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98 2부 10장 11 트롤링의 피해자, 준비된 여성
마법소녀가 뽑혔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신서울에 있는 한 카페에서 시작된, 누가 봐도 지휘관의 마법소녀처럼 보이는 여자가 저지른 스포일러에 세상은 뒤집어졌다.
-'블랙티'는 과연 누구일 것 같습니까?
블랙티.
뉴페이스인 여인이 홍차를 주문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퍼진 이명은 공식적으로 정해진 바는 아니지만 거의 공식에 가까운 이명이었다.
"홍차가 블랙티라는 거 조금 웃기지 않아? 녹차는 녹색물이 우러나니까 그린티인데, 홍차는 블랙티잖아?"
"그래서 레드티로 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그냥 그쪽이 모를까 싶어서. 영어 관심 없잖아."
호록.
나는 딸기에이드를 삼켰다.
눈앞에 나와 마주 앉은 여인은 나를 한 번 째려봤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나온 이들은 최소한의 외국어 교육을 받고 나옵니다."
"나도 알아. 우리 팀에 수능 만점자가 있는 거 잊었어?"
"만점자가 아니라 만-1점이 아닙니까?"
"그건 무슨 단위야. 지금 우리 유나가 조작된 문제 하나 틀렸다고 그러는 거야?"
"진짜 수능 만점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꼬우면 재수해서 만점 받아오라고 하세요."
상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다소곳한 자세로, 정갈하게 차를 홀짝인 그녀는 차를 마시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일본의 다도가 생각나는…."
"뭐라?"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기품이 느껴지시는군."
"......흥."
외국과 비교를 하자마자 바로 발끈하는 게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지만, 특히 다른 곳보다 일본과 비교를 하는 순간 너 죽자 나 죽자 하는 상황이 되더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아주 간단한 비유로 나를 이해시켜줬다.
-절밑창.
...절풍 밑에 창염이라더라.
비록 이제는 내가 창염을 넘어 신라가 되었지만, 절풍을 왜에 빗대고 창염을 이 나라에 빗대니 바로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눈앞의 꼰대 여인마저도.
"...그럼 잡담은 그만두고. 흠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 여자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백희아 씨."
"말씀하십시오."
내 앞에 마주 앉은 검은 한복의 여인, 백희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석하랑 영입 시점에 한 번 협회에서 만난 이후, 마도기어를 통해 남들의 눈을 피해서 만남을 가져왔던 나는 백희아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마법소녀 지망 희망자'로 참가했고, 나는 바로 그녀를 1차에서 합격시켰다.
그렇다.
마법소녀에 지망한 건 샤오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샤오린과 같은 시험장에는 백희아도 있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심지어 한복조차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입고 와서 그렇지, 그녀는 '당신은 백희아입니까?'라는 질문에 '네'를 누르며 자신을 증명했다.
아마 샤오린도 그녀가 평범한 A급 수준의 이능력자로 생각했을 터.
실상은 히로인이었고, 나는 지금 백희아를 따로 호텔로 초청했다.
"지휘관, 제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남자일 때는 그래도 잘생겼으니 봐줄 수 있지만…."
백희아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여자일 때는 국물도 없습니다. 어딜 여자가 여자에게 교태를 부립니까?"
"저, 일단 남자입니다만."
"지금 여자잖아요."
"......."
아마 보빔을 하려면 제일 공략 난이도가 어려운 여자가 백희아가 아닐까?
역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오해로 피가 섞인 친오빠인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극복하고 사랑을 하는 히로인 답다.
'친오빠가 아니라 친언니였으면 보비기 쉬웠을 텐데.'
소복을 입혀놓고 소복 사이로….
"푸흐흐."
"이상하게 웃지 말고 대답이나 하십시오."
"...미안합니다. 크흠. 그럼…."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지만, 이달의 마법소녀는 당신입니다."
"그렇군요."
백희아는 묵묵히 차를 홀짝였다.
찻잔을 입술에 대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녀는 나를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거에 저희, 만난 적이 있었죠."
"예."
"저는 당신과 만나서 당신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과를 보였어요. 굳이 당신에게 일일이 말하지는 않겠지만, 물밑에서 당신을 정말 많이 도왔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선의철 실각의 배경에는 백희아가 당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선의철이라는 악마가 당신에게 손을 뻗지 못하도록, 저는 당신을 철저히 숨겨왔습니다. 적어도 신서울의 푸른집과 국회의사당에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계 자본 길드에 대한 압수수색도 막았고, 불시 점검도 막았고, 정슈리 양 이슈가 있었을 때 저들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이능력자는 졸업 전까지 다른 길드에 소속될 수 없다는 법을 소급 적용하려는 것도 막았습니다."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선의철이 흔들리기 시작한 여론을 만든 것도 백희아고, 본격적으로 시위의 바람을 일으킨 것도 백희아고, 결정적인 시민 봉기의 시작을 알린 것도 백희아다.
