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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044화 (1,044/1,497)

〈 1044화 〉 1044. 신위

“유진 씨. 부탁이 있어요.”

강지우가 내게 말했다.

“부탁이요? 어떤 부탁입니까.”

“광원교를 체험하시고, 머무시는 동안은 광원교의 규칙을 따라주세요.”

“그거야 뭐… 당연한 일이지요. 절 한 명의 신도로서 대하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유진 씨. 하지만 유진 씨를 단순히 한 명의 신도로 대할 수는 없어요. 유진 씨는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하하. 너무 그러시니 제가 다 부끄럽네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특별 대우를 받으니 더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소에 들렸다. 사무원들 모두 수련복을 입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온 강지우에게 인사하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강지우는 사무실 뒤쪽의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수련복이에요. 숙소로 안내해드릴게요. 숙소에서 갈아입어 주세요.”

순순히 수련복을 받아들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라는 말도 있고. 겨우 이런 일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근데 다른 분들이 입고 있는 수련복과는 좀 다르군요.”

디자인은 비슷하게 촌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세부적인 디자인이 조금 달랐다.

“그 수련복은 귀인용이에요.”

“귀인이요?”

“네. 귀인(貴人). 유진 씨를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그렇군요.”

하긴 내가 좀 귀한 사람이긴 하지.

안내받은 숙소에 들어갔다. 평범한 원룸 크기였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나 부엌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편하게 갈아입고 나와주세요.”

옷을 갈아입었다. 가장 중요한 스마트폰도 수련복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사이비치고는 자유로운 것 같았다.

“나오셨군요. 잘 어울리세요. 유진 씨.”

“감사합니다.”

“우선 식당으로 가서 점심 식사부터 해요. 오늘 점심 메뉴는 미역국이에요. 혹시 싫어하세요?”

“아니요. 미역국 싫어하는 사람은 많이 못 봤습니다.”

“다행이네요.”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식당에 들어오는 박수호와 마주쳤다. 박수호는 제 여자친구와 딱 붙어 있었다.

“형. 또 만나네요.”

“점심은 먹어야지.”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강지우, 박수호를 비롯한 신도들은 밥을 먹기 전에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누군가를 향해 기도한다. 나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그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조용히 기도를 끝내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굴미역국은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국물 맛은 끝내줬다.

‘그나저나 내 쪽으로 시선이 모이는군.’

아까부터 주위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지우를 보는 건가 싶었는데, 천천히 살펴보니 나를 보고 있었다. 적의는 아니다.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이 귀인용 수련복 때문인 것 같았다.

‘왜 이래?’

아무리 나라도 조금 부담스럽다.

“형.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물컵에 물이 없어서.”

물은 셀프였다. 물을 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귀인께서 물이 필요하십니다!”

“제가 마침 정수기 옆에 앉아 있습니다! 제가 물을 가져가 대접하겠습니다!”

“오오! 신도는 참으로 운이 좋으시군요!”

양손으로 물컵을 쥐고 내게 바친 신도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발. 뭐지.’

얼떨결에 물컵을 받긴 했으나, 이상함을 느꼈다. 나한테 지나칠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아까부터 두 눈을 빛내며 나를 주시하고 있는게… 내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형. 물이 필요하다고 했으면 제 물을 드렸을 텐데….”

“미쳤냐. 네가 먹던 걸 내가 왜 먹어.”

“저 아직 물은 한 모금도 안 먹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야. 갑자기 왜 그래. 여자친구가 필요하다고 하면 여자친구라도 줄 거냐?”

“여자친구가 필요해요? 제가 여자들 알아볼게요. 아… 혹시 제 여자친구를 원하는 거면… 음. 좀 그렇긴 한데… 형은 귀인이니 어쩔 수 없죠. 제 여자친구를 드릴게요. 춘희도 이해할 거예요.”

대충 지껄인 말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깜짝 놀라서 박수호를 쳐다봤다. 박수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자기 여자친구를 내게 주려 한다.

“야. 너 미쳤냐? 네 여자친구는 나한테 왜 줘. 네 여자친구 울겠다.”

“아니에요. 제가 필요하시다면… 귀인의 여자친구가 되어드릴게요.”

모아이가 말했다. 나는 토가 쏠리는 것을 꾹 참고 물을 벌컬벌컥 들이켰다.

“뭐야! 냉수가 아니잖아!”

물이 미지근해서 짜증이 났다. 지금 필요한 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줄 냉수다.

“히익!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냉수는 너무 차가울 것 같고, 온수는 너무 뜨거울 것 같아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습니다만, 제가 멍청해서 냉수를 가져와야 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바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귀인이시여! 부디 고정하소서!”

“하여간…. 한국인은 냉수라는 것도 모르는 건가. 쯧쯧.”

혀를 차며 다시 가져다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야 속이 시원해진다.

“야. 박수호. 귀인이란 게 대체 뭐냐? 광원교에선 귀인이 특별해도 좀 많이 특별한 것 같은데.”

나는 물을 가져온 신도에게 다시 물컵을 건넸다. 한 잔 더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이번엔 눈치를 장착했는지 곧바로 냉수를 따라왔다.

“아, 그건 말이죠.”

“제가 설명할게요.”

식사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강지우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은 남긴 음식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우 씨가요? 그럼 저야 좋죠.”

“우리 광원교에서 귀인이란 광신께서 점지한 인간을 말해요.”

“광신…?”

“네. 빛 광(光)을 써서 빛의 신이시지요. 광원교(光源敎)의 광이 빛 광이듯이 광신께서는 빛의 신이에요.”

