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04화 (904/1,497)

EP.904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21

2025년 3월 4일.

서울 지하의 괴인들이 소탕된지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서울의 지하도에는 속된 말로 '바퀴발레 소굴'이라는 멸시의 표현을 암암리에 할 정도로 빌런들이 많았고, 그들은 괴인들과 어울려 지하에 숨어 목숨을 연명했었다.

그들을 이끌었던 자는 다름아닌 A급 빌런, 하늘성.

괴인인을 숨기고 있던 하늘성은 펜릴의 괴인으로 진화하며 남산 타워를 무너뜨리고 중경상자를 스무명 넘게 만드는 잔악한 손속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히어로들의 집단 공격에 무릎을 꿇고 패배하여 다시금 코어가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괴인들이 체포되었지만, 가장 세간의 이슈를 끈 자들은 역시 스무 명의 '펜릴의 괴인'들.

길드 적송이 보호중이던 괴인 수용소에서 탈취당한 스무개의 코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펜릴의 괴인'이 되었다.

그 대표가 바로 하늘성이었고, 하늘성은 S급에 달하는 강력한 힘을 휘두르며 서울을 파괴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체포당한 지금, 세간의 이목은 자연스레 그들에게 걸린 '현상금'에 쏠렸다.

두당 100억.

그리고 그 현상금을 내건 '금발의 외국인'.

아주 우연찮게 본인의 팀이 체포한 '이름모를 남자 괴인'을 제외하면, 1900억에 달하는 거금을 기꺼이 내놓아 서울 포위망을 유지시킨 장본인에게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 이 남자가 있었기에 서울이 안전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현상금 배부에 대한 절차요? 두 시간안에 모두 처리해두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흠흠, 이럴 게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 대대적으로 큰 행사를....

히어로 협회와 헌터 연합, 그리고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3월 4일.

그들은 그 의인이 빼도 박도 못하게 일사천리로 행사를 만들어냈다. 괴수대책부 장관이라는, 사실상 서열 3위급의 인물이 주관하는 행사에 위인은 떠밀리듯 웃으며 참가'당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수많은 이능력자 및 내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서울 지하 소탕 작전 결과에 대한 보고, 다시금 영웅으로의 면모를 보인 설화공주를 위시한 히어로들에 대한 칭송, 헌터들에 대한 현상금 수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한 '외국인'에 대한 '감사'.

오로지 감.사.

"의인 시안.w.히비스커스가 2천억이라는 거금을 서울과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쾌척한 것에 국민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며...."

그렇다.

히어로 협회, 헌터 연합, 그리고 정부.

세 집단은 이 외국인에게 '명예'를 쥐어주는 대신, 정말로 2천억을 벗겨먹기 위해 처음으로 협력하여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위 인물은 타의 모범이 되는 의인으로서...."

시안.w.히비스커스가 이 날 아침 행사에서 받은 것은 초등학교 표창장만도 못한 감사장과 꽃다발, 그리고 카메라 플래시 조금이었다.

"자, 시안 님. 기념 촬영 한 컷 하시죠! 자, 김-아니 치-즈!"

"......치즈."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2천억을 협회에 기탁하고, 제 몫의 백억을 수령해 자리에서 떠났다.

* * *

<2025년 3월 4일 오전 10시 30분, 시안의 사무소.>

"용서 못해, 이 나쁜 자식들!"

시안은 왼손으로 탁자위의 감사장을 집어던지며 씩씩거렸다. 꽃다발은 예쁘게 유리병에 꽂꽂이하여 장식하면서 감사장은 바닥에 내팽겨치는 걸 두고 가온은 얼척이 없었다.

"그거 벽에다 거신다면 서요?"

"안에 종이만 빼서 액자에 걸 거야! 밖에 건 좀 망가져도 되잖아! 어차피 내 건데?!"

시안이 구둣발을 들어 감사장을 밟으려다가 간신히 화를 참았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열이 받았던 건지 아직까지도 씩씩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가온이 1층에서 타온 아이스티를 쪼르르 마시며 물었다.

"마법사님, 도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내 100억!!"

시안은 가온의 호칭에 대한 교정조차 까먹으며 분노했다. 그제서야 가온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숨을 참았다.

'드디어 궁정 마법사님께서 불합리한 처사에 화가 나시어 숨겨둔 힘을 발휘하시는-'

"이 개새끼들! 내가 내 돈으로 현상금 걸고 내가 한 명 잡았는데, 그걸 세금 떼서 넘겨줬어! 무려 33%나!!"

"......."

가온은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하늘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랬다. 시안은 사무실 안을 방방 뛰며 머리를 한손으로 쥐어 뜯었다.

