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3화 〉 1063. 신의 아틀란티스
7월 1일 목요일.
회귀 전에는 겪어 보지 못했던 날짜에 도달했다.
광원교는 없었다. 한하린도 멀쩡히 살아 있었고,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한국 헌터 협회를 비난하던 여론은 입을 싹 닫았다.
‘가시 가면을 붙잡았을 때 여론이 들끓긴 했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지.’
가시 가면의 정체가 협회 내부인이었기 때문에 언론이 난리를 친 것뿐이었다.
아예 가시 가면을 붙잡지 못했다면 모를까. 협회는 가시 가면을 생포했고, 가시 가면에 대한 관심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가시 가면을 잡고 온갖 일을 해결한 백지은은 뛰어난 실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국 국민들은 그녀를 보며 예쁘면서도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이미지는 그녀의 승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미래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좀 이상한 기분이긴 하네.’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꿀 빠는 일이 끝났다.
유희 세계에서 원작 정보를 이용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원작 정보는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지식과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한 번 더 회귀하려고 하면 확 귀찮아지네.’
여기서 30일 전으로 회귀하는 상상을 해봤다. 광원교가 멀쩡하고 가시 가면을 비롯한 사건들을 다시 해결해야 한다. 거기에 한하린에게 다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귀찮아진다.
우우우웅. 우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힐끗 보니 한아영이었다.
‘오늘 던전에서 나왔나? 원래는 며칠 정도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영 누나. 일은 잘 끝냈어?”
“…하린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아.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하린이가 먼저 말했네. 어디까지 들었어?”
“전부. 네가 30일 전으로 회귀했다는 말도 들었어. 믿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하린이가 이런 일로 농담하는 애는 아니니까. 그리고 왠지 모르게 너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
한아영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토록 나를 믿어주는 것에 살짝 안도했다. 그녀를 믿게 만들기 위한 고생을 안 해도 되니까.
“…하린이를 구해줘서 고마워, 유진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하린이는 내 여자니까. 아, 물론 누나도 내 여자야. 만약, 비슷한 상황이 누나에게도 일어났다면… 난 누나를 구하려고 했을 거야.”
“정말? 빈말이라도 듣기 좋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으응. 네가 눈앞에 있었으면 뽀뽀해줬을지도 모르겠어.”
난 그녀가 내 앞에 없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입국한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아직 외국이지?”
“응. 모레에 귀국해서 일주일 정도 쉬고 유럽 쪽으로 가게 될 것 같아.”
“누나도 엄청 바쁘네. 근데 누나. 수월 길드에 대해서도 들었지?”
“들었어.”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나와 한하린과 다르게 한아영은 수월 길드에 대한 생각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수월 길드에 몸담았으니까.
“많이 실망했지. 그리고… 이번 일로 확신하게 됐어. 수월 길드는 오랫동안 있을 곳이 아니야. 분명 언젠간 일이 터질 거야.”
“수월 길드에 미련은 없다는 거지?”
“딱히? 수월 길드에서 많이 지원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다른 길드에 들어가더라도 받을 수 있어. 다만, 지금 당장 수월 길드에서 탈퇴하는 건 불가능해. 계약 문제도 있겠지만, 수월 길드가 쉽게 놔주지도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언제까지고 수월 길드가 잘 나가지는 않을 거야.”
단호하게 말했다.
“근데 누나. 일주일은 한국에 있는 거네?”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일주일 동안 흑백쌍보와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
[신의 아틀란티스를 선택했습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 들어온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지옥에서 돌아오고 난 뒤 사흘 정도 지났다.
본래는 공간 이동 주문서를 이용해 바로 에이플랜 레기온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생각을 좀 바꿨다. 레기온에 바로 돌아가기 전에 능력치나 좀 올리기로 했다.
「제 4,344 구역, 누더기 실험소에 입장했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입장입니다.」
「구역 특성에 의해 생물의 능력치는 20% 하락합니다.」
제 4,344 구역, 누더기 실험소.
이 구역은 이미 지배자가 있는 구역이었다. 허나, 지배자는 이곳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다. 공략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이 구역의 위신과 거래를 통해 지배자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신과 협상해서 지배권을 가져간 거지. 시스템은 그걸 인정했고.’
따라서 4,344 구역은 비공식적으로 공략된 곳이다.
‘근데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4,344 구역을 지배하고 있는 건 흑주맹(黑柱盟). 헬텐처럼 전문 범죄 조직이지.’
흑주맹(黑柱盟).
헬텐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제법 큰 범죄 세력이다. 여기에 속해 있는 추방자들은 대부분 중국인이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놈들이고, 인신매매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질이 나쁜 놈들이다.
‘4,344 구역은 놈들이 지배하는 구역 중 하나일 뿐이지. 내가 건드려도 당장 대처하지 못해.’
흑주맹은 적이 많았다. 그놈의 중화사상을 아틀란티스에 와서도 버리지 못하고 적을 잔뜩 만들어낸 끝에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사라진다. 때문에 원작에서는 대단한 범죄 조직으로 묘사되는 것에 반해 비중은 1%도 되지 않았다.
‘이 구역에 대한 정보는 설정집을 통해 알아냈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4,344 구역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마을로 보였다. 500명 정도가 살아가는 마을. 마을의 생김새는 중국 무협을 떠올리게 했다. 주민들이 입고 있는 옷도 중국의 한푸와 매우 흡사했다. 다만, 주민들의 머리카락 색이 형형색색이라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주민들은 나를 힐끗 보더니, 자신들의 일을 하러 갔다. 외지인이 익숙해 보였다.
나는 익숙한 척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주로 골목길을 살펴봤다.
‘찾았다.’
