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7화 〉 1087. 신의 아틀란티스
제 970 구역, 장미의 도시 중심에 있는 가시 장미 레기온 건물로 향했다. 장미의 도시에서 가장 큰 저택이었다. 귀족 저택과 비슷하다. 담벼락이 있고, 장미 정원이 있었다. 입구는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경비병은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나와 주서현의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고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안내했다.
저택에 들어가자 가시 장미 레기온 소속 일원들의 시선이 꽂혔다.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인 시선도 아니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은 절반 이상이 여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미녀는 거의 안 보였다. 대다수가 용병처럼 거친 외모였다.
“아주 태평하게 들어오셨군.”
“제법 괜찮은 남자인데? 반면 여자는 마음에 안 드는군.”
“에이플랜 레기온 마스터 쪽이 더 내 취향이야.”
그녀들은 나와 주서현을 보며 수군거렸다. 주서현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자 그녀들은 더 시시덕거렸다. 음담패설을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일부러 도발하는 것이다.
나는 주서현이 도발에 휘말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반대로 내가 도발에 발끈하지 않을까 걱정했는지 내 팔을 꽉 잡았다. 뭐,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강명진의 말도 있으니 오늘 하루는 무난하게 보내야지.’
내일이면 에이플랜 레기온의 습격이 시작된다. 성공한다면 상황은 바뀌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못생긴 년들 사이에 있으니 주서현의 외모가 더 빛을 발하는군.’
저 여자들이 주서현을 싫어하는 이유가 주서현의 외모 때문이리라.
현대 지구나, 이 세계나 외모가 뛰어나면 우대받는다. 당장 리 메이만 해도 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신좌의 선택을 받지 않는가.
‘위험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잘만 사용하면 무기가 될 수 있지.’
주서현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에겐 미모 이상으로 빛나는 검의 재능이 있었으니까.
‘미래에 검제가 되는 여자가 지금은 내 거라는 거지.’
내가 선물해준 장미 목걸이를 목에 찬 주서현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녀의 가슴 모양, 유두의 색깔, 보지털과 보지의 형태, 항문의 생김새 등이 떠오른다. 도도한 그녀의 얼굴 위로 내 밑에 깔려 헐떡이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꽈악.
내 팔을 잡은 주서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윽. 갑자기 왜 그래?”
“방금 네 표정은 역겨웠어. 분명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이상한 생각이라니. 널 생각하고 있었는데.”
“…….”
주서현은 입을 다물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서현의 손아귀 힘이 빠졌다. 저택에 오기 전에 골목에서 주서현과 섹스를 하고 온 참인데, 그녀를 보니 또 섹스하고 싶어진다.
나는 애써 주서현에게서 시선을 떼며 주위를 살폈다. 가시 장미 레기온에는 남자도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여성들과 달리 기가 눌려 있는 듯한 인상이다.
‘리 메이에게 들은 정보대로군. 이 레기온에선 기본적으로 여성의 위치가 높아. 페데리카의 남자친구인 산타누를 제외하고 말이야.’
가시 장미 레기온의 핵심은 둘이었다.
페데리카와 산타누.
그 둘이 있기에 가시 장미 레기온이 유지된다고 보면 된다. 달리 말하면 그 둘이 가시 장미 레기온의 한계이기도 했다.
경비병의 안내가 끝났다. 목적지는 3층의 어느 방이었다. 경비병은 익숙하게 방문을 노크했다. 안쪽에서 페데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페데리카를 만날 수 있었다.
의자에 앉은 페데리카가 요염하게 웃고 있다. 검은색 드레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 눈길을 끄는 풍만한 몸매. 가시 장미 레기온 소속 여자 중 이 우아한 저택과 유일하게 어울리는 여자였다.
“어서 와. 난 너희를 환영해.”
페데리카가 미리 준비한 차를 권유했다. 처음에는 홍차인 줄 알았는데, 익숙한 홍차 향이 아닌 장미 향이 났다.
나와 주서현은 섣불리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에이플랜 레기온과 가시 장미 레기온은 최악의 관계다. 적이 주는 차를 넙죽 받아먹었다가 독으로 죽을 수 있었다. 내겐 완전 회복이 있긴 하나 굳이 차를 마실 필요는 없다.
“독은 안 들었어. 대놓고 독을 탄 차를 대접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제가 차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러니. 술을 준비할 걸 그랬네.”
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페데리카가 찻잔을 들었다. 보란 듯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나는 그녀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장미의 도시의 용병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사과드리겠습니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보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다. 페데리카가 보석을 좋아하는 걸 알아낸 강명진이 준 것이다.
“사과는 받아들일게. 솔직히 먼저 잘못을 저지른 것도 그 용병이잖니.”
페데리카가 우아한 손길로 보석 주머니를 가져갔다. 그 용병에게 사주를 한 건 페데리카 본인이다. 병신이 된 용병이 전부 불었다.
“사과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접 찾아왔는데 사과 정도는 받아줘야지. 그리고 사실 사과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너희가 이곳에 왔다는 게 중요하지.”
페데리카가 미소 짓는다.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에 주서현이 몸을 긴장시키며 페데리카를 경계했다.
나는 도리어 안심했다.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과 따위를 받아내려고 나를 지목하며 레기온 본부로 불렀을 리가 없었다.
“뇌절사 성유진. 신좌는 그 유명한 천공의 주인이고, 제국의 환상공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지. 에이플랜 레기온이 환상공의 후원을 받는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
“절 조사하셨군요.”
“딱히 열심히 조사하진 않았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에 대한 정보는 들어오던걸.”
