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0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외전 01
2025년 3월 10일 월요일.
시안은 오라클 스튜디오의 본격적인 새단장 날짜를 지정했고, 그 날을 시업식으로 본격적인 행보를 나서기로 했다.
건물주이자 길드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망나니에게 또다른 케이크를 바쳐 메그레즈의 집기들을 물려받은 시안은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새단장을 했고, 후안의 건물 위 2층 사무실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연구 공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약 닷새의 여유.
시안은 본격적으로 그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시업식을 하기까지, 수많은 이들과 교류하며 있었던 일들을 나열한 일화들이다.
* * *
<사건1> 크림 파이 대소동
"유나야. 너 알고 그러는 거니?"
"네? 뭘요?"
시안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나를 노려보며 속내를 캐내려 안간힘을 썼다. 유나는 멀뚱멀뚱 시안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고, 시안은 거기에 가슴이 두근거려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 크, 크림 파이 말이야."
"아. 크림파이요?"
유나가 손뼉을 치며 생글생글 웃었다.
"유성 베이커리 메뉴에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쵸?"
"그건 그렇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이후, 둘은 후식으로 진짜 크림 파이를 찾으러 유성 베이커리에 들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크림 파이는 없었고, 둘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건물을 나섰다.
"시안 님. 레시피 있으시죠?"
"응. 잠시만."
시안이 마도기어에서 크림 파이의 레시피를 꺼냈다. [크림 파이]라고 간략히 적힌 레시피에는 시안의 꼼꼼한 메모와 깨알같은 팁이 적혀있었다.
"커스터드 크림.... 우유랑 설탕.... 그렇게 막 많지는 않네요?"
"그렇지.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그러면 시안 님. 어차피 좀있다 사무실 가신다고 하셨죠?"
유나가 마도기어를 조작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네! 사장님, 저 유나에요. 다른게 아니라, 좀있다 사장님 부엌에서 크림파이 만들어도 돼요?"
"......."
시안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왠지 미래가 예상되어, 마음 속으로 미리 할 말은 연습했다.
* * *
"영업 방해로 경찰 부를 뻔 했다네."
"오해입니다."
시안은 입에 붙은 이 말을 아예 녹음이라도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독 한국에 와서 이런 오해를 사는 일이 많았다. 시안은 자신의 마도기어 속 크림 파이의 레시피를 공유하며 오해를 풀었다. 오른손이 사라졌기에, 한손으로도 조작 가능한 임시 패드를 구해 마도기어와 연동시켰다. 후안이 레시피를 진지하게 살피며 감탄했다.
"호오. 기본에 충실하군. 자네, 이것도 혹시 올려도 되겠나?"
"네. 오븐 빌리는 데 그 정도는 당연하죠."
시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의 조리 기구들을 챙기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흰 앞치마에 제빵용 모자로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유나의 모습에 시안은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 ...후후, 브이!"
유나가 시안을 바라보더니 브이를 그리며 웃었다. 시안은 퍼뜩 마도기어를 유나에게 향해 사진을 찍었고, 유나가 쫄래쫄래 걸어와 사진을 확인했다.
"잘 나왔어요?"
"응. ...예쁘게."
"후후, 나중에 보내주세요."
유나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고, 시안은 헤실거리며 유나의 사진을 손으로 쓸었다. 후안은 유나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혀를 내둘렀다.
"저런 타입의 여자는 정말이지 무섭단 말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네는 몰라도 되네. 아니, 모르는 게 약이야. 만약 내가 알려주려고 하면-"
"사장님! 볼 이거 써도 돼요?"
"...쓰시게."
후안은 몸을 오들오들 떨며 부엌을 빠져나갔다. 시안은 사진을 집어넣고 유나의 옆에 서서 재료를 가리켰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럼 시작할게요."
유나는 달걀을 깨뜨렸다. 커스터드 크림을 위해 시안이 다른 재료를 꺼내 옆에 두고, 유나는 그 레시피 대로 가루들을 부었다.
"시안 님."
"응."
"시안 님은 하얀 쪽이에요, 아니면 노란 쪽이에요?"
"......쿨럭."
시안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설탕을 손으로 콕 찍어 단 정도를 확인하던 유나는 입술에 검지를 올린 채 시안에게 답을 재촉했다.
"시안 님?"
"...나, 나는 하얀 쪽이야."
"아, 그러면 노른자 빼고 할 걸 그랬나?"
"...흰자 좀 더 섞고 다른 거 비중 그만큼 맞추면 돼."
시안은 십년감수 한 얼굴로 속을 쓸어내렸다. 유나는 시안의 말대로 노른자를 빼내어 흰자만 남긴 채 재료를 섞었다. 상대적으로 노란 빛이었던 크림이 아주 약간 연노랑색으로 변했다.
