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82화 (882/1,497)

EP.882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9

"저, 정말 해도 괜찮아?"

시안은 굳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피가 오른 얼굴은 홍시처럼 벌겋게 익었고, 그건 시안을 마주보는 유나도 마찬가지였다.

"네. 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유나가 시안의 말을 끊었다. 유나의 손은 긴장과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살면서 한 번은 해야할 일이에요. ...손 잡아줘요, 시안 님. 그러면 저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유나가 손을 뻗었고, 시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유나와 손을 깍지꼈다.

"그래. 그러면 들어간다, 유나야!"

"...네!"

- 히어로 아카데미 학생처, 자퇴서를 넣으며.

* * *

<2월 12일 오후 1시, 대전역 인근 레스토랑.>

"속이 다 후련하네요."

유나는 앞접시에 덜어온 샐러드를 짖이기며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시안은 애써 밝은 얼굴을 하는 유나가 약간 부담스러웠다.

"유나야, 너 정말 부모님께는 말씀 안드려도 돼?"

"네. 그냥 자퇴하고 다른 길 알아본다고만 얘기하려고요."

유나는 제 안의 잠재력을 깨달은 이후,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퇴학 당하기 전에 자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뿐,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냐는 부모의 질문에는 시안의 자금을 바탕으로 길드장이 된다는 것도 알리지 않고, 그냥 아는 지인과 스타트업으로 사업을 돕게 됐다고만 짧게 이야기했다.

"제가 길드장 하겠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제 잠재력 알면 분명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실 거예요. 그러다 잘못하면 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그렇기야 하지."

유나의 잠재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길드 초기 멤버라 할 수 있는 라온과 누리, 그리고 길드장인 시안 뿐이었다. 예비 길드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둔 가온도 유나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최소한 96정도는 끌어올린다면 모를까, 당장은 숨겨야죠."

"그거야 그렇지."

"아직은 이정도 수준이기는 하지만...."

유나가 검지로 테이블에 D를 그렸다. 제 진짜 잠재력을 깨달은 이후, 유나의 몸속에 굳어있던 마력이 아주 조금씩 혈관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안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다른 속성도 각성하면 좋을텐데."

"광속성만 해도 어디에요. 사람이 나무 욕심 부리면 화를 입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본심은?"

"기회가 된다면 일곱빛깔 무지갯빛으로 하늘을 수놓고 싶네요. 후후. 농담이에요."

시안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평일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둘의 대화를 엿듣거나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둘은 정말 조용히 얘기하기도 했다.

"유나야.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떤 거요?"

시안이 테이블 위에 작게 스크린을 띄웠다. 라온과 누리의 육성 방안과 달리, 유나에 대한 육성 방안은 여백만 가득했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진짜 뭐든지 될 수 있는 셈이잖아."

"...일단 광속성인 분들을 참고해보는 건 어떨까요?"

"광속성?"

스테이크를 잘라 우물거리던 시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웨인 경>이 대표적이고, 당장 이 나라에는 <광검>이 있지. 근데 둘 다 검사야."

"참고하기가 어렵겠네요. 끄응."

"시간은 많아.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어떤 길로 가는게 가장 좋을 지."

시안이 마도기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바란다면 어떤 길이든 꽃길로 만들어 줄 게."

"......."

스테이크를 썰던 유나의 나이프가 잠시 멈췄지만, 이제 슬슬 내성이 생긴 유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우리 던전은 언제 갈 거죠?"

"응? ...그래, 그래야지."

시안은 무안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누리 알바 끝나면 바로 저녁 때 갈 거야. 그러니까-"

시안은 유나의 앞에 코어웨폰의 카탈로그를 띄웠다.

"원하는 대로 골라봐. 다 사줄게."

카탈로그를 넘기던 유나의 눈이 빛났다.

* * *

<오후 7시, 시안의 사무실.>

"그래서 광술사 루트를 타시겠다?"

누리가 탐탁찮은 얼굴로 유나가 결정한 성장 방향을 따지고 들었다. 유나는 자신이 선택한 코어웨폰, 마도 지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1년 동안 제법 많이 연구했거든. 광속성 힐러 쪽으로 나가면 어떤 식으로 성장할 지."

