐리어의 정체를 밝혔다.
"오라클이 내 지인이라고 했잖아. 걔한테 이거 가져오라고 한 거야."
"아."
유나는 병실을 뺀질나게 드나들던 탈색된 머리칼의 소년을 떠올렸다. 시안의 보증은 진실이었는지, 시안이 다치기 무섭게 오라클은 미국에서 한국까지 전용기를 끌고 날아왔다.
전직 원탁의 방문에 언론도 제법 흥미가 동했지만, 그는 단순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가차없이 기자들을 밀쳐내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유나가 사무실 한켠에 놓인 색다른 집기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다 그 분이?"
"걔가 가지고 있던 내 물건들이지."
유나는 아카데미의 마도공학 실습실에서나 볼법한 온갖 장비들에 감탄을 흘렸다. 특히 시안이 캐리어에서 꺼낸 정체불명의 물건은 마력 검사기와 상당히 유사했다.
"맞아. 이거 마력 검사기야. 내 자작."
"......."
"이걸로 너 재검할 거야. 정말로 E급인지, 아니면 SSS급인지."
유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길드장님."
"아냐. 너 SSS맞아. 모든 정황 증거가 내 가설이 진실임을 말하고 있어. 검사기 성능 문제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 거지."
"말도 안 돼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제가 1년동안 그 고생을 했다고요?!"
유나는 억울함과 원통함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간의 설움이 복받쳐올랐다. 시안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의 프로필을 꺼내들었다.
"이유나. 아직 이명은 없음.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성장 한계치만 따로 놓고 보자. 기존에 네가 알고 있던 걸로."
지수화풍광암환. 7가지 속성이 모두 겨우 '10'을 나타내는 검사표에 유나는 치를 떨었다.
수능이 끝나고 처음 이능력을 각성했을 때부터 아카데미 학부생 겨울방학에 이르기까지, 전 속성의 성장 한계가 10밖에 안되는 것에 얼마나 많은 굴욕을 당했던가.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놀리는 지 알아요? '칠십이'래요!"
"왜 그런지는 알겠지만 진정해. 내 가설대로라면 너는 '백육십이'가 될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칠백이'가 될 수도 있으니."
"......그게 왜 최악이에요?"
"후자면 나도 감당하기 어려워지거든. 당장 너 원탁에 잡혀가서 해부당할 걸? 외계인이나 이계인인 줄 알고."
유나는 콧방귀를 뀌며 탁자를 두손으로 내리쳤다. 시안이 식겁하며 움찔했다.
"좋아요. 딱 이번 한 번만 길드장님 믿어볼게요. 하지만 만약 길드장님 가설이 틀렸다면...."
유나는 제 마도기어에서 영상을 띄웠다. 첫 슬라임 던전 공략 당시 유나의 뒤에 서있던 시안이 유나의 앞섶에 손을 쑤시는 그 문제의 영상에 시안이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다.
"아, 아니! 그건 네가 탄환을 거기다 넣어놓아서 급해서 그랬던 거잖아!!"
"흥. 성희롱이랑 불법무기소지죄로 신고한 다음에...."
유나가 비장한 각오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자회견 열고 사람들 앞에서 울어버릴 거예요."
"......그 때 그랬던 거는 진짜 미안."
시안은 고개숙여 정중히 사과했고, 유나는 최대한 침묵을 지켰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억누르며, 유나는 태연함을 가장해 발로 바닥을 굴렀다.
"흥. 그냥 해본 소리에요. 길드장님이 저 어떻게든 해보려고 사기쳤다고 생각할게요."
"......저기요, 너 내 가설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1인 클리어 업적으로 성장 한계가 오르지 않는 경우는 하나 뿐이라니까?"
시안은 두팔을 벌리며 억울한듯 일장연설을 펼쳤다.
"영약도 소용없고, 1년동안 7개 속성 모두 1도 안 올랐다며? 거기에 <시스템>이 보장하는 능력치 상승도 막혀? 그럼 이 경우는 하나밖에 없어."
"말같잖은 소리를 하세요. 그래서 제가 성장 한계가 전부 100이다? 차라리 길드장님이 원래 SS급이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제가 이해할게요."
"......아니, 너 나 무능력자 수준인 거 알면서 그렇게 말하기가 어딨냐."
시안은 상처받은 얼굴로 빈정거렸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분이 가라앉았다고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지만, 유나는 엄한 표정을 풀지않고 계속 제 생각을 쏘아붙였다.
"말이 안 되니까 그렇죠. 원탁 최강인 <가웨인 경>도 한 속성 성장 한계 99가 끝인데, 전속성이 100? 뭐예요, 그런 사기가. 신이에요?"
"여신이지. 내게 축복을 내려준 여신."
