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2화 〉 1072. 신의 아틀란티스
발데르트 가문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잠깐 가주 자리를 비운 사이, 가문은 개판이 나 있었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쓸만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은 절반 이상이 떠났다. 다행히 엘레나가 귀환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떠난 인재들이 돌아오고 있으나, 그 시간이 느렸다. 모처럼이니 휴식을 즐기는 게 틀림없었다.
‘괘씸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어쩌다 보니 나도 휴가를 즐긴 처지이기도 하고… 그들마저 내친다면… 끔찍하군.’
크게 가문 외부와 내부 문제가 있었다.
외부 문제는 발데르트 가문을 향한 귀족들의 정치적 공격이다. 이건 괜찮다. 제국오공 중 한 명인 자신이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천천히 응징하면 된다. 귀족들을 깔아뭉개고 피해 보상을 받을 생각을 하면 오히려 즐겁다.
심각한 건 내부 문제였다.
발데르트 가문은 엘레나의 죽음을 확신했다. 지옥 구역으로 떨어지고, 그 장면을 많은 이들이 지켜봤으니 당연했다.
빈 주인의 자리를 노리고 그녀의 친척들이 욕심을 드러냈다. 그녀가 있을 때는 찍 소리도 못 냈던 것들이 권좌를 두고 서로 암투를 벌였다.
‘그것도 대놓고 벌였지. 독살, 암살은 기본에 외부 세력까지 손을 뻗었군. 정리해야 할 일이 하나가 아니야.’
유스티아 황가는 발데르트 가문의 몰락을 방조했다. 다른 귀족들은 발데르트 가문을 어떻게 뜯어 먹을지만 궁리했다. 사방이 적이다.
‘한 달만 늦게 귀환했어도… 아찔해지는군.’
그녀는 밤낮없이 일했다. 숙청해야 할 것들은 숙청하고, 가문과 관련된 사업을 일일이 확인했다. 육체의 피로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완벽히 회복하는 [완전 회복] 스킬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가주님!!”
문이 열리고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엘레나가 믿을 수 있는 가신 중 한 명이다. 평소 자랑이던 그의 회색 수염은 관리가 안 되어 윤기를 잃었고, 안경 너머의 두 눈은 판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다크 서클이 진했다.
“명령한 일은 끝냈나?”
“…페러이드 상회에 감찰단을 보냈습니다. 회주의 목은 내일 정오쯤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만 해도 사람 머리통을 서른 개는 봤다. 더 보기 지겨우니 그대가 확인하고 알아서 처리해라.”
“네. 가주님.”
“윤허하지 아니하겠다.”
“…네?”
“……사직을 청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용없다는 걸 압니다.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지?”
엘레나는 삐딱하게 앉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는 일전에 명령했다. 어중이떠중이가 찾아오면 문전 박대하라고. 참고로 그 어중이떠중이는 대부분의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다.
“에이플랜 레기온입니다. 가주님이 돌아오시고 후원을 재개한 레기온이지요.”
“그렇군. 접견실로 가기 귀찮다. 여기로 데려와라.”
“그러겠습니다.”
서류로 시선을 내리던 엘레나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그것이… 불경스러운 말이 되겠습니다만….”
“기탄없이 말하라. 지금 나는 그대를 죽일 수 없다. 그대가 죽으면 내가 할 일이 배로 늘어날 테니까.”
“이 늙은 목숨을 걸고 말하겠습니다. 가주님. 식솔의 처형을 멈춰주십시오.”
“친척이라 하여 봐주라고?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그대도 잘 알 텐데?”
“그건 압니다만, 너무 과하신 게 아닌지.”
“어린 것들은 수도원에 보냈다. 나는 충분히 자비를 내렸다. 수도원에 기부한 돈도 제법 되지. …음. 큰일이군. 지금 그대에 대한 의심이 들려고 한다.”
“돈을 받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가문을 위해서입니다. 후계자가 없습니다. 2명만 남기고 모조리 처리하라니…. 만약, 가주님께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
엘레나는 가신의 우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가문이 개판 난 이유 중 하나가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니까.
가신으로서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우려스럽겠지.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예전이었다면 무시했을 말이다. 어차피 이 세계가 30년 이상 존속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면….’
그녀의 머릿속에 신보다 더 신 같은 능력을 가진 남자가 떠오른다.
그 남자라면 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바꾸고도 남을 것이다.
눈을 뜬 엘레나가 말했다.
“10년 내로 후계자를 만들어주마. 그러니 10년만 기다려라. 무얼. 넉넉하게 잡은 기간이 10년이다. 어쩌면 당장 내년에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군.”
“…네? 선택이 아니라… 만드신다고요? 서, 설마 가주님께선 인조인간을?!”
“선을 넘는구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연병장 30바퀴는 뛰어야 했을 거다.”
“……상대는 누구입니까? 혈통이 어떻게 됩니까? 발데르트 공작가에 어울리는 품위를 가졌습니까?”
가신이 정색하며 물었다.
“혈통? 고위 귀족 출신이다.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서 후계자 자리를 꿰찼지. 품위는… 연기를 잘하지. 작정하고 시키면 왕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실제로 황제 노릇도 해봤다고 하더군.”
가신이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탐색해보지만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설마… 황가의?!”
“죽고 싶냐?”
“실언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름 모를 그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군요.”
“…뭘 믿을 수 있다는 거지?”
“왠지 그분은 가주님을 위해서 지옥까지 뛰어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가주님을 여유롭게 만드는 것도 그분이겠지요.”