"다른 마력을 각성한다면 모를까, 지금은 유나가 세운 계획대로 따라가려고 해. 전위는 너랑 라온 씨 둘로 충분하잖아? 힐러랑 서브 원딜을 맡아줄 거야. 원딜은 가온 씨."

"그럼 충분합니다만...."

팔짱을 낀 라온은 시안의 전력 배분에 수긍하면서도 다소곳이 앉아있는 유나의 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시선을 눈치챈 유나가 왼손을 들어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스태프랑 세트인 반지에요. 보호막 마법이 담겨있는 마도구죠."

"묶음 할인이라길래 싸게 샀어."

추임새를 넣는 시안이 오늘따라 왜이리 꼴보기 싫을까. 라온과 누리는 유나의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드르륵. 테이블에 올려진 진동벨이 울렸다.

"커피 챙겨 올게요."

유나는 진동벨을 챙겨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갔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시안은 물이 든 컵을 들어올렸다.

"사장님 저거 안 쓴다고 하시더니."

"누리 양 덕분에 너무 바빠져서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따로 아르바이트 생도 뽑는다고 하시더군요."

"그보다 아저씨. 유나 언니 반지 아저씨가 끼워준 거야?"

누리의 날카로운 지적에 시안은 물을 뿜을 뻔 했다.

"커헉, 쿠흑. ...내가 끼워준 건 맞기는 한데, 먼저 좀 물어봐도 돼? 혹시나 오해할까봐."

"그래, 그러시던가."

시안이 선수를 치며 양해를 구하자, 누리는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한국에서는 왼손 약지에 반지 끼워달라고 말하는 게 미국이랑 의미가 다르니? 내가 알기로는 그거 결혼할 때나 하는 건데. 프로포즈 말야."

"...시안. 혹시 말입니다."

라온이 격분하려는 누리를 제지하며 물었다.

"혹시 유나 양이 직접 끼워달라고 한 겁니까?"

"어, 응. 지팡이 세트로 사면서 반지가 딸려온 건데, 선물받은 거니까 여기다 끼워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끼워줬지. 자기 약지랑 반지 사이즈가 딱 맞는다면서."

"......저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짝이지 않은가. 자퇴서를 내고 온다면서 벌써 온갖 어필을 다하는 유나의 광포한 행보에 라온은 개탄했다.

"......우정반지야. 아저씨, 너무 유행을 모른다."

누리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답했다.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정반지?"

"그, 그거 몰라? 길드원들끼리 액세서리 주고 받는 거? 반지나 목걸이에 보호마법 걸린 거 주고받는 건 흔한 일이야. 그치, 라온 언니?"

"...그렇습니다. 미국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제법 흔한 일입니다."

"그런가?"

시안은 왠지 섭섭하면서도 안도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온과 누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 왼손 약지야? 어휴, 완전 프로포즈 하는 줄 알았다니까. 직원 분도 오해하셔서 진땀흘렸어. 누리야, 혹시 왜 그런지 아니?"

"...궁금하면 유나 언니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아아악!"

누리가 테이블을 쾅 치며 씩씩거렸다. 시안은 겁을 먹고 라온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그, 그건 나도 좀.... 내가 직접 물어보기는 그러니까 라온 씨, 대신 물어봐주실래요?"

"싫습니다."

"네? 그러지 말고 좀-"

"싫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라온은 싱긋 웃으며 거절했고, 시안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누군가 이 분위기를 깨 주기를 바라며.

덜커덩. 사무실 문이 열렸다.

"누구...언니?"

누리는 유나와 함께 들어오는 가온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간호를 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사무실에는 왜 또 나왔단 말인가. 쭈볏대는 가온은 누리의 시선을 받고 시안을 가리켰다.

"잠시 간병인분한테 맡기고 나왔어. ...일단 이 사람 좀 빌려가도 될까?"

"마침 잘 됐네. 나도 이야기할 게 있었거든."

시안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아저씨는 왜 데려가려고? 꼭 둘이서만 얘기해야 하는 거야?"

"......응."

가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누리는 기가 한 풀 꺾였다. 유나는 박스에 가져온 음료를 테이블로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그래.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시안은 가온을 이끌고 사무실을 나갔다. 유나는 라온과 누리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누리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언니, 그 반지-"

"우정반지야."

