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91화 (891/1,497)

EP.891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08

<2시 32분. 구로 베이스 캠프.>

"예. 그쪽에서 혹시 발견하면 연락 주십시오."

시안은 구로에 함께 온 다른 길드에 긴급 연락을 넣었다. 혹시나 다른 길드에서 발견했나싶어 비상 연락망을 돌렸지만, 불행히 그 누구도 천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시안."

라온이 천막의 문을 열고 나왔다. 라온의 표정이 굳어있어 내심 짐작은 했지만, 시안은 굳이 질문했다.

"...라온. 어떻게 됐어?"

라온이 천막 안의 아주 미세한 흔적들을 가리켰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 수면 마취를 당한 상태로 끌려갔다. 그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추측일 것 같아요."

"......? ...수면 마취? 천봄이 씨 이능력자인데?"

시안은 목을 옆에있던 유나에게 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시안의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마력이 만능은 아니니까요. 일반 약품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걸 썼을 수도 있어요."

"시안, 분석 끝났다. 이능력자용 약품이 사용된 흔적이 있어."

하유준이 텐트 주변의 마력 흔적을 탐지하고는 혀를 찼다.

텐트 주변에 서성거리는 정체불명의 발자국, 수습한다고 해뒀지만 살짝 헝클어진 침낭, 무엇보다도 불침번의 눈을 피하기 위해 텐트 사각이 살짝 열려있었다는 게 큰 단서였다.

"제 실책입니다."

라온은 이를 꽉 깨물며 자책했다. 만약 누리가 깨어나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다음 불침번까지 천봄이가 사라진 걸 몰랐을 것이다.

"자책하지 마. 내 실수니까."

시안은 라온을 두둔하며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렸다.

구로에서 라온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도 구로를 선택한 것은 결국 시안이었다. 아무리 본인은 괜찮다고 할 지언정, 정신적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마 불침번을 서는 동안 제대로 경계를 하지 못했으리라. 시안은 애써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라온에게 물었다.

"일단 라온아, 천봄이 씨가 교대한 시간이 언제지?"

"1시입니다. 두 시간 씩 교대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최악의 경우에는 1시간도 전에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유나의 가정에 누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개병신, 어떻게 옆에 사람이 없어지는데, 흐끅! 그걸 모를 수 있어...!"

"약을 썼다잖아. 어쩔 수 없어. 오히려 그 때라도 일어나서 발견한게 어디야."

시안이 한쪽 무릎을 꿇어 주저앉은 누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리는 눈물을 흘리며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어떡해? 흑! 또 나 때문에-"

"네 탓 절대로 아니야. 일단 중앙에 긴급 신고부터 해야겠어."

"......시안, 그러면 평판 깎일텐데?"

하유준이 시안의 마도기어를 붙잡으며 신고를 가로막자, 시안은 하유준의 손을 떼어내고 곧장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형님, 사람이 실종됐는데 평판 신경쓸 때가 아니잖아요."

"......일단 우리가 먼저 찾아보고 다시 연락을 하는게 낫지 않겠어?"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어요. 젠장, 이러면-"

"시안!"

라온이 화색이 도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죄책감에 단서를 찾고있던 라온이 텐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의 진흙을 가리켰다.

"이건...."

"어두워서 발을 헛디딘 것 같습니다. 발자국의 방향을 봐서는...."

베이스 캠프에서 떠나는 발걸음이다. 시안의 눈이 라온이 가리킨 발자국의 방향으로 향했다.

"역이군."

천봄이를 납치한 괴한의 발자국은 던전의 입구일지도 모를, 대림역을 향해있었다.

* * *

<대격변>.

2022년, 지상에 나타난 괴수들이 '던전'이라는 이계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며 세상은 크게 변했다.

야생의 들짐승처럼 살던 괴수들은 지하에 생성된 던전속에 갇히게 되었고, 지상에는 던전에도 들어가지 못한 D급 이하 잔챙이 괴수들만 남게 되었다.

인류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현상에 많은 이들이 던전의 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지만, 당장 눈앞의 괴수들이 사라졌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물론 던전이 생기며 지상의 괴수가 던전에 갇혔을 뿐, 괴수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던전에서 '보스'가 되어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 한 번 만들어진 던전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협회와 정부에서는 던전이 생성된 곳을 파악해 특별히 관리해나가며 평화를 지키고자 했다.

