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10 2(-1)부 10장 23
구원 이후.
한국은 달라졌다.
과거 S급 히어로가 12명 있었던 시대를 넘어, 이능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우뚝 솟아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
2021년, 한국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아니, 아무리 한국이 강해져도 그렇지. 미국에서 핵 날라오면 막을 수 있음?
-핵미사일 허공에서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낼 수 있음ㅇㅇ
-뭐야 그 한국 무서워 어느 세계선의 한국임?
-우리 세계선의 한국이다!!
한국은 강해졌다.
그 배경에는 당연히 21세기 코어 혁명 시대, 이능력자의 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한국에 여신이 많다고 하지만, 여신 말고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청화단이 있잖아.
-청화단이 있다고 해도 별거냐? 그냥 헌터 길드일 뿐이잖아.
-그 헌터 길드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이능력자 집단보다 더 강하다면?
-뭐...라고....
-청화단에 소속된 S급 이능력자만 지금 20명이 넘을걸?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야?
-그건 나도 모르지.
S급 이능력자를 비롯하여 청화단 소속 이능력자의 수가 무려 2만 명.
이들이 어디서 나타났는가 하니, 여기에도 '피닉스'의 손길이 묻어있었다.
-아니, 도대체 이 많은 이능력자들이 어디서...?
-창염의 피닉스가 전부 각성시켜놨다던데?
-뭐라고?
-지휘관의 능력은 지휘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더라. 창염의 피닉스도 지휘관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세상에.
피닉스가 주창한 십만이능력자 양병설에 의해, 한국 인구의 약 1%가량이 이능력자로 각성하여 자신의 힘을 갈고 닦았다.
말이 1%지, 4천만 인구수의 1%면 40만이다.
대부분 D, C급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던 이들이 여느 특전사 저리 가라 하는 정도의 신체 스펙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이 한국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한국은 피닉스의 나라다.
-근데 빌런이었던 사람을 찬양해도 되는 거임?
일단.
피닉스가 세계를 구원한 건 맞지만, 여러 방면으로 온갖 빌런적인 면모를 보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막상 피닉스의 나라라고 말을 하려고 하니, 이게 상당히 미묘한 느낌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석하랑의 나라다.
-석하랑 없어졌는데?
석하랑은 증발했다.
누구보다도 한국에서 가장 히어로 다웠던, 피닉스의 대척점에 있었던 여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사라진 피닉스를 쫓아 어딘가로 증발한 것 마냥.
-그럼...아 씨, 몰라! 청화단의 나라라고 퉁 쳐!
한국에는 청화단, 세계 최고의 헌터 집단이 존재한다.
-20세기에는 미군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청화단이 있다!
청화단.
한국에 터를 잡고 있지만 국가, 아니 세계 단위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조직.
단일 규모의 헌터 길드 중 가장 강력한 집단인 동시에 한국에 있어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권력 집단으로 성장했다.
단순히 그들이 가진 권력은 무수히 많은 이능력자를 바탕으로 한 '힘'에 국한되지 않는다.
"코어. 오직 청화단만이 코어 수급이 끊긴 이 세계에서 코어를 계속 뽑아낼 수 있죠."
구원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코어를 생산해낼 수 있는 자들.
청화단만이 주기적으로 코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어디선가 코어를 구해올 수 있었다.
"전 지구의 사람들은 이제 청화단이 주는 코어만 바라보고 살게 되었어요. 한국만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청화단은 이제 전 세계의 코어 수요를 감당하게 되었으니."
사실상 전 지구는 청화단을 향해 아기새처럼 코어를 모이마냥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누가 더 청화단과 거래를 잘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명운이 뒤바뀌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테러 집단으로 시작한 이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암약 단체가 되다니."
흑발의 여인은 수정과가 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었다.
"정말,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하고 말았네요. 그의 손에 의해서."
여인은 자신의 왼쪽 약지에 끼워진 검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기고 간 흔적이며, 동시에 그녀와의 만남을 매일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물건.
"그립습니다...."
창염의 피닉스.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피닉스의 마력이 깃든 반지는 여러모로 그녀를 그립게 만들었다.
비록 그와의 관계는 시작부터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저기, 10호 씨."
"편안하게 말씀하십시오."
여인의 뒤에는 금발벽안의 청년이 서 있었다.
이름조차 없이 '10호'라고 불린 청년은 정장에 두루마기라는, 언밸런스하면서도 동서양의 조화를 추구하는 듯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창염의 피닉스님은 여자였어요, 남자였어요?"
"제가 대답하기 곤란한 사항입니다."
