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08화 (908/1,497)

EP.908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25

결국 밤을 새다시피 면접을 본 시안은 피부 미용을 이유로 협회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자율주행차를 이용해 사무실로 도망친 시안은 금방 팀을 해산시켰다.

- 혹시나 모르니까 너희 그냥 내일은 쉬어.

사무실의 위치까지 알려진만큼 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안은 홀로 독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국가 행사에 혼자서 나서는 것에 걱정이 많은 팀원들은 함께 나서기를 바랐지만, 몰려드는 인파에 팀원들은 부담을 느끼고 몸을 숨겨야 했다.

그리하여 하루 뒤.

시안은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2천억을 기탁해 자기 몫의 67억을 수령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이 사단을 만든 둘에 대해 원망 아닌 원망을 하게 됐다.

"싫다. 정말. 이러려고 조용히 살고 있는 건 아닌데."

"...이미 조용히 사시기에는 글렀지 않아요?"

가온은 민트초코 케이크의 레시피를 검색하고 있는 시안을 보며 질린 듯 물었다. 어느새 시안의 품에 자리잡은 고양이는 스크린 속 제빵 영상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시안은 고양이의 털을 손으로 쓸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게. 그냥 싹다 까발리고 살까? 어차피 나중에 터지나 지금 터지나 똑같을 것 같은데."

"자중하세요. 시안 님 <연금술사>이신 거 알면 세상이 난리가 날 걸요?"

냐아앙?!

고양이가 털을 쫑긋 세우며 시안의 무릎에서 굴러떨어졌다. 시안은 아무렇지 않게 고양이를 다시 집어올려 더 섬세하게 털을 쓸었다.

"엉켰나? 미안해. 착하지, 착해."

냐, 냐아아아~

고양이는 시안의 허벅지에 올려져 그대로 눈을 감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고양이 덕분에 시안은 느긋하게 고양이의 털을 쓸며 심신을 위로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가온이 일어서서 현관문을 열었고, 문앞에는 커피 박스에 음료를 들고 온 후안이 있었다.

"사장님? 카페 비우셔도 돼요?"

"사람들 다 쫒아내고 임시휴점 했다네. 뭐 장사를 할 수 있어야지."

후안의 말에는 뼈가 실려있었다. 그는 어딘가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자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후안은 독기를 품고 시안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참에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건 어떤가?"

건물주가 갑질을 시작했다.

* * *

사각, 사각.

유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깎았다. 최근들어 유나는 쉬는 날이면 부쩍 부엌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요리 실력은 날로만 늘어갔다. 발렌타인이 지난 이후, 부엌에는 유나가 사온 온갖 제과제빵용 물건들도 늘어갔다.

"베이킹 파우더 어디있어요? 지난 번에 엄마가 쓰지 않았어요?"

유나가 거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TV를 보던 유나의 부모는 TV와 부엌을 번갈아보며 혼란에 빠졌다.

"...찬장에 잘 찾아봐!"

"알었어요~ 흐흥~"

유나는 벚꽃 향기가 물씬 풍기는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베이킹 파우더를 넣고 반죽을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신혼 살림을 차린 새댁같아서, 딸만 아니었어도 흐뭇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부엌에도 딸이 있고, TV에도 딸이 있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뉴스 채널이든 트는 족족 딸과 그 지인의 소식이 비쳤다.

[서울의 영웅! 2천억의 호구! 그가 근무하는 오라클 스튜디오가 사실은 한국에 길드를 차리려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데요, 도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여쭤봤습니다!]

[외국 자본이기는 하지만 길드 구성원으로 순수 한국인을 고용한다는 점에서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내수 경제에 큰 활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핵심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1월 경 빠르게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 스튜디오가 한국에 남게 된 것은 모두 E급 히어로 이유나 양의 덕분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히어로 아카데미의 E급 히어로로 최근 자퇴를 하였으나, 오라클 스튜디오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스튜디오의 일원으로서....]

[혹자는 현행법상 외국인이 길드장이 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오라클 스튜디오의 길드가 길드장으로 이유나 양을 세운다는 관계자의 진술을....]

"......그러니까 부엌에서 애플 파이 굽고 있는 우리 딸이랑 TV 속 저 아가씨랑 같은 사람이라는 거지?"