"다음은 우유를 부어야 하는데...."
시안은 미리 데워둔 우유를 유나에게 건넸다. 유나는 우유의 양과 레시피의 팁, 그리고 섞인 재료를 번갈아보며 질문했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시안 님은 걸쭉한 쪽이에요, 아니면 묽은 쪽이에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크림 얘기요. '완전 꾸덕꾸덕하게 하려면 걸쭉하게 크림을 만들고, 말캉한 질감을 유지하려면 우유를 넣어 살짝 묽게 하라.' 여기 팁에 적혀있는 걸요."
"...아, 그랬지."
시안은 과거의 자신을 순간적으로 원망했다. 쓸데없이 왜 그런 팁을 적어서 지금의 자신을 오해하게 만든단 말인가.
"...난 걸쭉한 편이지."
"그럼 조금만 넣을 게요."
유나는 우유를 붓고 거품기로 크림을 휘휘 저었다. 우유가 들어갔음에도 찐득하고 질척거리는 크림에 시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버터 좀 넣어서 같이 해도 될 것 같은데."
"여기까지는 베이스야. 그 뒤에 더 첨가하는 건 개인 취향이지."
"흐음, 그래요? 그럼 치즈 좀 갈아서 넣는 건 어때요?"
"유나가 좋으면."
시안은 유나의 취향에 맞추어 갈아넣을 법한 치즈를 찾았다. 유나는 시안이 건넨 치즈를 받아 강판에 갈아 가루를 내며 말했다.
"빵은 뭐로 하는게 좋을 까요? 파이지?"
"글쎄. 그게 기본이기는 하지."
"그렇네요. 그럼."
유나가 치즈가루까지 완전히 섞은 크림에서 거품기를 집어올렸다. 찐득하게 묻은 크림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유나는 질게 늘어진 크림을 손가락에 감았다.
"시안 님. 이거 맛...."
손가락을 뻗으려던 유나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뺐다. 시안은 그 풋풋한 모습에 피식 웃으며 휘핑기의 크림을 손가락에 올렸다.
"한 번 먹어볼까?"
"......네."
둘은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쪽 빨아먹었다. 유나는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맛을 느꼈고, 시안은 손가락을 빼내 물로 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잘 굽기만 하면 되겠다."
"이게 시안 님의 크림...."
"파이 레시피지."
시안이 재빨리 보충했다. 뒤에서 후안이 도끼눈을 뜨고 부엌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시안은 오해라는 듯 손사레를 쳤고, 유나가 후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어? 냄새 되게 좋네요. 사장님 또 부엌에-"
"가온. 지금은 부엌 방해해선 안 된다."
"아. 새 레시피 연구군요. 알겠습니다."
부엌 진입을 시도하던 가온이 후안에게 제지당했고, 시안은 안도하며 파이지를 트레이에 펼쳤다.
"그럼 올리자."
"네."
정갈하게 펼쳐진 파이지 위에 연노랑 커스터드 크림이 올라가고, 유나가 섬세한 손길로 파이지 모서리의 끝을 모아 오므리며 모양을 잡았다. 시안은 옆에서 사진을 찍었고, 예열해 둔 오븐에 크림 파이가 들어갔다.
"이제 굽기만 하면 끝이야."
"뭔가 쉬운 듯 어렵네요. 시안 님.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응."
"시안 님이 제일 좋아하는 빵은 뭐에요?"
기호에 대한 질문인가. 시안은 왼손으로 턱을 쓸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낮게 웃었다.
"호빵. 만졌을 때 말캉하고, 베어무는...."
"......."
유나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시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해야그러니까이건그냥내가그런푹신푹신한촉감을좋아한다는거지결코그걸로다른비유를하려는게아니-"
"저는 바게트 좋아해요."
유나가 싱긋 웃으며 앞치마를 풀었다. 시안이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굵고 길며 딱딱한 바게트...응? 시안 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오븐이 띵 소리를 내기 전까지, 시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기다려야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허리를 숙여 오븐의 트레이를 꺼내는 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안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고민하고 고민했다.
'오해겠지.'
* * *
사건 2 <ㄹ와 ㄱ의 차이>
"옷 입어요!"
"싫습니다."
"여기 우리 집이야!"
"주신 속옷이 하나도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습니다."
"끼아아아아아악!!"
가온은 바닥에 네 발 짐승처럼 엎드려 절규했다. 타이트한 흰 쫄티에 핫팬츠에 가까운 반바지를 입은 라온은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캔맥주를 마셨다.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입고 다녀도 돼요?!"
"박스티라고 하셔서 받은 게 이거 잖습니까."