"67억? 아니, 그래! 내가 100억 내 입으로 질렀으니 거기까지는 오케이! 괴인 한 명 잡은 거로도 오케이! 그러면 1900억만 기탁하고 100억은 내가 챙기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걸 굳이 2천억 맞춰서 기탁하자고 해놓고 세금 떼고 수령해가게 하는 건데에에에!!"

"......그래도 모범 납세자에 국민 영웅 이미지는 얻으셨잖아요?"

가온은 네트워크에서 시안의 이름을 검색하고는 연관검색어를 찾아 읊었다.

"글로벌 호구, 괴인죽여맨, 백억졸렬갑, 동정하렘남, 누리 매니저. ...죄다 조금 표현이 그렇기는 한데 당장 지금 가장 이슈가 되는 건...."

가온이 가장 굵게 표시된 문구를 훑으며 피식 웃었다.

"배임 갑(背任 甲)"

"...그건 어디 국회의원이야?"

"국회의원요? 서울에 출마하시면 무조건 당선이래요. 배임은 오라클 님께서 스튜디오에 투자하신 2천억 홀라당 날려먹어서 붙은 별명이고요."

"아......."

실제로 그런 비판이 없는 게 아니다.

아직 상장은 하지 않았지만 안전주이자 우량주인 오라클 스튜디오의 현지 책임자가 2천억이라는 투자금을 서울에 홀라당 뿌린 셈이니, 업계 측에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배우 천봄이를 영입하는 것으로 정말로 '한국 배우들의 헐리우드 진출'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던 영화업계는 김칫국을 잔뜩 들이켰다 목이 막혀 사망했다.

대외적으로 천봄이는 미국으로 보내졌다고 알려졌다.

"배우 겸 이능력자 양성소라더니, 그 운영비 2천억을 어디다가 써버린 거냐고 난리인데요? 이러다 김누리 한푼도 못받고 거리에 나안게 생겼다고...."

"잠깐 문자 좀."

시안은 다급한 표정으로 가상 키보드를 꺼내 문자 메세지를 작성했다. 그 상대방이 누구인지 대번에 깨달은 가온은 사색이 되어 물었다.

"오라클 님이랑 사전에 상의된 거 아니셨나요...?"

"......."

시안은 침을 꿀떡 삼켰다.

으레 예언을 했겠거니 하여 2천억을 전부 질러버렸지만, 시안은 아직도 내심 그게 '과했을까' 속으로 수십번을 되뇌였다.

삑. 시안의 연락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오라클의 답장은 칼같았다. 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스크린을 누르려다 가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서워서 못 열겠어."

"...설마 저보고 열어달라는 건 아니죠, 연금술사 님? 제가 봤다가 괜히 큰 문제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원탁의 산하 조직의 평범한 구성원이었던 자신과 달리, 시안은 원탁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역'이나 다름 없었다.

자신이 하청 직원이라면, 시안은 원청 그룹의 사외 이사. 감히 가온이 넘볼 수 없는 높으신 신분이었다.

"괜찮아."

시안은 마법사답게 마법의 단어를 내비쳤다.

"내가 다 책임질게."

"...알았어요."

행여나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녹음해둔 대화를 그대로 재생하리라. 가온은 긴장으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오라클이 보낸 문자를 열었다.

[ㅇㅇ. 계좌 보내라. 다시 보내줄게.]

"......내가 친구 하나는 정말 잘 뒀어."

시안은 왼손으로 눈을 가리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온은 답장에 슬쩍 제 계좌를 적으려는 욕망이 피어올랐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제 돈 문제는 해결되셨네요. 그럼 이제 어쩌실 거예요?"

"몰라. 일단 돈 생겼으니 할 거부터 해야지."

시안은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냉장고에 있던 우유팩을 집어들었다.

애완동물 전용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녹색 우유에 가온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으웩."

"너 그러지 마라. 이거 드실 분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시안은 민트초코 우유가 담긴 그릇을 창가에 올려두고 창문을 열었다. 곧 기다렸다는 듯 창틀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가 주저앉아 햇볕을 쬐며 우유를 혀로 날름 핥았다.

냐아아아

"그래. 모자라면 더 얘기해."

시안은 고양이의 털을 손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사장님이랑 얘기해서 신메뉴로 민초 케이크 한 번 만들어볼까? 고양이 케이크 먹나?"

"고양이는 초콜렛 먹으면 안 되는데요."

냐아아아! 캬아아앙!

가온에게 격하게 으르렁거리는 고양이의 머리를 왼손으로 쓸며 진정시킨 시안은 창밖에 포진한 이들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아, 못 볼 것 봤네. 미안한데 좀 들어와줄래?"

