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0 [현실외전] 황금연휴를 지내는 방법 No.7 은유하
"와, 연휴다."
나는 양손 가득한 스팸 세트와 참치 세트를 땅에 내려놓았다.
"대기업 부장님 클라스 한 번 대ㅡ단 하시네."
명절 선물이라고 회사 부장과 이사가 돌린 선물은 정말이지 '체면치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떠랴, 체면치레라도 안 주는 것보다는 감사하지.
'하긴 내가 뭐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명절.
황금연휴.
아는 지인의 회사에서는 명절 당일에도 서버를 관리하라고 부른다던데, 다행히 내가 일하는 팀은 오로지 순수한 연휴가 되었다.
출장도 없다.
계획이라고는 그저 휴식과 휴식, 휴식 뿐.
통장에 쌓이는 떡값과 출근 없이 연휴 내내 휴식이 보장되어있다면 선물 정도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이 선물상자 2호와 3호에서 내용물만 꺼내 펜트리에 적절히 넣은 다음, 스팸 하나를 꺼내서 적당히 기름기를 빼내고 구워서 케첩과 함께 찍으며 저녁을 먹으면 된다.
그게, 섹스지.
자취하는 남자에게 있어서 명절 선물은 대량의 기름은 처치가 곤란하지만, 스팸만큼 적당히 식사를 때우기 좋은 게 또 없다.
살?
명절에 찌는 살은 누구나 허용 가능한 범위다.
그러니 이제 집에 가서ㅡ
"선배님!"
"......."
옆에서 갑자기 금발 머리가 웃으며 다가왔다.
갈색 정장 차림인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선물세트를 손에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선배님, 연휴 때 뭐하세요?"
"집에서 쉴 거야."
"고향은 안 내려가시고요?"
"내게는 고향이 지금 집이거든. 이번 추석도 혼자 지내."
무안하지 않게 최대한 돌려서 말했지만, 괜히 오해를 하는 게 아닐까 신경이 쓰였다.
"아아...."
다행히 나의 직속 후배, 은유하는 바로 내 말을 이해했다.
똑똑한 녀석 답게 내가 하고자 한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알겠어요. 근데 이번 추석'도' 혼자? 설에는요? 지난 연휴 때는요?"
"지난 연휴 때는...."
혼자.
혼자.
...혼자.
"선배 집 놀러가도 돼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여자가 놀러온다고?
그것도 유하같은 미녀가?
갑자기?
내 집에?
설거지 어제 했나? 방 청소는 제대로 됐나?
침대와 컴퓨터 옆에 두루마리 휴지를 뒀었나?
"저, 연휴 때 이번에 안 내려가거든요. 저 심심해요. 네?"
머릿 속으로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선배 지난 번에 N플렉스 새로 가입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에 신작으로 큥큥 게임 나왔다고 하는데, 그거 보셨어요?"
"아직...."
"그럼 같이 볼래요? 맥주랑 안주 좀 해서."
"오...."
여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남자를 정말 미치게 하는 말이다.
혹시 이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정말 그 의도로 접근하는 건가 장밋빛 망상을 하게 된다.
'정신 차려.'
이건 함정이다.
옆 부서 유부남 하 모 팀장이 경리팀의 박 모 씨와 둘이서 따로 술자리를 가졌다가 하 모 팀장의 부인이 찾아와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지 않았는가.
안 그래도 유하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유하가 혹시라도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하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유하야, 오는 건 괜찮은데 너 혼자 올 건 아니지?"
"왜요? 또 누구 필요해요?"
"아니, 그...."
"......."
은유하는 나를 향해 지그시 웃기만 했다.
나는 그 신호를 캐치했고, 의심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래, 유하 오고 나서 집들이도 제대로 못하기는 했지."
"그렇죠? 후후, 그럼 이건 집들이 선물!"
"...야."
스팸과 기름 세트를 집들이 선물이라면서 넘기려고 하다니, 이 여자 제정신인가?
"오빠 요리 잘 하시죠? 이걸로 안주 만들어주세요. "
착. 유하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흔들며 눈을 찡긋였다.
"술은 제가 살게요."
....
스팸에 케첩이 섹스라고?
아니다.
"...선배님?"
섹스는, 그냥 섹스일 뿐이었다.
* * *
"선배님, 이거 어떻게 해요?"
"뭘?"
"세탁기요. 모르겠어요."
유하의 말에 나는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리 귀티가 나는 여자라고는 하지만, 세탁기도 제대로 돌릴 줄 못해서야 어디 살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세탁기 쓰던 거랑 좀 달라서 그래? 통돌이라서 그런가?"
"통돌이요? 표현이 되게 귀엽네요. 이런 거 처음 봐요."
"......."
결혼할 건 아니지만, 프로포즈를 허락해줄 것 같기만 하다면 나중에 자리를 잡고 프로포즈를 하겠지만, 함께 평생을 살아갈 반려가 세탁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엄청 곤란하다.
"여기 급속세탁 있잖아."
"메뉴얼 없어요?"
"메뉴얼? 그냥 이거 누르고 띡띡띡 하면 되는 걸."
"...능숙하네."
유하는 마치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찡긋였다.
"선배님, 여자 속옷 세탁 자주해보셨나봐요?"
"...어?"
"남자들이 급속 세탁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던데."
"......."
함정에 당했다.
유하는 세탁기의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자신의 속옷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누구 걸 해보신 걸까?"
"......."
