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97화 (897/1,497)

EP.897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14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고 하는 시각.

구로 디지털 단지에 차려둔 베이스 캠프로 돌아온 시안은 이미 자신들의 텐트를 점거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화가 치밀었다.

"여기 저희가 쓰던 곳입니다만."

"그래서 뭐."

터질듯한 근육질의 남자가 시안을 아니꼽다는 듯 내려보며 비웃었다. 그의 셔츠 카라에 걸린 적색 소나무 모양에 유나가 시안을 제지하고 나섰다.

"시안 님. 지금은 진정하시는게...."

"어쭈. 머리에 금칠하고 다녀서 그런지 벌써부터 하나 깔고 다니나봐?"

"......."

시안은 아무말없이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유나는 사고라도 일어날까 시안과 팔짱을 끼며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적어도 그쪽보다는 훨씬 좋은 분이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뭐? 이 꼬맹이가.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

"알죠. <철표> 박성태. 전 '소나무 부대' 출신이면서 현 <적송> 길드의 일원. ...전신의 피부를 강철로 바꾸는 A급 이능력자."

"아는데 아주 겁도 없이 나불대는구만. 너 뭐라도 되냐?"

철표는 시안과 유나를 깔아뭉개듯 비웃었다. 그의 뒤에 따르는 수많은 적송의 길드원들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시안과 유나를 비웃어댔고, 팔짱을 낀 유나는 제 손이 다 부들부들 떨렸다.

"응? 너 뭐라도 되냐고. 여기가 그 대단하신 미-국인 줄 알아?"

자신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시안의 마음을 상하데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한 소리 지르려던 순간, 시안이 마도기어를 조작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쭈, 부모님한테 이르려고? 애냐? 어디 한 번 국제전화 하는 거-"

[석하랑 전화받았습니다. ...아, 당신이에요? 무슨 일로?]

"아, 별 건 아니고요."

시안은 얼어붙은 듯한 철표를 향해 눈썹을 으쓱이며 말했다.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지금 당장 말해도 되죠?"

* * *

잠시 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기회를 날린 거라니. 참...."

석하랑은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방향을 가리키며 한탄했다.

이미 서울의 수많은 역 근처 베이스 캠프들이 갑자기 올라온 헌터들에 의해 무단점거 되면서, 곳곳에서 베이스 캠프의 사용에 대한 분쟁이 빗발치고 있었다.

새로 베이스 캠프를 구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헌터들은 그 짧은 시간조차도 아까워하며 지하도로 진입했다.

"잠시 자리 비웠다고 그 자리 빼앗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거야 적송에서 잘못한 거긴 한데.... 아, 왼쪽으로 꺾어요."

시안은 석하랑의 안내에 따라 핸들을 꺾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와 달리 경로 중간중간마다 건물이 무너져있어 자주 돌아가야 했다.

"제법 좋은 자리였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됐네."

"이미 그쪽에서 10명 정도 잡았잖아요. ...그건 나중에 제 사비로 충당해드릴게요."

괴인 천봄이의 건이 없던 일로 되면서, 자연스레 그 공적도 석하랑이 챙겨갔다. 시안은 툴툴거리며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면 말입니다, 왜 구로에서 굳이 여의도로 오라고 한 겁니까? 그냥 우리 캠프 우리가 쓰면 되는 걸."

"...하아."

석하랑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시안은 구로의 베이스 캠프에 짐을 풀기를 원했지만, 석하랑은 적송에게 양보하라고 중재를 나선 뒤 자신의 베이스 캠프로 시안의 팀을 초대했다.

"다 당신네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적송이랑 척을 지면 더 짜증나는 일만 생길 겁니다."

"아까부터 말투가 더 딱딱해졌네. 혹시 의식하시는 건가?"

시안은 키득거리며 석하랑을 자극했고, 창틀에 팔을 올리고 있던 석하랑의 표정에 금이 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방언? 사투리? 저 처음들어 봤어요. 되게 귀여웠는데."

"시방 니 미친...크흠!"

또다시 튀어나올뻔한 말을 겨우 삼킨 석하랑은 헛기침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시안은 속으로 석하랑에 대한 정보를 하나 메모했다.

끓는 점 낮음. 자극은 적당히 해야겠다 싶었다.

"뭐 지난 번에 만났을 때 처럼 편한대로 얘기해요. 굳이 따지자면 내쪽에서 먼저 실수한 거니까."

"......?"

"뭘 모른척 해요. 당신 내 길드 들어오려고 연락했었잖아요."

"아."

석하랑은 치부가 드러난 것 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짜증이 난다는 양 손가락 끝에 얼음조각을 만들어 손장난을 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나 왜 깠어요?"

