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96화 (996/1,497)

EP.996 2부 10장 09

파삭!

응집된 마력이 부서지는 소리가 무도관에 울려 퍼졌다.

서로를 등진 채, 각자의 무기를 휘두른 자세 그래도 서 있는 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푸쉬이이.

펜릴의 몸에서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갑주의 겉에는 난도질당한 듯한 자상이 가득했고, 펜릴의 심장 부근에는 칼날이 움푹 파여있었다.

"하아, 하아, 너도...."

소령의 상태도 보통은 아니었다.

보호장비 겸 슈트를 입고 전투에 임했지만 펜릴의 공격은 보호장비를 너무나도 쉽게 갈아버렸고, 비록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슈트가 살갗이 노출된 부분이 더 많을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

[몇 합을 나눴는지 아는가?]

"...거의, 천."

[그래. 천 합. 내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내게서 살아남은 자는 네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누구지?"

[아주 무서운 존재가 하나 있지.]

펜릴은 몸을 돌렸다.

소령 또한 몸을 돌려 펜릴에게 다가갔다.

[대륙 절반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거대한 불사조. 적, 다크 레기온 간부들의 수장. 너희 나라에서는 '푸른 불사조'로 통할 것이다.]

".....!!"

소령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간신히 무승부로 이끈 존재가 인정하는 최강자라니.

그 존재는 과연 얼마나 강할까?

"하지만...내가 이긴다."

[자신감은 넘치는군. 나도 이기지 못하면서?]

"...언젠가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소령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지휘관의 부탁 때문인지, 펜릴은 단 한 번도 얼굴을 공격하지 않았다.

설령 공격의 위치상 얼굴을 공격하는 게 더 유효한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펜릴은 자신의 자세가 불리해지더라도 얼굴은 피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대련, 고맙다."

[서로 살초만 백 번 넘게 주고받았는데 대련이라?]

"누가 죽었어도 대련이고, 둘 다 살았으니 확실히 대련이지."

[풋.]

펜릴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샤오린을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아깝군. 네가 먼저 나와 만났다면, 네가 바나르간드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뭐...?"

[재차 소개하지. 아니, 이 모습보다는 이쪽이 좋겠어.]

사아아.

두 팔을 벌린 펜릴의 몸에서 민트색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칼바람과는 다른, 청량하고 맑은 바람에 소령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를 정화하는 듯한 상쾌한 바람.

소령은 서서히 사라지는 갑옷 속에 있는 이의 정체에ㅡ

"반갑다냥!"

"......하?"

충격을 받았다.

우락부락한 사람은 아닐 거로 생각했지만, 최소한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 김펜릴이다냥!"

상대는 녹색 고양이 귀 메이드 미소녀였다.

그것도 그냥 메이드도 아니고, 소령을 위해 맞춰 온 듯한 민트색 치파오를 입은 점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냐항항. 지휘관이 그렇게 극찬을 하던 무투파라고 하던데 확실히 강하다냥. 무술로만 따지면 인간 중에서는 원탑?"

"인간...?"

"이 몸은 괴인이며, 다크레기온의 간부다냥. 지금은 지휘관의 설득으로 이렇게 마법소녀 활동을 하고 있다냥!"

"어, 음...."

소령은 충격에 빠졌다.

"그, 아까까지 들렸던 목소리는...?"

"목소리? 아, 그거야 마력으로 전하는 목소리니까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냥. 목소리라기보다는 의사 전달에 가깝지만, 듣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냥. 기본적으로 간부들은 다 여자다냥."

"......알겠, 알겠습니다. 그럼...."

소령은 자신의 가슴에 얌전히 손을 올렸다.

"저는 이걸로 입단...확정인가요?"

"확정?"

"당신이 당신의 정체를 그렇게 밝혔다는 건, 저도 마법소녀로서 비밀과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흐응, 글쎄."

펜릴은 소령을 향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

소령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속도로, 손톱을 소령의 목에 찔러넣었다.

아주 살짝.

"네가 어디 가서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의 비밀을 실토하고 다닌다면, 이 몸이 너를 죽이러 갈 거다냥. 하지만 그렇지 않고 순순히 우리 팀의 일원이 된다면...함께 지휘관을 위해 일하는 거고."

"......저는."

"너는 왜 마법소녀가 되고싶냥? 힘? 아니면...지휘관의 자지?"

"힘을 원합니다."

"단순히 강해지고자 하는 힘을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소령은 펜릴의 손을 붙잡았다.

공격의 의사가 없는,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손길에 펜릴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는...."

"저를 도와줄, 힘을 원해요."

* * *

[늦은 밤, 여의도 C호텔 펜트하우스.]

잠시 뒤.

펜릴과의 사투에서 살아남은 나는 늦은 밤에 샤오린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샤오린 양."