“아. 난 또 오해할 뻔했네. 그런데 귀인이 신이 점지한 인간이라면…. 광신이 저를 점지한 겁니까?”

“네. 사실 유진 씨가 오기 하루 전날에 광신께서 제 꿈에 나타나 유진 씨를 잘 모시라고 당부하셨어요. 광신께서 유진 씨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건 그냥 꿈이잖아요.”

“아니에요. 광신께서 내린 신탁이에요.”

강지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 얼굴을 보니 내가 뭐라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강지우는 정말로 신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귀인은 저희 교리에도 적혀 있어요. 그분께서 점지한 귀인이 나타나는 날, 그분께서 신위로 향하시리라.”

“…신위가 뭡니까?”

“신의 위치를 말해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광신께서 마땅히 앉으셔야 할 자리. 저희는 이렇게 해석해요. 귀인께서 나타나시고 며칠 뒤에 광신께서 강림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리라고!”

강지우가 흥분해서 말했다. 광신을 언급할 때마다 그녀의 두 눈에서 광기가 차오른다. 그녀 주위에 있는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어느새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오오…! 광신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을 내려주소서!”

“광신이시여! 세상을 구원해주소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도 중에는 박수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짜 세뇌했나? 세뇌의 흔적은…. 모르겠네.’

직접 만나본 박수호는 광원교와 관련된 일을 제외한 부분에는 멀쩡해 보였다.

“어쨌든 제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거군요. 강지우 씨가 제게 잘해주는 이유가 있었군요.”

직접 나서서 버스를 타고 나를 마중 나왔을 때부터 조금 특이하긴 했다. 원래 그런 일은 하급 신도들이 하는 법이니까.

“네. 유진 씨는 귀인이니까요. 유진 씨.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사양하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음. 부담스럽지만… 알겠습니다. 그편이 여러분도 편하겠죠.”

나는 옆에 앉은 한 신도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신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온다.

“귀인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턱짓으로 내 앞의 식기를 가리켰다. 원래 천한 것들과는 말도 섞지도 않는 법이다.

“치워드리겠습니다, 귀인님!”

다행히 신도는 눈치가 있는지 바로 내 식기를 치웠다.

‘부담스럽지만, 어쩌겠어. 여긴 광원교이니 광원교의 교리를 따라야지.’

“입이 좀 텁텁하군요.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이 먹고 싶은데.”

“가져오겠습니다!”

신도들이 앞다투어 주방으로 향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자른 수박이 내 앞에 나타났다. 대충 봐도 수박 3통은 자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맛없군요. 수박을 잘못 산 듯 합니다.”

“시내에 가서 달콤한 수박을 사오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여기에 있는 수박들은… 숲에 버리세요. 숲도 수박 맛을 봐야지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여러분은 먹지 마십시오. 귀인인 제가 여러분과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 광신께서 불쾌해 하시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귀인이시여. 귀인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 남은 수박들은 모두 숲에 버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강지우 정도는 아니지만,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거기 여자 신도분.”

“네. 귀인이시여!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긴 TV도 없고 적적합니다. 제로투 춤이나 한번 춰보시지요.”

“제로투 춤이요…? 그, 그게 뭔가요?”

“하아. 그것도 몰라요? 인터넷에 한 번 검색해보시죠.”

여신도는 스마트폰을 들어 제로투 춤을 검색했다.

“아! 이런 춤이군요! 알겠습니다! 귀인의 적적함을 없애기 위해 춤추겠습니다!”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흥겨운 비트 소리가 울리고 여신도가 제로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흡족하게 그녀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지우 씨도 한 번 춰보시지 않겠습니까?”

“…저 말인가요?”

“네. 지우 씨가 추는 제로투 춤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귀인께서 부탁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강지우가 일어서서 여신도를 따라 춤을 췄다. 과연 아이돌 그룹 출신이라고 할까. 엉덩이 흔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여신도! 당신도 같이 춤추십시오! 빨리!”

구원교에 입교하고 싶은 마음이 70% 정도 들었다.

•••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 강지우에게서 근처 안내를 받았다.

“여긴 따로 빌린 곳이 아니라 광원교가 가진 건물이에요.”

“도심에서 떨어져 있다곤 해도 보통 가격이 아닐 텐데…. 광원교는 돈이 많은가 보군요.”

“신도분들이 아낌없이 헌금해주셔서 경제적인 문제는 없어요. 아, 그렇다고 이 건물을 저희가 구입한 건 아니에요. 한 인자하신 신도분께서 기부해주셨어요.”

“신도분의 신앙이 대단하군요.”

신도를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는 건가.

조심해야겠다. 나는 사이비 종교에 돈 한 푼 내기 싫다.

강지우를 따라 건물 곳곳을 돌아다녔다. 전체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깨끗했다. 다만, 벽이나 천장 등의 무늬가 좀 이상했다.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무늬가 많다. 특히 멀리서 보면 괜히 눈이 피로해지는 이상한 문양 같은 것도 있다.

“이건….”

강당에 들어온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그림을 보았다. 입구 바로 앞에 있으니 볼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그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고, 땅은 피에 젖었으며, 붉은 하늘에는 검은 괴물들이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의 빛이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그린 그림이에요. 두려움이 가득한 미래지만… 저 중심을 보세요. 빛이 보이시죠? 광신께서 저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 빛이 괴물과 시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보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지만, 트집 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기도회 시간이네요.”

그녀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오후 1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강당 문이 열리고 신도들이 입장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하는 겁니까?”

“네. 가장 넓은 공간이 여기거든요. 아 참, 기도회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참석할 수 없어요. 스마트폰을 제게 주시겠어요.”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드디어 알몸 기도회를 시작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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