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8 2부 10장 01
그가 부산으로 떠난 동안.
나는 그에게 필살의 코치를 한 뒤, 다시 게임기로 접속했다.
"혹시 하랑 언니 때문에 화난 건 아니죠?"
"전혀요."
옆에서 유나가 직접 구워온 딸기케이크를 퍼먹으며, 나는 인터넷에서 봤던 그 대사가 떠올랐다.
"제가 선택한 하렘이에요.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죠."
"보통 그런 말 나오면 그다지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거던데."
"각오는 했지만, 조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나는 단숨에 딸기를 입안에 생크림과 함께 퍼넣었다.
언제나 맛있게 먹는 딸기케이크지만, 오늘따라 왠지 달콤함보다는 쌉싸름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인간을 이해해버리는 것 만큼 정말 슬픈 일이 또 없어요. 옛날같았으면 석하랑이 피닉스를 사랑하든 말든, 당신이 모든 걸 버리고 세계를 넘어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텐데."
신격을 가지고 있던 내가, 정령이었던 내가 인간을 이해해버린 건 그 때문이다.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고, 결국 나는 내가 보빔하렘을 원한다는 명목으로 하랑과 유나가 우리의 보금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실은 저희랑 이거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죠?"
"뭐하러 그래요. 당신들이랑 보비려면 게임 속에서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진짜 고맙네요. 후후. 창염의 피닉스는 사실 츤데레였다거나?"
"츤데레는 제가 아니죠. 저는 극도의 나르시스트. 오직 저만 사랑하는 존재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어떤 대상에게로 넘어가는 캐릭터에 가깝죠."
원작 게임에서 나오는 창염의 피닉스가 그랬고, 그의 끈질긴 구애 끝에 약 20년 동안의 정신세계 속 생활로 변해버린 정령 창염도 그렇고, 현실로 빠져나와 인간 세상의 삶에 적응해버린 하신라가 그러하다.
전지전능한 신이었지만, 사랑만큼은 모르던 존재.
그런 존재가 사랑을 알게 된 시점부터, 감정을 이해하고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며 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랑과 유나에 대한 동정.
그런 것도 있지만, 그들의 대쉬를 받아줄 수 없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이 너무 씁쓸하고 미안했다.
"스포일러는 당하게 되어버렸지만, 당신도 조만간 고백을 받을 지도 몰라요."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 하나요?"
"마음은 이미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그래도 혹시나 말하자면, 정실은 저예요. 알겠어요?"
정실.
내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았던 말이지만, 이제는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이 하렘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
내 남자가 나 때문에 다른 여자들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선택한 길이다.
말 그대로,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에잇, 인게임에서 유나랑 하랑이 불러서 따먹기나 해야지. 흥."
"게임 속 저희는 현실의 저희가 아닌데요."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따먹히는 느낌이라도 받아보라는 의미에서 그러는 거예요."
"전혀 타격 없는데. 흐흥."
유나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말랑한 살결이 나를 포근하게 안았고, 유나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나중에 뭐요?"
"이렇게 해드릴 게요."
소곤소곤.
유나가 제안한 체위에 나는 아랫배가 큥큥 쑤시기 시작했다.
"...정말로요?"
"네, 물론이죠. 그러면 오빠도 만족하고 신라 님도 만족하는, 그런 상황이 되잖아요?"
"......."
완벽한 체위다.
그는 그대로 유나를 따먹고, 나는 나대로 유나를 따먹는다.
이게 따로 분신을 쓰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같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체위라는 것에 나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유나, 무서운 아이.
"...일단 테스트부터."
나는 게임 속에서 그게 가능한지 확인을 하기 위해, 일단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큥큥, 스타트."
* * *
7월 13일, 서울 여의도.
우오오오ㅡㅡㅡ!!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아스팔트 덩어리는 금방 과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니!! 머, 멈춰!!"
"거기서 그만 돌아가!"
"10년만 돌아가도 좋으니까, 제발 한옥만은!!"
사람들의 절규에 찬 비명이 들린다.
신서울에서 올라온 사람이든, 서울에 남아있던 난민이든, 심지어 서울 시민증을 목에 걸고 있는 괴인이든 모두가 좌절하고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 뜯는다.
"으하하하!!"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진다.
15층 아파트의 꼭대기에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곰방대를 치켜든 금발 외국인은 껄껄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와 과거의 만남! 전통과 혁신의 조화! 안 되게 하면 되게 하라! 한국의 멋과 미를 살린 진정한 삶의 터전!"
"누가 저 인간한테 황룡사 9층 목탑을 보여준 거야?"
그렇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고, 병원에는 하얀 거탑이 있는 것처럼, 게임 속 세계에도 역사적인 유적지가 다량 존재한다.
전통 한옥 구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동시에 이 좁은 면적에서 고층 빌딩을 선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수요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을까.
"하하하! 너희들의 아스팔트숲은 이제 끝났어! 여기는 전통 한옥이 지배한다!!"
아키택트는 사방으로 주먹감자를 날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게 꼭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광기에 찬 웃음을 짓는 것 같아, 서울 시민들을 더욱더 공포에 빠뜨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좁아지지 않게 한 것이."