"장난전화인 줄 알았죠. 알았으면 절하면서 영입했지."

"그럼 지금은?"

"지금? ...당신 때문에 지금 나 완전 개털된 거 알아요?"

시안은 조수석을 한 번 쳐다봤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 유나 지정석인데. 아, 진짜."

"......오호."

석하랑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음흉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좋아하시는 구나? 좋아해서 그런 거구나? 근데 상황 보니까 짝사랑이시구나?"

"이래서 S급들은 싫다니까."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석하랑은 그 짜증이 의도적으로 낸 짜증임을 깨닫고 쿡쿡 웃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느낀건데, 당신 나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네요?"

"싫어할 이유가 없죠. 굳이 따지자면...."

시안은 핸들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가 석하랑과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느낌? 근데 그게 나랑 엄청 싸우던 기지배고."

"어!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처음으로 둘이 공감한 순간이었다.

분명 둘은 처음 보는 사이이고, 물론 그 관계의 시작에서 시안의 실수로 트러블이 있었다고는 하나, 왠지 모르게 둘은 서로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아. 큰일났다. 당신이랑 나 아는 사이면 안 되는데."

"뭐가?"

어느새 서로 말도 어느정도 편하게 되어버렸다.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트레일러 쪽을 가리켰다.

"당신이 나랑 아는 사이면 내가 누리 평생 노예된다고 했거든요."

"......그럼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나 살면서 외국인 만난게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 거기에 당신은 없었어요."

"그럼 뭐 인연이라도 있나? 전생에 아는 사이였다거나."

"푸흐흐. 수작이라도 거시는 건가?"

석하랑은 가벼운 목소리로 장난치듯 물었고, 시안은 진짜로 그런가 긴가민가 하면서도 운전에 집중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마도기어의 내비게이션에서 안내 음성이 흐르자, 시안은 트럭을 도로 한 켠에 주차시켰다. 석하랑도 표정을 바꾸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머지는 우선 팀원 분들이랑 모여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차의 시동을 끈 시안은 밍기적대며 운전석에서 내렸고, 이미 팀원들은 트레일러에서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저씨."

"......."

"무슨 대화를 하셨어요?"

유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시안의 앞에 마주섰다. 시안은 주머니속의 주먹을 불끈 쥐며 석하랑을 노려보다가 유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보상 문제."

"그것 뿐?"

"아니. 나머지는 위로 올라가서 얘기하자고 하더라. 유나랑 다른 팀원들이랑 같이."

시안은 뒤의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5층 위로는 소멸이라도 하듯 사라진 건물 곳곳에는 순백의 얼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 여의도의 한가운데에 있던 5성급 호텔.

석하랑은 그곳에 베이스 캠프를 구축했다.

* * *

<오후 5시 30분. 여의도 C호텔 라운지.>

"인당 10씩 쳐서 100억 우선적으로 지급할게요."

"아저씨, 이 언니 당장 영입하자."

"누리야...."

시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누리를 진정시켰다. 잠재 S급도 지금 감당이 어려워 바닥에서 빌빌대고 있는데, 현역 S급까지 들이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는 불보듯 뻔했다.

"시안 님. 도대체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설화공주 님이 저런 호의를 보이시는 거예요?"

유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석하랑의 진의를 캐물었다. 실제로 석하랑이 괴인들을 원탁에 넘겨 돈을 번 것도 아닌데, 석하랑은 굳이 그 현상금 값을 쳐서 돈을 지급하기로 했다.

자비로.

"언니 통장에 돈 얼마나 있어요?"

"...조 단위 넘어가면서 계산 안 해봤는데."

석하랑은 쑥쓰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누리의 존경어린 시선을 피했다. 누리는 어느새 석하랑과 죽이 맞았는지 편하게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도 S급 치고 그렇게 많이 없는 편이야. 그냥 히어로 활동을 오래해서 그래."

"S급 히어로들 연봉으로 따지면 평균이 천억 소리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부럽습니다."

석하랑에게 있어서 100억은 큰 돈이 아닐지 몰라도, 당장 눈앞에 2만원이 없어 노숙을 했던 라온에게는 석하랑이 위대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도 돈 넘쳐나거든?"

시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본인의 자금력을 어필했다. 그 대부분이 오라클에게서 빌려온 자금이었지만, 어디가서 돈이 모자라다는 소리는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보여도 어지간한 중견 길드 급 자금은 된단 말이지."

"그러면 그 돈으로 새로 인재 영입하면, 그 히어로들 슈트는 유성 거로 맞추는 건 어떠냐?"