시안은 미소를 지었고, 유나는 들고있던 종이컵을 와락 구겨버렸다. 시안은 바닥을 구르는 종이컵을 보며 그대로 굳었다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검사기를 가리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내가 미국에까지 연락해서 검사기 새로 들고왔잖니. 응? 속는셈 치고 한 번 해보자니까."
"흥. 길드장 님 앞에서 또 굴욕을 당하느니 안 할래요."
"글쎄, 나 한 번만 믿어봐. 나 못 믿니?"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요. 길드장님 말씀은...."
유나는 울것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고작 기기 오류 때문에 모두가 제 능력의 한계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것도 저조차."
"원래 진흙속에 다이아몬드가 더 찾기 어려운거야. 난 그 진흙속에서 주운 돌멩이가 보석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거고. 그리고."
시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설령 네가 굴러다니는 돌멩이라고 해도, 나는 너를 끝까지 키워서 최고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봐."
"......엄마가 그런 말 하는 사람 있으면 다리 사이를 발로 차버리라던데."
유나는 툴툴거리며 검사기 옆에 딸린 키트에서 바늘을 꺼냈다. 지난번처럼 손끝에 핏방울이 맺혀 검사기에 떨어지고, 시안과 유나는 초조한 얼굴로 검사기의 화면을 주시했다.
검사 결과에는 1과 0만이 가득했다. 다만 예전의 검사처럼 전부다 합친 결과가 '70'이 아니라 '701'이라는게 달랐다.
광속성, 성장 한계치 101.
시안은 예상외의 결과가 나온 것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씨발. 미쳤다."
시안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었는지도 몰랐다. 유나도 넋이나가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기계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결과를 출력했다.
[검사 완료. 이상 없음.]
"......이유나 님?"
"다시, 한 번 더."
"저, 저기요?"
"한.번.더."
결국 모든 손가락에 하나씩 바늘 구멍이 날 때 까지, 유나는 계속해서 재검을 주장했다.
100. 100. 100. 100.
101. 100. 100.
아홉 번의 재검. 결과는 변하지 않았고, 유나는 허허 웃으며 졸도했다.
시안은 쓰러진 유나를 일으켜 세울 생각도 못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 예상대로라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와, 진짜 미쳐버리겠다...."
시안은 혼자만 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유나의 능력치를 수정했다.
지 100수 100화 100풍 100.
광 101암 100환 100.
소위 SSS급이라고 알려진 한계 성장치 100. 유나는 <혼자서 던전을 공략한> 업적 덕분에 그 SSS의 경지를 돌파하고 말았다.
"E급이 아니라 EX급이었네."
기절한 유나를 바라보는 시안의 얼굴은 복잡다단해졌다.
잠시 뒤.
겨우 정신을 차린 유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검사 결과를 수도 없이 확인했다.
"길드장님 저한테 사기 치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유나의 의심을 부정한 시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할 생각도 못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에 시안이 유나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혹시 여신의 아바타 같은 건가요? 아니면 말로만 듣던 전생 치트?"
"그런 거 전혀 아니니까 대답해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유나는 이전의 검사지와 시안의 검사지를 책상에 두고 비교했다.
"만약에 성장 한계치가 처음부터 100이었다고 하면, 왜 제 현재 마력은 고작 10밖에 되지 않은 거죠?"
"......마력이라는 건 말야, 결국에는 정신력의 발현이야."
시안은 골치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비교하자면 이런 거지.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탈 때 있잖아? 나는 자전거를 충분히 탈 수 있는 육체적 조건이 있는데, 정작 마음이 그걸 두려워해서 육체의 기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는 거지."
"그러니까 제가 제 한계를 10으로 생각했기에, 현재 마력도 계속 10에서 머물렀다? 그게 말이 돼요?"
"마력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차원의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야. 하지만 그거는 곧 증명할 수 있어."
시안이 유나의 심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네가 진심으로 네 자신을 믿는다면, 넌 분명 날아오를 수 있어. SS, 아니 그 이상으로."
"...정말 제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쌩뚱맞은 유나의 질문에 시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지."
시안이 유나의 말을 정정했다.
"넌 이미 그런 사람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보증할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아."
유나는 확신에 찬 시안의 눈빛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시안은 겸연쩍은 미소로 볼을 긁적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 부탁하자면 말이야-"
"뭐든지 말하세요."
"응? 지금 뭐든지라고...?"
유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유나의 결연한 표정은 '어떤 각오'까지 한 기색이었다.
"기, 길드장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아. 그래. 길드장."
시안은 병원에서 준비한 길드 신고서를 유나에게 건넸다.
"네가 길드장을 대신 해주면 안 될까?"
"......."
유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