“저에 대한 소문은 좀 과장되어 있습니다. 환상공과 관계가 있긴 하나 깊은 관계는 아닙니다.”
“환상공을 위해 지옥에 뛰어들었다며? 그런데도 깊은 관계가 아니다라…. 누가 그 말을 믿을까. 후후.”
페데리카가 여유롭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정보에 대한 확인 작업까지 모두 끝마친 모양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눈치 빠른 자들은 내가 엘레나와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끔씩 내게 청탁까지 오는 상황이었다.
“성유진. 주서현.”
찻잔을 내려놓은 페데리카가 우리를 불렀다. 미소 짓던 그녀가 정색하니 주변 분위기가 변했다.
“너희에게 제안할게. 에이플랜 레기온을 버리고 가시 장미 레기온으로 오렴. 너희의 재능은 에이플랜 레기온에서 썩기엔 아까워. 가시 장미 레기온의 마스터로서 전력을 다해 지원할 것을 약속할게.”
“어림도 없는 소리…! 에이플랜 레기온은 가시 장미 레기온에 비해 조금도 꿇리지 않아!”
주서현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주서현의 성격상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면에 나는 침묵했다.
“인정해. 에이플랜 레기온은 대단한 레기온이야. 지금까지 승승장구해왔지.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어. 이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특히나 공략을 추구하는 레기온으로서 더욱더.”
“가시 장미 레기온은 공략을 추구하는 레기온이 아닙니까?”
“우리에겐 아틀란티스 공략은 두 번째야. 첫 번째는 부귀영화지. 귀족이 되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싶지 않니?”
“아무나 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귀족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미 준비는 대부분 끝났어. 1년 넘게 준비했지. 필요한 건 기존 귀족들의 인정이야.”
“환상공의 영향력이 필요한 거군요.”
저번 사건으로 인해 발데르트 공작가의 입지가 흔들렸다곤 하나, 엘레나는 지옥에서 멀쩡히 귀환했다. 제국오공(帝國五公)의 지위는 그대로다. 엘레나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귀족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 알고 있는 걸.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니?”
“아니요. 귀족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백환] 세계에서 귀족 노릇은 충분히 했다. 원한다면 다른 세계에서 귀족이나 왕도 될 수 있다.
굳이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에서 귀족이 될 필요성은 없었다. 이 세계의 귀족은 다른 세계보다 더 큰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력과 돈이 있다면 귀족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흐음. 내가 너무 성급하게 대답을 요구한 것 같네.”
“시간이 지나도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만.”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천천히 생각할 시간은 필요할 거야. 오늘은 저택에서 머물도록하렴. 대답은 내일 다시 들을게.”
페데리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목소리가 강압적이다. 이것마저 거절하면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다.
“예. 차분히 생각해본 뒤에 다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형식적으로 말하며 주서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에 머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내일 밤에 강명진이 병력을 이끌고 가시 장미 레기온을 습격할 테니까.
•••
주서현과 나는 따로 방을 배정받았다. 다행히 방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주서현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여기까지 와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대단했다.
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저택의 구조도 파악할 겸 저택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가시 장미 레기온은 돌아다니는 내가 신경 쓰이겠지만, 알게 뭔가.
우선 저택 1층으로 내려갔다. 별채가 있었다. 크기나 생김새를 보니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곳인 모양이다.
문이 열려 있었다. 30명에 달하는 남자와 여자가 연회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고 여자 할 것 없이 헐벗은 상태다.
‘광란의 섹스 파티라도 열었나?’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었다. 섹스 파티가 아니라 마약 파티를 벌였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마약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 거구의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검은 머리의 근육질 남자다. 산타누. 페데리카의 남자친구인 그는 마약에 취해 있었다.
‘딱 죽이기 좋은데?’
산타누를 여기서 죽이고 주서현과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조용히 산타누에게 다가갔다. 산타누는 마약에 취했음에도 반응했다.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날 본다.
“게일이냐? 너도 하나 빨아. 기분 좋다고….”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건가. 약에 단단히 취했군.”
“오, 게일. 네 어미가 날 유혹하고 있어. 망할! 죽여버리겠다! 게일!!”
산타누가 갑자기 급발진했다.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장을 향해 뛰어오른 것이다. 3M 넘게 뛰어오른 그는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산타누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꿈틀거렸다.
“페데리카…. 페데리카…. 살려줘… 페데리카…. 게일이 날 죽이려고 해….”
살려달라고 말하는 주제에 입으로는 실실 웃고 있다. 그 기괴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꽤 강력한 마약일 것이다.
산타누를 죽일 마음을 먹고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마약에 관심 있니?”
페데리카였다. 그녀가 나를 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다.
나는 산타누를 죽이는 것을 포기했다.
“마약이라. 해본 적은 없는데 관심은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해보겠니? 처음이 힘들 뿐이지 한 번 하고 나면 기분 좋아질 거야.”
페데리카가 다가왔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페데리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진한 장미 향이 느껴졌다.
“우리 도시의 비밀 특산물이야. 특수한 장미를 원료로 연금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마약이지. 간단히 장미 마약이라고 불려.”
페데리카의 검은색 드레스 상의 부분이 살짝 내려갔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향했다. 선홍색 젖꼭지가 살짝 보였다. 나는 군침을 삼켰다.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다 은근히 보여주니 색달랐다.
페데리카는 입안에 무언가를 넣고 내 어깨를 잡았다. 그녀가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요염한 붉은 혀 위에 검은색 캡슐이 있었다.
페데리카가 요염하게 웃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