담담한 유나의 말에 라온과 누리는 소름이 돋았다. 유나는 쿡쿡 웃으며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아직은."

* * *

<그 시각, 사무실 인근 골목길.>

"굳이 사무실 밖까지 나와서 할 얘기라는 게 뭐야?"

시안은 쌀쌀한 겨울 날씨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미처 코트를 입고 나오지 않은 것에 한기가 볼을 스쳐 이가 오들오들 흔들렸다.

"......왜 이런데서 이러고 계셔요?"

"뭐가?"

시안은 모르쇠하며 주변을 살폈다. 골목 근처에는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가온은 마력을 살짝 일으켜 물의 결계를 만들었다.

"후우."

시안이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일변한 분위기에 가온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역시 내가 괜히 '코드'까지 쓰면서 명령했냐?"

"아, 아닙니다! 만약 명령을 내려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제 부모님의 위기를 모르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

"그냥 시안이라고 불러. 가명 쓰고 있는 거 알면 '아, 정체를 숨기고 있구나'하고 찰떡같이 이해해야지. 안 그래?"

가온은 차렷자세로 사색이 되었다. 시안은 긴장으로 굳어있는 가온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보는 내가 다 미안해지네."

"그, 그러면 말입니다.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뭔데?"

가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지휘관>님께서 굳이 한국에 오셔서 길드를 만드신 건 무슨 이유로...?"

시안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말 안듣네. 나 이명으로 듣는 거 싫어해. 하나같이 다 쪽팔려 죽겠는데 뭔 놈의 지휘관이야. 차라리 부를 거면 공식 명칭인 <연금술사>로 불러. 내가 너 <운디네>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면 어떻겠냐?"

"시정하겠습니다!"

가온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시안은 누리와 별 차이가 없는 외모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모습에 생경함마저 느꼈다.

"가급적이면 그냥 '시안'이라고 불러. 다른 애들이나 라온 씨도 그렇게 부르니까. 그리고 내가 굳이 여기서 길드 만들려는 이유는 말이야, 간단해."

시안이 질색을 하며 이를 갈았다.

"말 더럽게 안 듣고 허구한날 사고나 치는 원탁 새끼들 가운데서 피토하며 암걸리느니, 그냥 내가 원하는 사람들 모아서 키우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여, 역시 그러면...."

"엉. 나도 이제는 에스콰이어 길드 하나 만들려고. 남들 모르게 아주 조용하게 말이야. 어차피 내 정체 아는 사람은 오라클이랑 가웨인 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마트료시카 나왔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라. 내가 나중에 너 길드 복직은 보장-"

"<멀린>님의 길드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명 부르지 말라니까!!"

"저, 예전부터 <궁정마법사>님의 팬이었습니다! 저, 제 마도기어에 부디 은총을-"

"야아아아아!!"

폭주하는 가온을 진정시키기까지 시안은 제법 애를 먹었다.

추후 마도기어에 사인을 해주는 정도로 마무리를 하고, 시안은 가온에게 명령을 내리기 이전처럼 자신을 막대하라는 명령을 해야했다.

"그런데 시안 님. 둘만 있을 때도 명령을 따라야합니까?"

"......제발 그래줘. 제발."

시안은 갑갑한 가온의 행동을 보며 크게 반성했다.

잠시 뒤.

가온과 협의 끝에 관계를 정리한 시안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왔어, 아저씨?!"

"어서오십시오, 시안."

"...응?"

시안은 나갈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과 누리는 목소리에 활기를 띠며 시안을 반겼다. 시안은 홀로 뚱하게 앉아있는 유나의 옆자리에 앉으며 슬쩍 물었다.

"셋이 무슨 얘기했어?"

"......그냥 여자들끼리 얘기 좀 했어요."

유나의 볼멘 소리에 시안은 흠칫 놀라며 더이상 묻지 못했다. 세 명 모두 '알면 다친다'는 듯한 분위기에 시안은 재빨리 가온을 의자에 앉으라 손짓하고 화제를 돌렸다.

