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7 2부 9장 23 어떻게 히어로 이름이
'흑역사를 만들어내는 미래의 또다른 자신을 보다니, 끔직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저런 식으로 미래의 내가 보이는 모습을 보면 미쳐버리기 마련이다.
과거의 흑역사를 두고 후회하는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괜찮다.
하지만 미래의 자신(이었던) 존재가 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도 혹시 저럴까' 싶어서 흑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에 더불어 자괴감이 들게 된다.
"저기, 지휘관 님."
히카리가 슬쩍 다가와 내게 로하랑의 전투 화상을 가리켰다.
SS+급 히어로, '설야'로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녀는 현재 미스 타바스코, 라스푸틴, 기타 이름을 언급하기도 귀찮은 이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보이고 있었다.
"저게 SS+급의 힘인가요?"
"그렇지."
부산 하늘 전체를 수놓는 얼음나비들의 향연.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어붙은 삼지창.
날개가 없는 이상 오를 수 없는 빙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30분도 넘게 유지하면서 호흡 한 번 거칠어지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 로하랑.
S급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마력의 힘을 사용하는 자.
저것이 바로 반신의 경지이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궁극의 끝자락이다.
"설야 님, 정말 강하네요. 그런데 저렇게 강한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요?"
"역효과?"
"석하랑이 강해진 만큼 나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 지휘관의 힘만 얻으면 나도 저만큼 강해질 수 있다. 힘에 대한 갈망은...정말 크잖아요."
히카리는 누구보다도 힘을 원하던 여인에게 오랫동안 감금되어있었다.
그랬던 만큼 그녀는 지휘관의 마력공급을 원하는 이들을 보는 시각에서 누군가의 익숙한 모습을 느꼈을 것이다.
힘에 대한 간절함.
힘에 대한 절박함.
자신의 이능력에 대해서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히카리로서는 감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단지 민트김치초코와 파인애플피자 등으로 식고문 아닌 식고문을 받으면서 문신사의 열망을 옆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경험으로 이해한 것일 뿐.
"설야 님이 반신의 힘을 보이면 보일수록 지휘관에 대한 갈망은 더욱더 커질 거예요."
"그래서 설야보고 말하라고 했잖아. '나를 이기면 지휘관과의 마력공급을 허락하겠다'라고."
지휘관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지휘관과 마력공급을 하려면 마법소녀를 뚫어야 한다.
"마왕성에 있는 마왕을 다이렉트로 만나는 경우를 봤어? 최소한 사천왕 중 한 명이라도 꺾고 와야지."
"하긴. 사천왕도 안 만나고 마왕을 만나면 사천왕이 혼나야죠."
"그렇지. 마왕을 죽일 수도 있는 용사가 사천왕을 스킵하고 왔는데, 이건 용사가 너무 강한 문제가 아니라 사천왕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생긴 일이니까."
"설야 님은 그러면 사천왕 중 최강자 포지션인가요?"
"아니. 북부대공 같은 느낌이지."
마왕성의 사천왕은 아니지만 한쪽 전선을 책임지는 존재.
"설야가 부산에 있으면 비행기 타고 날아오는 것들을 대부분 처리할 수 있어. 계속 도전하는 무리가 있으면 하랑이도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질서가 잡히고 위엄을 보이면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녀석들은 설야 선에서 걸러지겠지. 저거 봐봐."
카가가강!!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창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깨, 다리, 팔 등 몸을 꿰뚫은 얼음창은 피가 뿜어질 새도 없이 사람을 한순간에 냉동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그 대상은 S급 화속성 히어로도 가리지 않았다.
설야, 얼음의 반신 앞에서는 그저 S급도 조금 귀찮은 존재일 뿐.
"히카리. 지금 설야가 얼려버린 S급이 몇 명이지?"
"확인된 바로는 미스 타바스코, 라스푸틴, 콩키스타도르, 어, 또…."
"총 몇 명?"
"...13명입니다."
30분.
설야가 13명을 얼리는데 걸린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설야는 상처를 입었나?
그렇지 않다.
로하랑은 처음 나타난 그 자리에서 계속 서있었다.
"30분 동안 설야의 마력이 줄어들었어?"
"아니요. 마력탈진이 일어난 모습은 없었습니다. 마치 무한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변 대기에 퍼진 마력이 설야에게로 모여들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처음이에요."
히카리는 설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력의 흐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게, 다른 SS+급들의 마력 패턴과 달리 로하랑의 마력 패턴은 상당히 특이할 수밖에 없다.
'정령'이니까.
지금은 반인반령이지만, 셀프 싱크로에 진정으로 성공하는 날이 되면 반신반령의 존재가 될 것이다.
다른 SS+급이 원자력발전소 수 개 분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면, 로하랑은 대자연에 퍼진 모든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지휘관 님. 저 얼음인형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기회를 제공해야지. 과연 정당한 루트로 도전할 건지, 아니면 계속 뒷 길로 나를 노리려고 할 건지."
간절함에 대한 건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히로인 빼고 전부 죽인다고는 했지만,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다.
그러니 한 번은 기회를 준다.
아무리 이 몸이 남자라고 한들, 그 속에 있는 신라와 큥큥을 하려고 한 죄.
지구를 구하기 위한 '선의'라면 나 또한 한 번의 선의를 제공할 것이며, 지휘관과의 관계를 통해 뭔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나는 당연히 악의를 제공할 것이다.