유나의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TV 속 이유나에 대한 가십거리들을 주시했다.

서울의 영웅, 시안과 딱 달라붙어 다니는 그 이유나는 냉철하고 이지적인 얼굴로 시안을 옆에서 보좌하거나 때로는 이끄는 모습이 파파라치들의 사진에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 때 이야기한 스타트업이...."

"......."

부부는 기억을 더듬었다. 설에 트러블이 있었던 이후로 유나와의 관계에 어딘가 벽이 생긴 느낌은 들었지만, 설마 그 사이에 이런 엄청난 행보를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신은 미리미리 안 물어보고 뭐했어요?"

"그냥 나중에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잖아...."

"어, 저네요?"

부엌에서 커피를 타온 유나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았다. 미리 구워놓은 애플 파이가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를 내며 거실을 훈훈히 채웠다.

"사진 좀 더 예쁘게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저기, 유나야? 저거 진짜 너-"

삐비비! 유나의 마도기어에서 호출이 울렸다. 유나는 맛평가을 위해 한 입 베어물었던 애플 파이를 꿀떡 삼키며 호출에 응했다. 부부는 무심한 척 귀를 쫑긋 열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유나야, 지금 시간 돼?]

부부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시간 전까지 공식 행사에서 감사 인사를 낭독하는 그 금발 외국인의 목소리였다.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그럼 지금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그런데....]

"어디요?"

[우리가 함께 할 새 보금자ㄹ-]

쿵. 유나가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

부부의 시름이 깊어졌다. 애플 파이 위에 얇게 슬라이스된 사과는 하필이면 또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10분 뒤.

"엄마, 미안한데 부엌 좀 봐주세요!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

"부동산이요!"

유나는 베이지색 코트에 갈색 단화를 신고 부리나케 현관을 뛰쳐나갔다. 부부는 TV를 끄고 지난 한 달 간의 유나의 행적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혼수일까?"

"여보, 어떡하지. 나 외국인 사위 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자. ...2천억이라. ...."

* * *

"......새 사무실 얘기였어요?"

"응. 그렇게 됐어."

시안은 자율주행차의 문을 열며 유나를 맞이했다. 유나는 조수석에 앉아 주변 행인들을 살폈다. 유나를 보고 수근거리는 게 벌써부터 얼굴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쉬는 날 불러서 미안."

"아녜요. 시안 님 부르시면 언제든지 올 수 있어요. 그보다 갑자기 사무실은 왜...?"

"후안 사장님이랑 이야기를 좀 나눴거든."

시안은 후안이 고충을 토로하며 사무실 이전에 대해 언급했던 자세한 내막을 읊었다.

누리의 잠재 S급 판정 이후 손님이 늘어났을 때는 상당히 기뻐했다. 아는 단골 손님만 오다가 문전성시를 이루며 매출이 눈에 띄게 늘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약 한 달 가까이 흐르며 너무 많은 손님이 와버렸다.

문제는 이 손님들이 후안의 카페 경영 철학과는 맞지 않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대부분 누리랑 말 한 번 붙여보려고 찾아온 헌터들이 대부분이었죠?"

"응. 사장님이 상당히 골치아프셨나봐."

그리고 시안의 팀이 서울에 올라간 시점, 진상이 나타나 1층 카페를 뒤집어 놓았다.

"젊은 여자가 장정들 힘으로 다 내쫓고 난리도 아니었다더라. 사장님이 진짜 느긋하게 커피 원두를 엄선해서 만드시는데 너무 바빠서 질을 살짝 떨어뜨렸어. 그 조금 차이 때문에, 앞으로 이 상태가 계속 되면 자기는 앞으로 여기서 커피를 살 수 없다나 뭐라나."

시안은 카페에 왔던 첫 날, 커피 원두를 잔뜩 사가던 여성을 떠올렸다. 커피향을 물씬 풍기던 그 이상한 여자.

"...?"

"갑자기 왜요?"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그 손님이 한 번 제대로 가게 엎고 나서, 사장님도 뭔가 깨달음이 있으셨나봐. 그런데 그 상황이 되어버린 거지."