한국에서 최대의 던전이라고 한다면 <서울의 마경>.

지하로 들어가는 도시철도 역으로 내려가 승강장까지 내려가면, 올라올 때는 기존의 서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계-던전이 펼쳐진다.

대림역은 그 마경으로 향하는 수많은 입구 중 하나였고, 천봄이를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괴한이 종적을 감춘 곳도 대림역이었다.

시안의 일행은 대림역의 1번 출구 앞에서, 격론을 펼쳐야 했다.

* * *

"절대 안됩니다!"

라온이 언성을 높이며 반대했다. 그에 누리 또한 얼굴을 붉히며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언니 미쳤음?! 봄이 언니가 여기로 사라졌잖아! 그러면 당장 들어가야지!"

"마경이잖습니까!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

라온이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가리키며 치를 떨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게 B급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A급도 나올 수 있습니다! 던전의 주인, 보스는 어떤지 아십니까? SS급입니다!"

"그래서 지금 언니는 봄이 언니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누리가 멱살까지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팀으로 움직이면서 앞에서 가장 많이 어깨를 부딪힌 만큼, 누리는 그만큼 가까워졌던 라온이 천봄이의 위기에서 몸을 사리려는 것에 배신감이 들었다.

"언니는 책임감도 없어?! 언니가 불침번 설 때 사람이 사라졌다고!"

"...그건 통감합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왜, 또 코어 깨질까봐 무서움? 쫄?"

누리가 빈정거리자 라온이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못했다. 라온 또한 누리와 투닥거리면서도 조금씩 열었던 마음의 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어, 언니. 누리야. 싸우지 마."

유나가 직접 가운데 나서서 중재를 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안이 누리의 앞에 서서 누리를 진정시켰다.

"너 지금 머리에 피 너무 쏠렸다. 마력 돌려서 진정해. 그러다 폭주한다."

"아저씨! 아저씨도 봄이 언니 안 구하러 갈 거야?!"

"아니. 가긴 갈 건데 너 지금 상태로 저기 돌입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열 좀 식히라고."

시안이 누리의 얼굴을 감싸쥐고 엄지로 관자놀이를 빙빙 돌렸다.

"숨 크게 들이마셔. 마력 천천히 돌리고. 화 내봐야 봄이 씨 돌아오는 거 없으니까, 그 화는 좀있다 봄이 씨 납치한 쓰레기들한테 풀자. 응?"

마사지하는 듯 하면서도 차가운 손길에 누리는 겨우 화를 억눌렀다.

"......흥."

누리는 라온에게 사과 하지 않았다. 입술이 댓발 튀어나온 누리에 시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떼었다.

누리도 한 고집 하는 만큼, 지금의 누리는 적어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있는 듯 했다.

"그럼 이제 대림역을 어떻게 들어가냐하는 문제인데."

그래서 시안은 최대한 누리를 진정시키면서도 일행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천봄이 구출 작전을 계획했다.

"C급인 천봄이 씨가 손도 못 쓰고 납치당했어. 라온이 감시도 소용이 없었고. 그럼 납치범이 B급 이상의 이능력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빌런? 이제 서울에 더 없잖아. 대격변으로 서울에 있던 빌런들 다 튀었는데."

"하나 쯤은 있을 수 있겠지."

시안은 마도기어를 조작해 홀로그램으로 된 서울의 입체 지도를 꺼냈다. 3D로 된 지도는 시안의 손짓에 따라 지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나타내고 있었다.

"지하철 역이 던전의 입구가 되기는 했어도, 지하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 그렇지?"

시안이 누리를 계속 보듬어주며 라온에게 물었다. 라온은 아직 누리의 신경질적인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기는 합니다. 옛 지하도는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누리야. 이건 내 가설인데...."

"천봄이 누님을 납치한 빌런이 던전이 아닌 지하도에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말이냐?"

"네, 형님."

하유준이 시안의 가설을 잘라먹고 결론부터 물었다. 시안은 손가락을 튕기며 긍정하고는 지하를 가리켰다.