"용사면 용사답게 마왕성 정문으로 와야지."
히어로는 뒷 길로 마왕성 옥좌의 후방을 노리지 않는다.
그게, 히어로니까.
* * *
부산.
"너희들은 이제 움직이지 못 한다."
사아아.
빙벽 아래로 살포시 내려온 석하랑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했다.
완전한 어린 아이에서 조금은 키가 큰 성인 어른이 된 그녀는 마치 '이 모습'이야말로 설야의 진짜라는 듯, 강력한 힘을 뿜어내며 주변을 압박했다.
"나는 지휘관의 대리인이며, 지휘관의 첫번째 창이며, 지휘관을 지키는 영구동토의 방패일지니."
석하랑의 말은 한기가 되어 이능력자들의 전신을 차갑게 만들기 시작했다.
몸 안에 흐르는 피조차 천천히 흐르기 시작할 정도였고, 이능력자들은 마치 익사하는 것 같은 기분에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부산에 있다. 지휘관과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주마."
"크윽, 지휘관 덕분에 강해진 주제에…!!"
이국적인 외모의 여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석하랑을 비웃었다.
"설야라고 했지?! 당신,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지휘관한테 먼저 다리 좀 벌렸다고 유세 떠는 거, 역겹다고!"
"어쩌라고?"
석하랑은 자신을 향한 성적 욕설을 내뱉는 미스 타바스코를 향해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히어로도 헌터도 아닌 빌런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닌 걸."
"하! 내가 빌런이라고? 자기한테 반기를 드는 모든 사람이 다 빌런인가봐?! 그래서야 여기 독재자 놈이랑 다를 바가 없네! 누구는 3cm더니, 누구는 AAA인 게 이유가 있나봐?!"
"......도랐나, 이게."
석하랑은 얼음의 창을 손에 움켜쥐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창 끝은 미스 타바스코의 목을 정확히 겨냥했고, 석하랑은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로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본보기를 보여야 정신을 차리겠네."
"하! 나를 찌르면 우리 길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걸?! 나는 멕시코를 대표해서 온 사람이라고!"
"멕시코 정부가 과연 너를 보호해줄까?"
사라락.
석하랑이 마도기어를 두드려 화상 하나를 그녀에게 보였다.
미스 타바스코는 자신의 앞에 보인 여러 화상과 자료에 기겁을 하며 주변을 급히 살폈다.
"아, 아니야! 이거, 날조야!!"
"안심해라. 네게만 보이는 것이니."
"......."
다른 이능력자들은 힘겹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미스 타바스코는 자신을 향한 수 만의 눈동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화상으로 보이는 자료가 세간에 퍼진다면, '그'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손절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이 자료를 손에 넣었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원탁'에서 마저도 불법으로 지정하는 마약은 아무리 S급 이능력자라도 비난 받아 마땅한 물건이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고. 아, 아아. 여기는 설야."
석하랑이 마도기어를 잡고 누군가를 호출했다.
[찾았어?]
"예. 멕시코에서 온 '미스 타바스코'.... 아니, 국제수배 중인 S급 빌런 '아즈테카'를 잡았습니다."
"뭐, 뭐라고?!!"
미스 타바스코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빌런이 아니야!!"
[멕시코 협회랑 이미 확인 절차를 마쳤다. 협회장이 그러더군.]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차갑게 굳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신들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던 '지휘관'이라는 걸.
[미스 타바스코는 멕시코 공항에서 구출에 성공했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오면 누가 못 알아챌 줄 알았나?]
"뭐, 뭐…?!"
[제거해.]
"아, 아니야!! 나는ㅡ!"
쩌저적.
미스 타바스코, 아니 미스 타바스코로 둔갑한 아즈테카는 악을 쓰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지어 S급 이능력자를-심지어 이국적이기도 하지만 슈퍼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인이 악귀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얼어붙자,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그 표정은 마치….
"하드코어 포르노에서 나올 법 한 표정이군."
"전투섹스를 하는 표정이야."
"저런 표정으로 지휘관을 범하려고 한 거겠지? 으으, 빌런 놈…!"
...빌런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에 분노한 표정과도 같았다.
"또."
석하랑은 얼음창을 휘두르며 다른 이능력자들을 향해 겨눴다.
"지휘관 님을 노리고 이 땅에 찾아온 빌런은 누구지?"
누구도,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 * *
"진짜예요?"
"진짜야. 멕시코 협회랑은 방금 전에 연락이 닿았어. 연락 닿자마자 내가 하랑이한테 연락했잖아."
"아뇨. 저 여자가 미스 타바스코가 아니라는 거요."
"그건 거짓말이지. 멕시코 협회장이 마약왕이거든. 쟤 지금 손절당한 거야."
미스 타바스코는 빌런 아즈테카가 맞다.
하지만 우리가 힘으로 찍어누르자, 마약왕도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지 아즈테카를 버렸다.
"사람 호칭이 어떻게 미스 타바스코겠어?"
아무리 멕시코라고 해도 성의가 있고 정도가 있지, 타바스코가 무엇인가.
"웃긴 히어로 닉네임 순위를 따지면 쟤가 S급 1등 할 걸?"
"S급 1등은 따로 있지 않아요?"
"......."
나는,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꼈다.
"웃긴 히어로 닉네임, 1등이 '무궁화 보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