가온은 땅을 쳤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힙합 박스티 중 가장 큰 것을 라온에게 입으라고 줬지만, 라온이 정작 그걸 입으니 탱크탑 수준의 타이트한 배꼽티가 되어버렸다.
체격차이. 가온은 기자들을 상대로 누리 행세를 할 정도로 누리와 체격이 비슷했고, 라온과 자매 간의 신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럼 최소한 속옷이라도 입으시던가! 껴도 입으세요, 아니 입어!"
"...그렇게 입었다가 터지지 않았습니까. 두 개."
"끼에에에에엑!!"
가온이 짐승처럼 절규하며 다시 땅을 쳤다. 이미 옆에 앉아있던 누리는 해탈한 얼굴로 안주인 양념치킨의 닭다리를 베어물었다.
"그나마 유나 언니한테 받아온 옷도 안 맞지, 라언니?"
"조금 갑갑하긴 합니다만, 그보다 그 '라언니'는?"
"김가온이랑 구분하려고. 그냥 언니라고 하면 저게 진 줄 알거든. 라언니, 괜찮음?"
"대환영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라온이 캔맥주를 내려놓고 닭다리에 손을 뻗었다. 가온의 젓가락이 라온의 손가락 끝을 가로막았다.
"어디서 식객이 닭다리에 손을 대려 하세요?"
"닭다리는 네 개 잖습니까. 아직 두 개 남았습니다."
"양념치킨 닭다리는 이제 하나 남았잖아요."
"간장 드시길 바랍니다. 두 개 다 드리겠습니다."
"싫어요. 당신이 샀어요?"
"누리가 샀잖습니까?"
가온과 라온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누리는 닭다리를 깨작거리며 제게 불똥이 튀기 전에 빠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저씨 올라와서 먹으라고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가온이 라온을 가리키며 성질을 냈고, 라온도 어깨를 움츠리며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누리는 볼을 긁적이며 시안이 언젠가 지나가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온 라온 한 글자 차이인데 진짜 서로 안 맞네.'
성은 김과 박으로 달랐지만, 둘은 정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누리와 라온이 초창기에 트러블이 있었던 것은 맛뵈기였다는 듯, 둘의 트러블이 너무 잦아 시안이 일부러 둘을 따로 떼어놓을 정도였다.
'차이는...확실하지.'
누리의 시선을 느낀 가온이 눈을 치켜뜨며 누리의 무릎을 발로 툭툭 밀었다.
"야, 김누리. 너 지금 왜 눈을 그렇게 떠? 어딜 꼬라봐?"
"미드. 압도적인 미드 차이 오졌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가온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누리는 그에 피식 웃으며 닭다리의 뼈를 비닐봉지안에 툭 던졌다.
"김가온 꿈 깨라. 네 성장 한계는 그게 끝이야."
"너, 너, 너는 다를 줄 알아?!"
"응 나 어둠 속성 94. 아저씨 따라 던전 가면 95찍고 SS급 가능. S급 자동 보정에 따라 쭉쭉빵빵 폭풍성장 가능."
"끼아아아아아악!!"
가온이 바닥을 구르며 발버둥쳤다. 술이 들어간 덕분인지, 그는 평소보다 감정 표현이 격했다. 가온의 눈이 라온의 흉부를 향해 스쳤다 다시 발광하기 시작했다.
"억울해! 같은 A급인데 왜 나만! 나마아아아안!"
"...전 A급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라온이 가온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D급입니다."
"흐어어엉, 흐어어어."
쿵쿵쿵! 가온이 바닥을 두드리며 절규했다. 그게 분명히 이능력자로서의 마력등급을 언급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왠지 다르게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라언니가 좀 대단하긴 하지."
"야 김누리! 너 누구편이야?!"
"미친 년. 니 편이겠음?"
"흐어어엉! 하나 뿐인 동생 년이 언니 편은 안들고 다른 여자랑 붙어먹고오오!!"
가온이 설움에 눈물까지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라온은 양념이 묻은 닭다리를 뜯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근접탱커랑 근접딜러는 일심동체입니다. 그리고...."
"김가온 너는 모르는 공동전선이 하나 있거덩."
그들은 자매이며, 동료이며, 전우였다. 가온은 둘 사이의 혈연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며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드르륵. 현관문이 열렸다. 가벼운 잠옷을 입은 시안이었다.
"얘들아, 왜 이렇게 시끄럽-"
"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시안이 거실의 행태를 보고 당황해 몸을 돌렸다.
여자 셋이서 가볍게 치킨을 안주로 술 자리를 가지고 있는 옷차림은 시안이 말로 하기 어려울 만큼 과감했고, 그나마 묘사할 수 있는 라온이 가장 건전한 옷차림이었다.
"여성들의 울음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만."
"...오해입니다."
DB61-39UCT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