하유준이 귀신같이 끼어들어 판촉을 시작했다. 트럭을 지르는 순간부터 이미 하유준은 본인이 '유성맨'임을 가감없이 드러냈고, 시안은 모른척하며 석하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 100억은 '길드 '투자금으로 받겠습니다. ...유준 형님도 이참에 들어주세요."

시안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석하랑과 하유준은 일변한 시안의 분위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말입니다."

시안은 간략히 설명했다. 자신이 헌터 길드를 만들려고 했던 것, 그 과정에서 여러 인재를 영입하고 이런 저런 방법을 찾다가 '유나를 길드장으로 하는 길드'를 만들기로 한 것. 당연히 유나의 진짜 스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흐흐흥,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거든요?"

석하랑의 '다 알겠다'는 음흉한 시선을 무시한 시안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길드는 여러분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자 합니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길드이자 팀, <데스디나스>에서."

"......잠깐 생각 좀."

"흐음."

하유준은 손을 들어 고민에 빠졌고, 석하랑은 뜸을 들였다. 시안은 뒷목을 긁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희가 실적 쌓는 거 보고 판단하셔도 좋구요, 우선 들어오셔서 팀으로 활동하다가 길드 등록하는데 도와주셔도 되고요."

"나 조건 하나 걸어도 되냐?"

하유준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시안은 왠지 어떤 질문을 할 지 예상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 꺼 우선적으로 사달라는 거라면 저도 고민을...."

"그건 내가 너 설득해야 할 부차적인 문제고. 내가 여기 괜찮다싶으면 나중에 내가 아는 사람 한 명 추천할 건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길드 가입시켜 달라고. 그 정도는 되지?"

"아니 여기서 청탁을?!"

시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하유준과 눈을 마주했다. 오는 사람 가리고 인재 영입에 제법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시안으로서는 '낙하산' 인재를 무작정 들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유준은 분명 탐이 나는 인재다. 농담으로 정수기 잘 갈게 생긴 몸이라며 영입한다고 했지만, 분명 '감'은 하유준을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조건이라면 저도 하나 걸죠. 유준 형님 활약상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괜찮죠?"

"그거야 당연하지. 괜히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흐흐흐."

하유준은 자신감을 내비쳤고, 시안은 혀를 내두르며 그의 자신감에 감탄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그럽니까?"

"족히 내 7인분은 할 수 있는 대-단하신 분이지. 흐흐."

"제 베이스 캠프에서 지금 뭣들 하시는 거예요?"

석하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예 대화에서 배제된 기존의 세 팀원은 일사천리같은 대화의 흐름에 쉽게 끼어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크흠. 미안해요. 그래서 그쪽은?"

시안의 시선이 석하랑에게 향하자, 석하랑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비상, 긴급호출. 비상, 긴급호출.]

비명같은 긴급호출에 석하랑이 눈썹을 찌푸렸다. 둘러앉은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석하랑이 호출에 응하자, 히어로  서예성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여기는 구로! 현재 적송에서 경계중인 '괴인 수용 감옥'이 정체모를 적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상대는 추정 에ㅅ-]

지직. 화면이 갑자기 끊어졌다. 시안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겼다.

"뭔가 사고가 터질 것 같더라니."

"어, 갑자기, 왜?"

석하랑을 위시한 팀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패닉에 빠진 듯 했다. 시안은 굳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뭐해요! 당장 구로로 갑시다!"

* * *

부우우웅!

칼바람이 일었다. 컨테이너의 경계를 서던 적송의 길드원들은 슈트 째로 바람에 찢겨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흐흥, 흥~"

녹색 단발의 소녀는 소풍이라도 나온 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컨테이너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에는 어깨죽지부터 크게 베인 상처를 입은 서예성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누, 누구냐...!"

"이 몸!"

소녀는 짧게 답하고 손을 부채질하듯 가볍게 흔들었다. 간신히 호흡하던 서예성은 그대로 숨이 막혀 질식했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오늘은 기분 좋으니까 죽이진 않을게. 흐흐흥."

마지막으로 한 모금 들이마신 공기에서 박하향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끝으로, 서예성은 의식을 잃었다.

"그럼 보자.... 어이쿠, 많이도 모았네!"

빛 한 점 없는 컨테이너 안, 마력적인 조치가 취해진 수 백개의 밀봉캡슐 중 하나를 꺼낸 소녀는 그대로 손아귀 힘으로 강철로 된 캡슐을 으그러뜨렸다.

퐁.

"시작부터 가챠 대박인 듯? 내 쪽은 아니어도 A급 정도는 되겠다. 흐흐흐."

소녀가 쥔 코어는 보라색과 회색이 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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