"하긴, 처음은 아닌 것 같았어요. 하는 게 절대 처음하는 사람의 움직임은 아니었거든요."
"너는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는 거야?"
"......힛."
유하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선배님의 저질스러운 망상이 저를 난감하게 하네요. 맞춰보세요. 하나, 이 여자는 사실 뒤로 경험이 많은 변태다."
시작부터 강하다.
나는 유하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둘, 타고난 천재다."
그건 가능성이 있다.
처음 할 때는 여러모로 어려워했지만, 중간부터는 나와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끌어안고 정을 나눴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기도 했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진짜'를 느꼈다.
이 여자, 보통이 아니긴 했다.
"그리고 셋."
유하는 나를 향해 슬며시 다가와, 내 명치에 검지를 올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선배님이랑 하는 거 생각하면서, 야동 보면서 연습했다. 뭐게ㅡ요?"
"넷."
나는 유하의 턱을 붙잡았다.
유하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렌즈다-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계속 웃었고,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입술을 맞췄다.
쪽.
살을 섞을 때와는 다른, 가벼운 키스에 유하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키스보다는 유하에게 따지고 드는 게 먼저였다.
"세탁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애가 남자랑 하는 걸 영상보고 연습하기나 하고 말이야."
"...첫 번째나 두 번째일 수도 있잖아요?"
"두 번째는 가능성이 있지만, 첫 번째는 아니야."
"어떻게 확신해요?"
"네가 야동을 더 많이 봤겠냐, 내가 야동을 더 많이 봤겠냐?"
이건 자폭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얼마나 스스로 폭발을 하든 내가 유리하다.
"너 처음 맞아. 내가 확신해."
어쨌든, 대학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한 24세 은유하 씨의 처음을 가져간 건 나니까.
"지금 시트 빠는 게 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앞으로 한 번도 안 한 사람이 뒤로는 엄청 했다고?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흥. 경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질투하는 거야?"
"흥."
유하는 입술을 삐죽이며 침대로 돌아갔다.
맞는 옷이 없어서 그냥 알몸에 내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 게 상당히 색정적이었고, 그 모습에 나는 다시 음심이 치솟기 시작했다.
"경험이 없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오히려 내게는 기쁜 걸."
"그거랑 그거랑 같은 거예요, 선배님. 성 경험이 없는 거랑 세탁 경험이 없는 거랑. 알겠어요?"
"...많이 좀 다르긴 한데, 보통 세탁은 살면서 다 해보지 않아?"
"몰라요. 이모님이 다 해주시거든요."
"......?"
이모?
그런데 그냥 이모도 아니고 이모'님'?
"유하야. 실례긴 한데, 너 집에서 집안일 누가 해?"
"가정부 이모님들이요."
"...들?"
"네. 세탁은 세탁하시는 분들이 따로 계셔서 제가 해본 적은 없어요."
"......."
나는 유하의 월급을 대략 알고 있다.
내 후임인 만큼, 최소한 나보다는 더 적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입는 옷이나, 그녀가 하는 행동을 보면 나름 부자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명절 스팸 상자 선물을 내게 쾌척하는 기염을 보였으니까.
그런데 가정부 이모님들?
"아 참. 선배님, 저 사진 한 장 보여드릴까요?"
"......어?"
나는 유하가 보여준 사진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정신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회장님이랑 사장님이네?"
"아빠랑 오빠예요."
"......."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유명 그룹 계열사-대기업이라고 분류되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나름 애사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뉴스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보는 만큼 나도 회장님의 얼굴을 알고 있다.
"어떻게 된 거야...?"
"언더 커버 보스?"
"......예?"
"음, 요즘 애들 말로 표현하자면...."
유하는 자신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응애, 나 비밀 사장."
"......."
"저희 회사 물려받을 예정인데, 아빠가 회사 돌아가는 건 직접 경험해보라고 해서 몰래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게 '몰래'라는 말로 되나?"
"되죠. 만약 부장님들이 제 정체를 아셨다면 제가 선배님보다 더 적은 일을 받았을 걸요?"
"......."
직급에 따른 업무 차이는 있지만, 유하의 업무양은 신입이라는 이유로 나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약간 더 적은 수준이었다.
다른 팀의 신입은 결코 소화해낼 수 없지만, 유하의 업무 능력은 신입 시절의 나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저기, 사장님."
"네, 선배님."
"...저기, 저는 왜...?"
"아, 그거야."
유하는 커피잔을 잡은 채 배시시 웃었다.
"첫 회식 자리에서 부장이 성희롱 하려던 거, 선배님이 대신 커버 쳐주셨잖아요."
"......."
순간.
나는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신입사원 축하 회식.
3차 노래방.
대머리 부장의 노래.
블루스 타임.
-아이고오오오오 부장님! 술잔을 부딪치며 찬! 찬! 찬!
...한창 술에 꼴아있었지만, 그 순간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가버렸다.
왜 이걸 기억하고 있냐면, 그 다음 날 부장에게 출근부터 퇴근까지 개박살이 났으니까.
"...원래는 그냥 언더커버만 하려고 했는데, 진심이 되게 만든 분이 계셨죠. 선배님 아니었으면 진작에 때려쳤을 거예요."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럼요. 앞으로 계속 감사하셔야 할 거예요."
유하는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 처음 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평생 한 사람이랑 사랑을 나누는 게 로망이라서."
"......."
"선배님, 아니. 오빠."
유하는 세탁기 쪽을 가리키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혹시 결혼 생각 있어요?"
역으로 프로포즈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