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98화 (898/1,497)

EP.898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15

<오후 5시 44분, 구로 베이스 캠프.>

초토화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까.

적송이 자리잡았던 구로의 베이스 캠프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헌터들의 혈향이 자욱했다.

야밤도 아니고 해가 떨어지지도 않은 시각. 정체 모를 습격자는 대놓고 길드를 습격해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뜨렸다. 상처는 깊었으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 유나가 다급히 쓰러진 이들에게 달려갔다.

"정신차려요!"

"유나랑 라온이는 사람들 부축! 누리랑 유준 형님은 이쪽으로!"

곳곳에 쓰러진 이들을 둘에게 맡긴 시안은 곧장 외벽이 뜯겨나간 컨테이너를 향해 달렸다.

"시안!"

안에서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모습에 누리와 하유준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팟! 시안이 마도기어의 손전등을 켜 어둠을 밝혔다.

"젠장."

마치 짐승이 할퀴고 떠난 듯한 흔적이 가득한 컨테이너 안.

시안의 팀과 함께 구로에 자리를 잡았던 메그레즈의 길드장, 서예성은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시안은 곧장 서예성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아직 숨 쉬어! 형님!"

시안이 하유준을 부르기가 무섭게, 하유준은 빛처럼 움직여 서예성을 부축해 컨테이너를 빠져나갔다. 누리는 이미 검을 뽑아들고 시안의 곁에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경계를 철저히 했다.

캉. 누리의 구두굽에 빈 캡슐 하나가 부딪혔다.

"아저씨, 이거 혹시?"

"응.

시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캡슐을 집어들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석하랑과 히어로들이 새벽 동안 체포한 괴인들의 코어 200여개 중, 약 스무 개 가량의 캡슐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용물인 괴인의 코어가 사라진 채.

"아무래도 몇 개만 빼간 것 같은데."

시안은 누리의 호위를 받으며 사방팔방을 살폈다.

9평이 될까말까한 정도의 컨테이너, 심지어 그 안에서도 괴인의 코어를 캡슐에 넣어 보관하는 보관함을 제외하면 사람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없었다.

선별해서 가져간 걸까, 아니면 시간이 모자라서 몇 개만 챙겨서 도망친 걸까.

"제대로 사고 터졌네. 젠장."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서 얼음의 날개를 펼친 상태로 범인의 흔적을 찾던 석하랑이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안 돼요. 마력의 흔적을 전혀 읽을 수 없어요."

"상대도 S급일지 모르니까요."

서예성이 습격당하기 전에 흘린 유일한 단서.

습격자의 이능력이 최저 S급이라는 것을 감안해 석하랑은 구로 일대의 하늘에서 마력을 사방팔방으로 펼쳐 범인의 흔적을 쫓았다.

"그래도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죠. "

범인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어떤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은 해질 무렵에 당당히 습격을 하여 괴인들의 코어를 훔쳐갔다.

"무슨 일입니까?!"

구로의 소란에 주변에 퍼져있던 히어로와 헌터들이 하나 둘 베이스 캠프 근처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습격당한 괴인 수용소의 참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적송>이 전멸...? 말도 안 돼. B급 헌터만 몇 명인데?"

"A급 <철표>도 반죽음을 당했다고?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이능력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아무런 전조나 징조도 없이 나타난 초현실적인 존재의 습격에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시안은 그들의 당혹감에 기름을 끼얹는 셈이 되더라도, 컨테이너 안에서 확인한 진실을 전달해야했다.

"신원불상의 습격자가 괴인의 코어를 훔쳐갔습니다. 개수는 약 스무 개.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요."

"미친."

이능력자들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괴인의 코어를 수용한 컨테이너를 습격당한 순간부터 낌새는 느꼈지만, 그래도 행여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정부 산하 길드에 대한 습격.

괴인들의 코어 탈취.

증거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범인.

최악의 가정은 현실이 되었다.

정부 산하 길드 <적송>은 정체 불명의 습격자에게 전멸했고, 괴인의 코어를 스무개 가량 도둑맞는 치태에 빠졌다. 심지어 그 범인이 누군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

"시안 님!"

혼절한 이들을 응급처치하고 온 유나가 시안에게 다가갔다. 유나의 전신에는 적송의 헌터들에게서 튄 피로 가득했다. 그건 옆에 있던 라온도 마찬가지였다.

"응급처치는 끝났습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휴우."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습격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최소한 습격자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 흔적이라도 찾아야 했다.

'설마.'