"자! 그래서 가온 씨까지 왔으니까 이제 던전공략을 하러 가자."

시안이 양손을 비비며 일행을 쭉 둘러봤다. 어쩌다보니 여성진밖에 없었지만, 하나같이 시안에게는 죄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동료들이었다.

"2월 12일 20시 25분. 현 시점을 기점으로...."

시안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팀 데스디나스>의 발족과 함께 공식 활동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략할 던전은요?"

"응? 그거야 당연히 D급 고블린 던전이지. 그전에 새 멤버도 들어왔으니까 전력 테스트 겸 슬라임 던전을...."

"......."

1장. 팀 데스디나스. 완.

* * *

옥상 난간.

소녀는 난간에 걸터앉아 사무실로 들어가는 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층 카페의 유리창에는 연회색 머리의 오라클이 기자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역시 오라클을 쫓아온 게 정답이네요. 멍청이."

소녀는 딸기우유에 빨대를 꽂고 쪼르르 들이켰다. 입안에 서서히 퍼지는 딸기향을 만끽하던 소녀는 사무실을 한참 노려보다 피식 웃었다.

"갑자기 잠적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여기서 하렘이나 차리고 놀고 있을 줄이야."

시안은 소파에 둘러앉은 여성진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난처해하고, 때로는 화도 내는 모습에 소녀는 한껏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식은. 다 제 입맛대로 쓰다가 헌신짝처럼 버릴 거면서."

소녀는 흥미가 식었다는 듯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곧 스크린 너머에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여기는 P. 응답하세요, F."

[이 몸은 왜 부른 거시냥.]

전혀 진지하지 않은 상대방의 말투에 소녀, P는 목에 두른 베일을 쥐어 뜯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무게감을 가질 수 없나요?"

[무게감? 뭐지? 지금 슴부심 부리는 건가? 너무하네, 정말. 아항, 마력을 가슴에 저장하고 다녀서 그렇게 무게감을 잡으시는 감?]

"야, 죽을래?"

빠득. P는 이를 갈았다. 상당히 열이 받은 듯한 P의 얼굴에 검은 인영, F는 손사레를 치며 웃었다.

[아하하, 그래서 이 몸을 호출한 이유는 뭐야?]

"흠흠. 별 건 없구요, 혹시 시간 되면 사람들 좀 잡아먹어 달라고 부탁 좀 하려고요."

[오호.]

검은 인영이 녹색 안광을 번뜩였다.

[굳이 이 몸을 부르는 건 '은폐'가 필요하단 말이렸다?]

"그쵸. 당신이라면 소리소문없이 목표를 제거할 수 있으니까. 암살에 있어서는 스페셜리스트잖아요?"

F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P가 보낸 좌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거기 너무 먼데? 10분만 달리면 가기야 하겠지만 이 몸보다 더 가까운 애 있잖아. 게으름뱅이.]

"걔는 100% 꼬리를 남길 거예요. 흔적 정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당신 아니면 믿고 못 맡기니까, 잘 부탁해요."

[으히히! 역시 대장이야! 좋아, 이 몸이 나서지. 언제까지 하면 돼?]

"빠르면 빠를수록 좋기는 한데, 기일은...2월 말?"

P의 말에 F는 눈썹을 찡그렸다.

[2주나 남았잖아.]

"왜요. 자신 없어요?"

[아니, 너무 많아서! 이 몸만 믿으시라고, 으히히!]

뚝. P는 스크린을 내리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 딱 2월 말에 하겠네."

3월 14일이라고 못을 박았으면 아마 3월 13일에 임무를 착수했을 것이다. P는 제 옆에 놓아둔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기며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흥. 내가 오늘 죽이려했다가 이것 때문에 봐줬다."

P는 툴툴거리면서도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입안이 온통 딸기범벅이 되었지만, P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아."

P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금빛으로 된 검이 P의 정수리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누가 미친 개 아니랄까봐."

P는 울상을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화륵. 푸른 불꽃이 P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P, 푸른 소녀의 몸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금빛의 대검은 애꿎은 난간만 박살냈다.

파지직. 본래 시안이 계약하려고 했던 사무실, <메그레즈>라고 걸어둔 간판위로 딸기 샌드위치 하나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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