"아니면 다른 이들의 예상대로 양성? 아니면 무성? 그것도 아니면 상대의 성별에 맞춰주는 사람?"
"정말 대답이 곤란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가씨를 위해서 '그'는 저를 남성형으로 남겨뒀습니다."
"그런가...."
여인은 묵묵히 수정과를 홀짝였다.
"그건 그가 저를 여자로 봤다는 얘기겠죠? 임신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겠죠?"
"한 명의 매력적인 여인으로 봤다는 건 분명합니다."
"...여동생인데도?"
"......아가씨, 그건."
"농담이에요. 이미 다 알아봤으니까."
한 때, 여인은 큰 착각을 했다.
"...저는 친여동생이 아니죠. 오히려 그의 자리를 빼앗았던 파렴치한 존재예요."
"아가씨가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 책임이 없는 건 아니죠. 모르고 살아왔지만, 알게 된 이상 어느 정도 책임은 있어요.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상황이지만, 때때로 드라마 속 설정을 뛰어넘은 이 현실에."
여인은 10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아이가 바꿔치기 당했다니. 원래라면 제 위치에서 살았어야 할 그분이 보육원에 맡겨지고, 어려서 이능력을 각성하고 보육원을 위해 선의철 휘하의 히어로가 되었죠. 그리고 평양 전투에서 행방불명되시고 미국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여인은 차가운 눈동자로 10호를 노려봤다.
"이상하지 않아요? 미국 어디든 살아있어야 할 사람이 지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어떻게 된 걸까요?"
"......이건 제 예상입니다만."
10호는 커피를 가볍게 홀짝였다.
"창염의 피닉스로서의 저는 의식과 힘을 간신히 화산 속에 봉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던 존재로서, '지휘관'이라는 변수를 놔둘 수 없었죠."
"그래서 지휘관을 죽였다?"
"정확히는 지휘관과 동화된 겁니다. 기억을 잃은 채, 의식을 잃은 채 지휘관의 죽은 육신의 몸에 깃들어 '백청화'로서 살았던 거죠."
"...죽어요?"
"1월의 추운 날씨에 보육원 앞에 버려진 아이가 쉽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죠."
"......."
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피의 일주일 당시,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던 세계의 한복판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살아날 확률은 지극히 낮았습니다. 고위 정치인의 자식은 살아남았지만, 바꿔치기 된 유모의 자식은 살 수 없었죠."
"......초음파 검사로 성별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쪽으로 보수적인 집안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죠."
여인은 담담한 얼굴로 마저 수정과를 들이켰다.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10호, 당신은 그분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분이 돌아올 때까지, 이 나라에서 기다릴 겁니다."
"이해합니다."
"...괜찮으세요?
"그러라고 남아있는 저니까요."
10호의 말에 여인은 진심으로 우울해졌다.
자신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눈빛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이가 아니었다.
"정말.... 비록 관계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정말 기쁘게 인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 덕분에 변한 이 나라를 보여드릴 겸."
"그건...."
"알아요, 10호.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그리고 그분 대신 당신이 남아서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도."
피닉스는 잔불을 남겼다.
자신과 똑 닮았지만, 자신이 인간남자의 모습이라면 이런 모습을 갖출 것 같은 모습의 호문클루스를 남겼다.
조각은 전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백청화나 사람의 이름이 아닌, 10호라는 명칭을 붙였다.
능력도 출중하고 전투력도 뛰어나 개인 호위로 사용은 하고 있지만, 볼 때마다 그가 아니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누군가는 이 남자의 동형기를 이용해 즐겁게 지내며, 전동딜도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말했지만, 여인은 묵묵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백희아 아가씨."
10호는 인자한 미소로 웃기만 했다.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하, 그 정도 힘든 일은 충분히 고려했어요. 저…."
백희아는 당당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분이 제 오라버니인 줄 알았을 때는, '그 법'도 합법화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에요."
10호는 침묵했다.
그 법이라 함은,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럼 사담은 여기까지. 그분께서 이 나라에 오셨을 때, 달라진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죠? 그러니…우선, 코어 문제부터 이야기를 나눠봐요. 보고하세요."
"알겠습니다."
10호는 손목에 채워진 마도 기어를 두드렸다.
백희아의 앞에는 바로 화상이 떠올랐고, 백희아는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통해 각국의 코어 지원요청 사항을 빠르게 훑었다.
"음.... C급 코어를 무상으로 제공해달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해당 국가와는 코어 가공 방면으로 업무 협약이 있습니다."
"무시해도 좋을 수준인가요?"
"무시해도 좋기는 하지만, 근방 국가들의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간단한 놀이를 하도록 하죠."
히죽.
"C급 코어 456개를 걸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