"던전으로 변하지 않은 기존의 지하도. 빌런도 미치지 않은 이상 던전으로 들어가지는 않을테니, 던전으로 들어가지 않는 루트가 하나는 있을겁니다. 바로...."

시안이 주변을 살피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역시."

아니나다를까, 시안의 예상대로 엘레베이터 주변에는 라온이 발견한 발자국이 있던 진흙과 유사한 진흙이 있었다. 마력을 피워 파란 빛을 일으킨 누리가 씩 웃었다.

"여기서 신발 턴 것 같은데? 아저씨 대박."

"성능 좋은 다우징 머신이 있으니까. 흐흐."

시안은 유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엘레베이터 안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단서는 충분한 것 같은데, 중앙에 연락 넣고 돌입합시다."

"이 인원으로 말입니까?"

라온의 물음에 시안이 당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원이 납치됐는데 우리 팀이 구해야지. 걱정은 이해해. 그래서 그냥 돌입하지 않고 한 명은 남길 생각이야."

시안이 유나, 라온, 누리, 하유준을 번갈아보다가 하유준을 가리켰다.

"유준 형님은 여기서 대기해주십시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원 요청은 해두되, 한 명은 여기 남아서 진입 루트를 알려줘야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계단으로 갔다가 던전가지 않도록."

쾅! 시안이 굳게 닫힌 엘레베이터 문의 틈 사이로 오른손을 쑤셔넣었다.

우드득! 철판이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옆으로 밀려나갔다. 안에는 엘레베이터 밧줄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하3층? 충분하겠네."

아래를 슬쩍 확인한 시안이 누리와 라온에게 아래를 가리켰다.

"너희라면 그냥 다리에 마력 두르고 내려가도 될 거야. 그래도 낙법 잊지 말고."

"오케이! 아저씨, 나만 믿어! 내가 아저씨 밑에서 받아줄게."

"레펠로 내려갈 거야. 먼저 내려가."

"자, 잠시만요!"

라온이 당장에라도 뛰어내리려하는 시안의 앞을 막아섰다.

"이, 이렇게 무작정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괜찮아. 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지. 일단 라온이랑 누리 둘이 먼저 내려가 있을래? 아, 아니다."

시안이 아차싶은 얼굴로 유준과 라온을 번갈아 가리켰아.

"라온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유준 형님, 죄송하지만 따라와주시겠습니까?"

"...이런 막가파인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어휴."

하유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걷어붙였다.

"여자들만 보낼 수 없으니 내가 따라가지."

"고맙습니다. 그런데 형님, 전 남잔데요. 저도 가는데요."

"네 다음 무능력자."

시안이 억울한 얼굴로 코트 안에 오른손을 집어넣으려다 참았다. 유나가 쿡쿡 웃으며 시안의 등을 두드렸다.

"시안 님. 저 레펠도 잘 못하는데...."

"어? 아, 맞다. ...어떡하지."

시안이 라온과 유나를 번갈아보며 난감해했다. 이미 누리와 하유준은 손에 마력을 실어 밧줄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와락. 시안이 왼팔로 유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엘레베이터 앞에 섰다. 무슨 의도인지 금방 눈치 챈 유나는 그대로 두 팔을 벌려 시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 불편해도 참아. 괜찮지?"

"그럼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라온이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혼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혼자만 남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인지, 아니면 최봄이가 납치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시안은 알 수 없으나 라온은 일행과 함께 움직이기를 바랐다.

"......나 분명 여기서 대기하다가 들어오라고 얘기 한 것 같은데."

시안이 밧줄을 오른손으로 잡아당기며 몸을 돌렸다.

"......만약에 10분 뒤에도 내가 연락 안하면 들어와."

"10분 이나요?!"

"30분 하려다 그것도 줄인 거야. 괜히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 위험에 빠지면 그게 더 문제니까. 보험은 들어놔야지 않겠어?"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유나를 끌어안고 줄을 타고 내려갔다. 시안의 시야가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까지, 라온은 떨리는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했다.

* * *

"시안 님."

"응. 너도 느꼈지?"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아요."

"유나가 그렇게 느낀 거면 그런 거겠지. 일단 둘만 알고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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