골목 깊숙한 곳에 판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판자를 들어 올렸다. 시커먼 구멍이 보였다. 하수구 정도는 아니지만, 영 좋지 않은 냄새와 분위기가 느껴지는 구멍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구멍으로 들어갔다.
깊이는 3M 정도. 천장에 박혀 있는 조명에서 희미한 빛이 나와 주위를 밝혔다. 습기가 가득했고, 사방에 철창이 가득했다. 감옥처럼 보였다. 철창 내부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덜컹!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치웠던 판자가 다시 구멍을 가렸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판자가 저절로 구멍을 가린 것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 세계는 그럴만한 세계니까.
‘습도가 너무 높아서 기분 나쁘군.’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쒸이이이익.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철창 속에 있는 코브라 한 마리가 머리를 세우고 가는 혀를 할짝이며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명백하게 나를 먹이로 보는 눈이었다.
‘이게 감히 인간님에게 눈을 부라려?’
발로 코브라의 철창을 걷어찼다. 철창이 흔들린다.
씨이이이이이윅!
코브라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코브라는 철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코브라의 독니가 살벌하게 빛난다. 독니가 20cm 가량 늘어나는 것을 보니 평범한 동물은 결코 아니다. 아마 내가 모르는 몬스터의 일종이겠지.
코브라를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철창에 갇혀 있는 동물은 이곳의 재산이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사고를 칠 순 없었다.
나는 코브라를 비웃어 주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쿵. 쿵쿵.
철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 철창을 바라보니 뱀과 기린이 있었다. 뱀은 컸고 기린은 새끼처럼 작았다. 두 놈은 사이좋게 머리로 철창을 두들겼다. 놈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바닥에 향해 있었다.
쥐새끼가 있었다.
그 쥐새끼는 죽은 동료를 철창 속으로 던졌다. 뱀과 기린이 죽은 쥐를 5초 만에 먹어 치웠다.
“찌익. 찍찍.”
쥐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이걸 바칠 테니 잘 봐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치면 인신 공양 같은 건가? 별거 다 보는군.’
그 외에도 앞으로 갈수록 특이한 동물들이 보였다. 자해하는 원숭이, 벽에 머리 박는 수달, 재규어를 잡아먹는 염소 등등 죄다 이상한 것들밖에 없었지만.
동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살기를 띤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철창만 없었다면 분명 내게 달려들었겠지.
‘도착했다.’
드디어 끝부분에 있는 철문이 나왔다. 나는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통로가 나왔다. 문이 가득한 통로였다. 마침 통로의 문 중 하나가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등에는 활과 화살통을 메고, 한 손에는 토끼 귀를 움켜쥐고 있다. 평범한 토끼가 아니었다. 앞니가 날카롭고 꼬리에 뱀이 달린 토끼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씨익 웃더니 물어왔다.
“꼴을 보니 사냥꾼은 아닌 것 같고… 손님이시오?”
“아니. 돈은 가져오지 않았다.”
“호오. 도전자인가. 뭐, 죽지 마시오.”
사냥꾼은 터벅터벅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잘된 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면 이 많은 문들을 일일이 열어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사냥꾼은 통로 끝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문들보다 유독 무거워 보이는 문이었다. 그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내가 들어온 통로와 마찬가지로 칙칙한 곳이 나왔다. 그러나 공간이 넓었고, 사람이 앉을 소파도 있었다. 거기에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무기를 차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15명 정도고, 10명은 사냥꾼이며, 다른 5명은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로 보였다.
직원 중 한 명이 내 눈길을 끌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 검은 눈동자의 여자였다.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나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분홍색의 섹시한 치파오를 입고 있다. 가슴은 D컵. 치파오가 몸에 착 달라붙어서 그 풍만함이 물씬 느껴졌다. 치마 기장이 짧아서 탱탱하고 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엉덩이가 컸고 옆부분으로 팬티 끈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시네요. 도전자이신가요?”
그녀가 웃으며 묻는다. 대충 분위기를 훑어보니 이곳의 관리자는 그녀인 것 같았다.
“예. 도전하러 왔습니다.”
“타이밍 맞게 잘 오셨네요. 오늘 도전 시작 시각까지 앞으로 30분밖에 안 남았거든요.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꼭 말해야 합니까?”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그러셔도 돼요. 다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이익은 직접 감당하셔야 해요.”
“어떤 불이익입니까?”
“음. 여러 가지? 하나, 하나 말한다면 끝이 없겠죠. 어떻게 하실래요?”
그녀의 입술에 시선이 빼앗겼다. 분홍색 입술이었다. 살짝 벌어졌을 때 본 혀도 분홍색이었다. 여러 가지로 분홍색투성이의 여자였다. 보지가 분홍색이 아니라면 실망할 것 같다.
“…감수하도록 하죠.”
“손님은 62번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62번? 의미 있는 숫자입니까?”
“지금까지 가명도 밝히지 않은 손님의 숫자에요. 손님이 딱 62번째죠. 참고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3명 정도예요.”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흑주맹에서 죽이기라도 합니까?”
“그럴 리가요. 그들 중 9할은 도전 실패로 죽었어요. 있어 보이는 척하던 허접들이었죠.”
“나머지 1할은?”
“불이익을 받았죠.”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종이책에 나에 대해 적는 것이다. 62번. 건장한 체격에 검은색 머리 등등 내 특징을 적고 있다. 참고로 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본래 얼굴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나다. 모습을 감출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흑주맹의 타겟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내가 이길 테니까.
“아 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전 리 메이라고 해요. 도전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니 저기서 기다려주세요.”
리 메이.
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녀는 원작은 물론이고 설정집에도 나오지 않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