“여유로워?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안 보이나?”
“마음의 여유 말입니다. 예전에도 농담은 몇 번 받아주시긴 하셨으나… 선이 있으셨죠. 확고한 선.”
“지금은 그 선이 안 보이나?”
“보입니다. 다만 멀리 있어서 흐릿해 보이는군요. 좋은 변화입니다. 이만 나가서 에이플랜 레기온 분들을 데려오겠습니다.”
가신이 밖으로 나갔다. 엘레나는 잠깐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내가 변했다고?’
미간에 주름을 만들던 그녀는 이내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아.’
잠시 후, 에이플랜 레기온 일원들이 그녀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레기온 마스터인 강명진을 필두로 그 주위에는 미녀들이 가득했다. 허나 봄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는 없었다. 모두 장례식에 온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다.
“발데르트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인사는 됐다, 강명진. 시간 없으니 본론부터 말해라. 뭐, 짐작은 간다. 성유진에 관한 거겠지.”
성유진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들이 어깨를 들썩인다. 엘레나의 영민한 머리는 그녀들의 이름과 정보를 떠올렸다. 주서현, 유서희, 릴스네, 이민정.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그녀들이 꽤 많이 신경 쓰였다.
‘…분명 건드렸겠지. 저런 미인들을 가만히 둘 놈이 아니니….’
엘레나는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네. 저희는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 공작 각하와 함께 지옥 구역에서 탈출했겠지요. 그는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모른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지금 이들이 성유진을 찾아가면, 한참 흑주맹을 상대하는 중인 성유진이 곤란해진다. 고개를 쳐드는 심술을 조용히 달래었다.
“지옥 구역을 탈출하고 바로 헤어졌다. 개판인 가문을 수습하느라 그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그렇습니까.”
실망한 기색이 가득하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무척 우울해 보였다. 심술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다.
“그대들은 그의 동료들이 아닌가? 그를 믿지 못하고 나를 찾아오다니… 실망이군. 나라면 그를 끝까지 믿었을 거다.”
“저희도 그를 믿습니다. 저희는 단지 그가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공작 각하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그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다. 동료 간의 신뢰가 별로 없군. 나라면 그를 끝까지 믿고 기다렸을 거다.”
“으음….”
에이플랜 레기온 일원들이 신음을 삼켰다.
엘레나는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
“혹시 그대들은 ‘유리아’라는 이름을 아는가?”
“아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강명진과 여자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엘레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그런가. 뭐,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 이상으로 유능한 여자다. 그리고… 라이벌? 그 비슷한 존재라 할 수 있지. 그대들과는 상관없는 이다.”
엘레나의 말투에 서린 묘한 뉘앙스를 느낀 것일까. 여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긴 검은 머리에 눈매가 날카롭고 키가 큰 여자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주서현.
엘레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힐끗 본 주서현의 가슴은 유리아와 맞먹을 정도로 컸다. 엘레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공작 각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와 어떤 관계입니까?”
“말투가 건방지군. 허나, 그가 속해 있는 레기온이니 용서하마. 그와 나의 관계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관계다.”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엘레나가 조용히 웃었다. 사람을 깔보는 그 미소에 주서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나 주서현은 선을 넘지 않았다. 엘레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주서현은 엘레나가 터무니없는 강자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번엔 내가 묻고 싶군. 그대와 그는 어떤 관계지?”
“…원수 관계입니다.”
“그런가. 난 또 주인과 암캐의 관계인 줄 알았다만.”
“뭣!”
주서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엘레나는 조용히 웃었다. 기가 세 보여서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말 암캐로서 조교 당한 모양이다.
“강명진.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줬으면 하는군.”
“공작 각하의 시간을 빼앗아 죄송했습니다.”
“괜찮다. 그에 대해선… 믿고 기다려라. 설마 그가 그대들을 버리겠는가?”
그들이 인사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엘레나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공간에서 소라고둥 하나가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소라고둥을 보며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자기가 벌인 일이니 알아서 하겠지.’
•••
나는 헬텐의 간부, 천마로서 광대 가면을 쓰고 리 메이와 함께 움직였다. 흑주맹의 간부들을 한 명씩 찾아가 설득한 것이다.
‘설득이 아니라 협박에 가깝지만.’
눈앞에 있는 중국인 남성을 바라본다. 리 메이는 그에게 매료와 매혹을 걸었다. 매혹이 3번 중첩되니 충실한 노예가 되어 자신이 가진 것과 저지른 비리 등 약점이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내뱉는다.
리 메이는 상대에게 매료를 매일 1시간 동안, 30일 정도 꾸준히 걸어 상대의 무의식까지 바꾸어 완전한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허나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약점으로 협박한다. 협박이 먹히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였다.
“유진 씨. 흑주맹주가 눈치챈 것 같아요. 포섭한 간부들이 일러바친 건 아니고… 제 고유 특성을 알고 있으니 추측했겠죠.”
지금 하는 일은 원활한 흑주맹 운영을 위해 작업 쳐놓는 것에 불과했다.
흑주맹주가 알아차렸다면 이 짓도 힘들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흑주맹주랑 짜릿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군.”
흑주맹주를 죽이고 흑주맹주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뒤에 흑주맹을 다시 한번 물갈이한다. 조직을 이끌어본 적 없는 리 메이의 역량에 맞게 흑주맹의 크기를 줄인다.
“가자.”
우리는 공간 이동 주문서를 뜯어 흑주맹주가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