시안은 머릿속에 떠오른 최악의 가정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시간 상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한 번 피어오른 의심은 가라앉을 기미없이 더욱 확산되었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들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흔적이 없다는 건 흔적을 지웠다는 거야.'

아무런 흔적도 없다. 증거조차 남기지 않았다.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모조리 의식 불명이다.

'설마 그 새끼들이...!'

증거가 없다는 게 역으로 증거가 되는 단 하나의 경우. 시안은 그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서울에 모인 전력을 분석해 시뮬레이션을 짰다.

"석하랑 씨!"

시안이 석하랑을 불렀다. 석하랑은 주변 이능력자들에게 사태를 전달하고 범인 색출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혹시 찾았어요?!"

"찾지 못했더라도 일단 우선적으로 조치는 해야합니다!"

시안은 마도기어에서 서울의 지도를 꺼내 손가락을 빙 돌려 원을 그렸다.

"던전, 지하도, 공중, 어디든 범인이 괴인들의 코어를 들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틀어막아야 합니다. 일단 포위망을 형성해야 해요."

"의심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시안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훔쳐간 괴인들, 싹다 부활할 수도 있어요. 더 강해져서."

* * *

파밧!

고양이 한 마리가 어두운 골목길을 달렸다. 그의 꼬리 뒤에는 스무개의 구슬이 뒤를 따라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바람에 구슬, 코어를 실어 끌고다니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깨진 유리창 안으로 몸을 비집고 숨어들어갔다.

"끄응!"

건물 안으로 들어간 고양이는 녹색 빛에 휩싸이더니 곧 사람으로 변했다. 방금 전의 빛을 머금은 듯한 녹색 단발의 소녀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숨을 골랐다.

"와, 걸릴 뻔 했네."

소녀는 유리창 너머, 하늘에 펼쳐진 거대한 결계에 혀로 입술을 핥았다.

여의도의 상공에서 서울 전체를 뒤덮는 반구 형태의 결계. 막대한 양의 마력을 때려부어 펼쳐진 결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서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강제로 결계를 깨부수면 탈출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 정체 불명의 이능력자에 의해 추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냥 그 인간 죽이고 바로 떠날 걸 그랬네."

소녀는 코어 하나를 집어들어 장난감처럼 던졌다 잡았다.

괴인의 코어가 살아있다면 말 그대로 '생명을 가지고 노는' 꼴이나 다름없었지만, 애초에 소녀는 '인간'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소녀는 코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이걸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잖아."

소녀는 가지고 놀던 코어를 방울토마토 삼키듯 입안에 넣고 혀로 굴렸다. 쇠구슬처럼 단단했던 코어는 소녀의 혀놀림에 서서히 사탕처럼 녹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이걸 가지고 JMT라고 하던가?

참새가 방앗간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소녀 또한 괴인들의 코어가 봉인된 컨테이너를 발견하고 그만 본래의 목적을 잃고 샛길로 새고 말았다.

까드득!

입안에서 코어를 좌우로 굴리며 고뇌하던 소녀는 이빨로 코어를 깨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무 개 밖에 못 가져온 게 영 아쉬운데."

괴인의 코어는 좀처럼 얻기 힘든 물건이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무방비한 곳에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일반인의 상식이라면 <적송>에서 경계를 한다면 어떤 빌런이 와도 습격을 받아냈겠지만, 소녀는 그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었다.

"하아, 이 몸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담."

소녀는 머리를 배를 긁적거리며 하품을 했다.

타깃이 준 우유도 맛있기는 했지만, 역시 소녀에게는 마력이 깃든 싱싱한 코어가 제일 맛있었다.

"...역시 그냥 넘어가긴 아쉬운데."

2월 28일. 소녀가 '대장'으로부터 목표의 암살 명령을 받은 기한.

소녀는 그게 '목표물이 있는 국가의 날짜'인지 몰랐고, 자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아 혼이 난 소녀는 부랴부랴 극동의 반도로 날아왔다.

그렇게 지구를 반바퀴 돌아 힘들게 날아왔더니 정작 목표는 신서울에서 빠져나갔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와중에 배고프고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났더니 하필이면 변신한 형태로 마주한 목표에게 호의를 받았다.

할짝.

입안에 아직까지 박하향이 남아있는 게 느껴진다. 소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죽이긴 아까운데."

비록 마력은 바닥에 가까웠지만 자신에게 좋은 선물을 준 존재다. 소녀는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호의를 준 존재에게는 호의로 대한다.

그것이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더욱.