"그리고 제가 직접 나서서 계엄령으로 거리에 나온 탱크를 박살 내버렸죠."
"그거, 실은 박살이 아니라…."
"지휘관?"
"...박살냈죠."
그도 그럴 게, 선의철의 계엄령에 탱크를 직접 몸으로 부수고 나타난 여고생은 이 여자니까.
'다들 천가을로 알더라고.'
우리 팀원들도 천가을로 알았지만, 사실 그건 백희아였다.
-안이 백희아 뭘했음? 한 게 뭐임?
-희아느님 루트에서 희아님 업적 정독하고 와라.
백희아가 한 일에 대해 5700자로 수 편을 쓸 수 있지만, 귀찮고 머리 아프고 피곤한 내용이라 적지 않겠다.
-아무튼 희아님이 다 함!
-진짜로?
-너는 희아 루트 열 번이나 해놓고도 그것도 몰랐냐?
-여동생이랑 현관 합체하느라 바빠서.
-희아가 현관에서 옷 벗고 있으면 킹정이지.
희아 루트를 플레이한 이들조차 모를 만큼, 백희아가 지휘관을 위해 물밑에서, 보이지 않게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아프리카계열의 사람들이 사진에 보이지 않고 하얀 건치만 보이는 경우처럼, 너무 백희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후반에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혐성만 느끼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인게임에서 피곤한 정치 이슈는 다 백희아가 차단해주니까 좋은 거지.'
이 게임은 게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하나의 세계다.
당연히 지휘관을 향한 온갖 정치계의 로비와 만남 주선이 그득하며, 사진 한 번 찍어보거나 관련 행사에 부르기 위해 누구누구 의원실에서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초청 전화를 하고는 한다.
-이커시 한쿡의 구K-1입니콰?
-아니, 나는 이 새끼들 지지하지도 않는데 왜 게임에서까지 나보고 지랄임?
-나 포도당 지지자인데 이 게임하고 포도당 싫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조차도 인게임에 들어간다. 그게, 하이퍼 리얼리티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온갖 개드립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세계의 온갖 안 좋은 면을 다 집어놓았기에 정치계에서의 어두운 손길도 플레이어를 덮치기 마련.
중반부까지 정치권에서 뻗으려던 어둠의 손길을 막아 내준 건 백희아였지만, 그런 요소는 백희아만 알 뿐이었다.
은유하처럼 내색을 하지 않으니까.
나라를 위해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녀는 그냥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다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휘관. 진지하게 대답해주시길."
"음."
"저는 당신을 위해 어두운 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이제 그 보상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정말 용기를 내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
백희아는 직접 나서서 내게 어떤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제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상황인지는 아십니까?"
"압니다."
"그럼 제게 '마법소녀'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겠군요."
"압니다."
백희아에게는 마법소녀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다.
"지휘관은 규칙을 정했습니다. 한 명은 시험을 통해 뽑고, 다른 한 명은 중간마다 한 명을 와일드카드로 선발하기로."
"예."
"제게는 국내에서 선발하는 와일드카드가 필요합니다."
"...예."
백희아는 차를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왜 제가 중도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왜 저도 모르는 또 다른 여성이 벌써 내정되어있다고 하는 거죠?"
"......."
대답을 하자면 펜릴의 트롤링 때문이다.
"도대체 홍차가 누구이길래 저를 뒷순위로 미루고 마법소녀로 영입을 한 것입니까?"
"군신이요."
"......."
백희아는 눈을 감고 차를 홀짝였다.
아마 군신이라는 존재와 자신이 마법소녀 타이틀을 가졌을 때를 두고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있을 터.
"군신이라고 한들...이 나라의 정계를 붙잡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녀가 내린 결론.
샤오린이라는 S급보다, 자신이 마법소녀가 되는 게 더 중요했나 보다.
"...지휘관께서는 자세히 모르시겠지만, 이 나라에는 헌법상 대통령이 하야한 경우 60일 이내에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
안다.
20년의 지구에서도 선의철이 하야한 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어 그 뒤를 이끌어나갔으니까.
"저는 마법소녀가 되어, 제 정치적 파트너를 도와야 합니다."
"지휘관의 후광으로 대통령을 당선시키겠다?"
"예. 물론, 그는 선의철의 남은 임기 동안 아주 짧은 대통령이 되겠죠. 개월 수로 따져도 고작 24개월, 아니 그보다 짧을지도 모르는 대통령입니다."
백희아가 바라보는 건 그 뒤의 세계다.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겁니다."
"...마법소녀 출신 대통령이라고요?"
"예. 그러니 와일드카드를 제게 넘기십시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제가."
백희아는 처음으로, 이를 갈며 나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마법소녀 오디션에서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
백희아가 요구하는 것은 특채.
"저는 준비된 마법소녀ㅡ"
"그만."
"그래서 준비된 여자대통ㄹㅡ"
"그만."
나는 백희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