시안은 고양이의 엉덩이를 손으로 잡아 사무실 안으로 들였다.

고양이는 제법 당황하면서도 멀뚱멀뚱한 얼굴로 시안을 쳐다보다가, 바깥의 인파를 보고 질린 목소리로 울었다.

"시안 님!!! 저도 당신의 길드에 들이게 해주십시오! 꼭 들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어떠십니까?! 개처럼 일할 자신 있습니다!"

"꺄아악! 시안 오빠!!! 사랑하니까 꼭 길드에 넣어주세요!!"

탕! 시안은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닫았다. 담배라도 있었으면 한 모금 빨아마실 분위기였다.

"김누리, 석하랑 이 망할 것들...."

두 물속성 이능력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사태는 3월 3일. 서울 지하 소탕 작전이 끝난 그 다음 날이자, 현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 * *

<3월 3일 오전 9시, 신서울 오라클 스튜디오.>

"아저씨, 그냥 마도기어 꺼놓는 게 낫지 않음?"

"안 돼. 중요한 연락이 올수도 있단 말이야."

시안은 사무실에 모인 이들의 마도기어를 전부 데스크 위로 올려둔 채 생각에 잠겼다.

착용자의 마력을 에너지로 사용하는만큼 따로 충전은 필수가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마력 소모가 극심해 탈력 증세를 일으킬 뻔 했다.

삐리리리!

이번에는 누리의 마도기어가 울렸다. 이번에는 아는 번호였다.

"지혜네? 이 썅 것이 나한테 왜 전화했지?"

"네 고등학교 절친?"

"절친 아니거든?"

"구(舊) 절친으로 정정."

절교한 동창과의 관계를 확실히 한 누리는 일부러 거절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헐."

[누, 누리야?! 나 지혜인데-]

[김누리 양! 저희 US 매거진과 인터뷰를-]

[오라클 스튜디오에서-]

파스스. 누리가 스크린을 손으로 흩어버렸다. 전화는 자동으로 종료되고, 시안은 피식 웃으며 컵을 들었다.

"아주 난리네, 난리. 너 이제 전화 못 받는다?"

"아저씨만 하겠음?"

"......하하."

시안은 영혼없는 웃음으로 마도기어를 툭 건드렸다.

마력이 현저히 낮은 시안으로서는 충전용 코어를 따로 사거나, 다른 이에게 마력 충전을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곧 꺼질 듯 붉은 경고 표시가 들어오자, 시안은 마도기어를 집어들어 누리에게 들이밀었다.

"네 걸로 좀 채워줄래?"

"......부끄러우니까 잠깐 화장실 가서 충전하고 옴."

"?? 뭐가 부끄러-"

누리는 시안의 마도기어를 낚아채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시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려다, 비어버린 오른팔을 두고 혀를 찼다.

"아. 이제 없지."

시안은 허전하고 어색한 느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항상 묵직하게 안정감을 갖게 해주던 코트 속 권총도 당장 시안의 몸을 떠나 있었다.

"......그냥 넣고 다닐 걸 그랬나?"

시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무거운 화분을 왼손으로 집었다. 병목을 꽉 쥐고 들어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약 1cm 정도 간신히 들어올렸을 뿐이었다.

"이거 어디 옮기실 겁니까?"

라온이 다가와 화분끝을 집게손으로 잡았다. 엄지와 검지, 그리고 마력의 힘만으로 시안이 끙끙대며 들었던 화분을 종이컵마냥 들어올린 라온이 눈으로 이동할 위치를 물었다.

"......내 책상 위에 올려줘."

"알겠습니다."

시안은 떨리는 왼손으로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고, 라온은 묵묵히 화분을 책상위에 올렸다. 시안이 왼손을 두어차례 쥐었다펴며 입맛을 다셨다.

"오른팔 있었으면 백 개도 거뜬히 움직였을텐데."

"역시 총의 반동을 의수로 제어하고 계셨던겁니까?"

라온이 마도기어의 알람을 끊고 시안에게 물었다. 시안은 왼쪽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렴 마력도 없는 내가 7kg 짜리 권총을 한손으로 그냥 들 수는 없지."

"의수는 또 어떻게.... 아닙니다. 물어봐야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라온은 제 아랫배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서울에서의 작전 덕분에 하단전의 코어가 더욱 견고해진 느낌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시안, 혹시 다음에 시간되면 '마력충전'을-"

"아저씨!!!"

누리가 문을 박차고 시안에게 달려왔다. 제 마도기어를 손에 올리고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상황에 시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너 왜 멋대로 통화를-"

[왜 또 내 통화 씹어요?]

스크린 속에는 백발의 히어로, 석하랑이 부루퉁한 얼굴로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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