"응. 민초 좋아하는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없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인간들이 틈바구니 속에서 활동한지도 어언 4년.

소녀는 특히 자신의 기호가 평범한 인간들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 민초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어!

그런 의미에서 타깃은 아주 착한 사람이다. 자신이 먹으려고 사온 민초를 고양이였던 소녀에게 넘겨주었으니, 그 얼마나 심성이 고운 이란 말인가.

"......아!"

유레카. 그 방법이 있었지. 소녀는 혀로 입술을 쓱 핥고는 코어를 전부 공중에 떠올렸다.

"일단 죽이고 이 몸의 권속으로 만들면 되겠네!"

그리고 1년 365일 삼시세끼 내내 캣잎과 함께 하는 박하 세상을 만들리라. 소녀는 큭큭 웃으며 코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지를 흐르는 유구한 바람이여! 절풍(切風)의 인도에 따라 별을 타고 내려와, 죄많은 이들의 심장에 깃들어라! 이 몸은 그대들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며, 그대들은 이 몸의 인도에 따라 새로운 바람으로 태어날 지니!"

소녀가 뻗은 손에서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곧 바람은 열아홉의 코어를 휘감았다.

"이 몸, <절풍의 펜릴>이 주창하마! 현현하라, 바람의 자식들이여!"

소녀가 있던 건물에 녹색의 빛이 폭발했다.

* * *

"젠장! 이게 말이 돼? 설화공주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야?!"

"몰라! 일단 시키는 대로 해!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하잖아!"

빌런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헌터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설화공주 석하랑의 총동원, '버스터 콜'에 따라 서울 전역으로 흩어졌다.

S급 히어로들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 등급의 명령 권한에 따라 히어로나 헌터 할 것 없이 모두 설화공주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시발, 내 10억들은 어쩌고!"

당연히 빌런들을 체포하는데 안간힘을 쓰던 헌터들은 설화공주의 횡포에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화공주의 버스터 콜이 언제 어디서 울렸는 지 기억을 떠올린 이들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명령에 따랐다.

"...모비딕 급이라고? 미친!"

"야, 야! 지금 이거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냐?!"

이능력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전해진 정보들을 수합해 상황을 파악했다.

전철의 역을 기점으로 서울을 빙 둘러싸는 포위망. 그리고 하늘에 펼쳐진 설화공주의 마력 결계는 꼭 '서울에 있는 빌런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는' 형국이었다.

긍정적인 전망을 내거나, 설화공주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닐 걸? 그냥 두더지 잡기의 연장선일 걸?"

"설화공주 버스터 콜 자기 욕심 때문에 쓴 거 아님? 지하에 있는 빌런들 싹다 잡아들여서 제 전공으로 세우려고."

저마다 설화공주의 생각을 추측하며 역마다 거점을 잡고 대기하던 찰나, 서울의 모든 이능력자들의 마도기어에 화상 스크린이 두 개 떠올랐다.

[서울에 있는 히어로, 헌터 등 모든 이능력자들에게 알립니다.]

한 명은 백발의 설화공주.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생전 처음 보는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이 새끼 누구야?"

"어, 그 오라클 뭐시기에 나온 금발 하렘남?"

생전 처음보는, 또는 낯이 익은 시안이 왜 설화공주와 함께 스크린에 나온 건지 의아함도 잠시. 시안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 시각 17시 58분을 기점으로 서울에 잠입한 빌런-]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서울의 남쪽에서 녹색의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능력자들의 시선이 절로 빛기둥이 솟아난 방향, 남산타워를 향해 돌아갔다.

활화산처럼 터진 빛기둥은 결계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고, 빛무리는 가루가 되어 서울 곳곳으로 흩어졌다.

"뭐, 뭐야?!"

"이건...마력?"

이능력자들이 녹색 빛기둥과 마력의 정체에 대해 갑론을박하기도 전에, 이상현상을 파악한 마도기어에서 긴급 알람이 울렸다.

■■■■■■---!

귀를 때리는 사이렌 소리는 분명 과거 '차원문'이 발생했던 때나 들을 법한 '이계의 존재들'이 나타날 때 나오던 소리였다.

히어로든 헌터든 할 것 없이 입안이 바싹 말랐다.

삑! 마도기어에서 강제로 스크린이 열려 경고 문구가 나타났다.

<제 1종 비상 사태 발령, 위험등급 SS.>

<패턴 녹(綠). '펜릴' 발령>

<해당 지점에 있는 히어로들은 신속히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서울의 포위망을 구축한 이능력자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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