"......어?"

"이런 몸입니다. 낮에는 여자, 밤에는 남자."

나는 샤오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시안.화이트.히비스커스. 동아시아권에서는 백청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휘관입니다."

"...저는."

샤오린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나를 또렷이 바라봤다.

"이소령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굳이...이소령?"

"한국에 왔으면 한국의 법도를 따라야 하는 법."

"그거 로마 아닌가요?"

"가능하기만 하다면 저는 귀화할 생각도 있습니다."

"뒷감당은?"

"......."

샤오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당신의 의지는 알겠으니, 앞으로 소령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흔히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캐릭터의 이름을 자체적으로 지어주는 경우가 있다.

시스템적으로 보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게임 안에서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름을 붙이고는 한다.

히카리에게는 '빛나'라든가, 샤오린에게는 지금처럼 '소령'이라든가.

외국계 이름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자체 패치로, 시스템에도 적용 가능한 아주 특별한 방책이다.

대신, 그에 따른 뒷감당은 플레이어의 몫.

"좋아요. 소령 씨. 일단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예...."

샤오린, 아니 소령은 나와 손을 놓고 의자에 마주 앉았다.

"일단 당신이 궁금해하는 부분부터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에 틀린 게 있다면 바로 말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소령은 긴장한 자세로 나를 응시했다.

무릎을 붙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어떠한 질문에도 담담하게 대답하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샤오린. 중국인. 아버지는 현재 주석, 모택평. 어머니는 모택평의 집에서 일하던 메이드.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아버지에게 거두어졌으며, S급 이능력을 각성하여 어려서부터 무인으로 키워짐. 여기까지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히로인 중에는 한 국가의 수장과 관련이 깊은 이들이 수두룩하다.

히카리가 일본 고대 왕가의 혈통이라거나.

아르엘은 당장 영국의 여왕이라거나.

백희아도 상당히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삼국시대 왕가의 피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거나.

DLC, 선겨울은 선의철의 딸이라거나.

그리고 소령은 중국의 주석 캐릭터이자 다음 챕터의 메인 빌런, 모택평의 친딸이다.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챕터가 '개천광 카르나'의 챕터라고 한다면, 그다음 챕터가 바로 '혼돈환룡'이 있는 주 무대, 중국이기 때문.

설야의 루살카 챕터가 부산 학살을 일으키는 석하랑이 챕터 히로인인 케이스처럼, 소령은 다음 챕터의 메인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영웅 '군신'으로 길러졌죠.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군신이 여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다 맞습니다. 지휘관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맞습니다!"

소령은 극구 긍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뭘 말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소령은 더 대화가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SR...."

"네, 접니다!!"

소령은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이 세계에서 전설의 품번이 된, 많은 이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 넣은 한 필름.

"그 이야기는 정말 저를 부끄럽게 만드니, 인정할 테니 제발 그만해주십시오...."

"뭐, 좋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SR-6974에 관한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 쿨하게 넘어가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직 그녀가 모든 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50억 인구의 앞에서 지휘관과 생중계 임신 섹스를 하는 단계는 아니니까.

아직은.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령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환영합니다. 한 번 안겨보시겠습니까?"

"......."

소령은 조심스럽게 내게로 다가와 안겼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두 손은 소령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전신을 즐겼다.

'최고야.'

라온이 거유의 장신 미녀라고 한다면, 소령은 슬랜더 미녀의 최고봉이다.

내가 여체인 상태로 가슴을 눌러 비빈다면, 소령은 분명 부끄러워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 터.

'칼집자위했던 여자애가 레즈섹스를 못 한다? 이건 말이 안 되지.'

그렇다.

소령은 아마 내가 본격적으로 보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스읍, 하."

나는 그녀의 전신을 만끽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소령, 당신을 위한 마법소녀 코스튬을 한번 입어볼래요?"

옷장의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옷에 소령은 당황했다.

"아, 아무것도 없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안 보입니까?"

"예?"

"착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옷. 몰라요?"

"아니, 그...."

나중에는 알몸으로도 나서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소령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그런 소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리 준비한 가면을 꺼냈다.

"농담입니다. 그런데 혹시 소령, 슈퍼 히어로 영화 좋아해요?"

"......설마."

"당신의 진짜 코스튬은 이거랍니다."

소령의 국적을 속이기 위한 최고의 코스튬.

"흰 토끼가 좋아요, 검은 토끼가 좋아요?"

새로운 마법소녀는 바니걸이다.

"저기, 그 가면은...?"

"아, 이거. 당신을 샤코린으로 만들 물건이랍니다. 아키택트가 준 거예요."

"...앗, 아아...!"

"안 쓰면 마법소녀 아웃."

"아앗...!!"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