"100명의 손님보다 내 커피 맛을 알아주는 한 명의 고객이 소중하다는 건가요. 뭔가 장인 정신 같은게 느껴저서 새삼 놀랍기는 하지만...."

"건물주 시지."

"건물주 시죠."

후안과 시안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였다. 당장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쫓아내지 않은 것 만으로도 시안은 감사를 표해야 했다.

"그럼 아예 사무실 옮기실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기존의 사무실은 내가 공방으로 쓰고, 새로 사무실 하나 구할 거야."

시안은 자율주행차가 목적지에 다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유나에게 밖을 가리켰다.

"마침 좋은 매물이 하나 나왔거든."

자율주행차가 멈춘 곳은 그들의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고층 건물. 1층부터 꼭대기까지 유성과 관련된 건물들이 가득했고, 꼭대기에는 라는 길드 간판이 걸려있었다.

"......여기 혹시."

"응. 맞아."

시안이 목을 꺾었다.

"내가 처음 살려고 했던 곳."

* * *

"형님은 또 왜 여기서 나와요?"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유성 산하 조직이잖아. 하하!"

하유준은 껄껄 웃으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유나는 정말 질렸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유준 씨는 유성 고위 관계자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요."

"응?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내가 유성 회장이라니까!"

하유준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랑했다. 시안은 하유준의 허풍을 한 귀로 흘리며 계약서를 다시금 확인했다.

"메그레즈의 사무실을 그대로 이어받는 대신에, 유성에서도 우리 길드에 지분을 조금 넣는다?"

"정확히는 나중에 길드를 만들었을 때. 지금은 그냥 사무실 임대로만 하고, 나중에 길드를 만들면 정식으로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는 거지."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만...."

시안은 뒷말을 흘렸다. 그가 처음에 이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잡상인'이 따로 드나들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1층에 유성의 이능력자가 경비도 서주고, 여기서 숙식이 다 해결 가능하잖냐. 솔직히 내가 봐도 이만한 곳이 없다?"

".......형님. 뭐 숨기시는 거 없습니까?"

시안은 아무도 없는 메그레즈의 사무실을 가리키며 따지고 들었다.

"여기 길드장이 병원에 입원한 건 이미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길드를 처분할 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사람도 다 빠져나갔고. 형님 진짜 유성 관계자-"

"......그런 건 아니고, 너한테 꽤나 관심있는 사람이 한 '분' 계시거든."

하유준은 난처한 얼굴로 시계를 눈으로 흘겼다.

"왜, 내가 지난번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한 명 길드에 넣어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냐?"

"그거야 기억하죠. 그런데 그게.... 설마?"

하유준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분이 이번 서울 사건을 보고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더라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분 얘기랑 이 사무실이 무슨 관계죠?"

유나가 계약서를 손으로 짚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안이 일부러 휴일임에도 유나를 불러낸 이유는 당연히 길드장이 시안이 아닌 '유나'이기에, 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명목이 있었다.

둘이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느니 오른팔을 잃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속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나는 시안에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잠시만요."

유나의 지적 덕분에, 시안은 뭔가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형님이 말씀하신 그 분이 이 길드의...."

"응, 맞아. 나는 그 분의 대리인 같은 거지."

끼이익. 철문이 열렸다. 향긋한 커피향이 사무실 안에 풍겼다. 하유준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흠."

찰랑거리는 금발. 작은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거대한 선글라스. 코어가 녹아든 신소재 공정으로 제작된 최고급 가죽 코트.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금발 여인의 등장에 시안과 유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유성가 개망나니?"

"시안 님!"

그걸 진짜로 입 밖으로 말하면 어떡해. 유나는 시안의 허리를 찔렀고, 시안은 아차싶어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괜찮아요. 내가 개망나니인 거 나도 아는데."

여인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소파 상석에 앉았다. 하유준은 그대로 의자에서 비켜서 밖을 향해 움직였다.

"저기, 형님? 갑자기 자리 비우시면...."

"신경쓰지마요. 저 뻥쟁이는 지금 나 마실 커피 가지러 가는 거니까. 그보다 시안 씨.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요."

금발의 여인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씩 웃었다. 여인의 눈동자에는 금빛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 길드에 내가 들어가는 대신, 지참금으로 이 사무실 빌려드릴게. 어때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여인에게서는 커피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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