"처마도 있고, 베란다도 있고, 좋네요. 한쪽 면이 엘레베이터랑 계단이 있어서 조금 불편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 생활 공간 자체는 더 넓어져서 좋을 것 같아요."
겉보기에는 주택 한 채를 짓고 난 뒤 윗 면을 깎아 탑처럼 쌓은 형태다.
위층에서 물을 뿌려도 처마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구조라 햇볕은 잘 들지 않을 수 있지만, 한강뷰는 정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다만.
"저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신세대 건축물을 좋아한단 말이지."
"모던하고 클래식하면서 엘레강스한 그런 디자인 말이죠?"
"그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으레 한강이 보이는 디자인의, '진짜' 현대적인 디자인의 건물에서 살기를 바란다.
"마법소녀들은 뭘하고 있어?! 지금 저 한옥 빌런이 서울 집값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잖아!!"
"한옥으로 만들면 살 때 누가 사겠어?! 당장 원래대로 돌려놓지 못 해?!"
"으아악! 주택들을 조선시대로 돌리는 한옥 빌런이다!! 아이고, 이러다가 모텔방까지 주막으로 만들어버리겠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야아아아ㅡㅡㅡ!!"
아키택트의 한옥 디자인에서 사는 게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모를까, 아직 이들에게는 아키택트가 재건하는 서울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디자인만 한옥이라는 걸 빼면 정말 좋은 곳인데."
"왜죠?"
"층간 소음이 없거든."
"오...."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저 한옥 아파트들은 아키택트가 유성에서 모아온 전문 건축가들과 협업하여 만들어진 최첨단 구조다.
한옥이라는 디자인만 빼면, 현대의 모든 공법을 최적화하고 기존 아파트의 단점을 최소화한 아파트다.
단돈, 3억.
단돈이라는 표현은 어불성설일 수 있으나, 30년 무이자 대출이 함께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취향의 차이일 뿐, 여러모로 사람들의 시위는 격해지고 있지만....
쿵, 쿵, 쿵.
"왔군."
멀리서 들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
몸은 슈퍼모델 뺨칠만큼, 별스타에서 최소한 팔로워를 수 만 단위로 몰고다닐 것만 같은 외형이지만, 이들의 표정인 비장하기 그지 없었다.
쿵, 쿵, 쿵.
분명 구두 소리인데 천둥처럼 울리는 건 어째서일까.
방금 전까지 아키택트의 한옥 아파트를 규탄하던 이들도 도로를 점거하고 걸어가는 한 무리의 여인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에서 30대에 이르기까지.
화장으로 최대한 잔 주름을 숨기기도 했고, 최대한 젊어보이는 디자인을 갖추려고 노력은 했지만.
"시방, 이게 서코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여...?"
"오, 영감님 서코 아시는 구나!"
서코.
코스프레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로를 걸어가는 여인들은 전부 저마다 '마법소녀' 옷을 입고 있었다.
"아...크흠."
대로변, 선글라스를 낀 기자들이 헛기침을 하며 마이크를 붙잡았다.
앞으로 걸어가는 마법소녀 무리를 가리키며, 그는 붉은 빛이 반짝이는 카메라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현재, 마법소녀가 되기 위해 벌써부터 마법소녀 복장을 갖추고 예선 심사를 보러 온...."
그렇다.
이들은 마법소녀가 되기 위해, 머나먼 곳에서부터 마법소녀 복장을 갖추고 서울로 왔다.
진정한 마법소녀가 되기 위하여.
* * *
7월 13일 늦은 밤, 서울 여의도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 본거지.
"경쟁률이 지금 얼마야?"
"30만이요."
"우리, 이번에 2명 뽑기로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60만명이 원서를 낸 거죠."
"현장 접수만 받은 거지?"
"네. 지금 한국행 비행기가 전부 마감이에요."
"......."
이게 지휘관의 위상이다.
"밖에 있는 마법소녀들은?"
"서울역 노숙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서울에서 버티고 있겠다고 하네요. 지금 급하게 아키택트가 한옥 모텔 만들고 있고, 유성에서 급하게 간이침대랑 이것저것 공수해서 임시 숙소로 꾸미고 있어요."
"으휴. 안 됐네...."
지휘관의 힘으로 이능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섹스'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심지어 아직 서류 접수하는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소녀 복장을 갖추고 올라온 이들이 수십 만에 이르렀다.
"어차피 지금 당장 뽑을 생각도 없는데."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메인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돌아오면 오디션 볼 준비는 끝나있겠지?"
"당연하죠. 언질만 주시면 미리 그 사람 끝까지 남을 수 있게 조작해둘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최종 결선에서 우승하는 사람 한 명은 진짜 경쟁으로 이기는 사람으로 하고, 어차피 내가 고를 사람은 중간에 아무나 한 명 고를 거니까."
"생각해두신 분이라도 있어요?"
"응."
메인스토리 진행을 위해 해외로 나가기 전, '그들'이 눈에 띄는 순간 바로 채용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긴 여자 있으면, 바로 따로 빼둬."
"음...외국인이에요?"
"응. 지금쯤 아마...."
예상대로라면.
"인천 앞바다에서 헤엄쳐서 올라왔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