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3화 〉 1103. 다크 문
내가 속해 있는 부대는 공식적으로 이름 없는 부대다.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다. 이 세계에서 인권은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문명이 발달하며 중세시대 이상의 최소한의 인권은 존재했다. 아무리 노예라 해도 인간을 인체 실험에 사용하는 건 불법이다.
‘정작 이 세계에서 법을 지키면서 일하는 놈들은 별로 없지.’
이 프로젝트를 숨기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인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서다. 야심 만만한 정치인들은 군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업적을 얻어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니까.
이 부대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을 뿐, 비공식적인 이름은 존재한다. 667 부대. 667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직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위해 존재하는 부대다.
667 부대의 이등병이자, 노예이며, 실험체인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누스 교관이 각 분대에 하나씩 준 지도.
부대 근처의 지형 일부가 그려져 있었다. 부대는 시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동그라미 하나로 글자를 적어 대충 표현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가상의 부대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남쪽에 사격장이 있으며, 서쪽에 의무실이 있다. 프로젝트 관련 자료가 보관된 곳은 서쪽이다. 따라서 서쪽의 경계가 가장 삼엄하다. 부대 중심에 우리가 머무는 내무실과 마나 수련장, 식당이 있다.
동쪽에 격투술, 검술, 창술 등의 훈련장이 존재한다. 아침 점호와 아침 구보를 하는 곳이 동쪽이었다.
북쪽은 기억에도 없는 곳이나 부대 관계자들이 머무는 숙소로 추정된다.
나는 부대 근처 지형을 암기했다. 언젠간 이 정보들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지도는 임무와 관련된 정보만 들어있다. 즉, 다른 분대는 우리가 받은 지도와 비슷하지만 다른 정보가 들어있다는 거지. 그 지도를 보고 싶다만… 교관의 눈에 너무 띄게 되겠지.’
부대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움직인다. 감시의 시선이 곳곳에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최대한 의심을 받지 않게 조심스레 움직여야 했다.
“211호. 작전 브리핑은 언제 할 거야?”
212호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내 손에 들린 지도를 바라본다.
이번에 교관들은 개입하지 않는다. 작전을 수립하고 장비를 준비하는 것까지 모두 분대끼리 해야 했다.
“점심 먹고 회의로 결정할 거야. 너도 작전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그때 말해줘.”
임무 시작 시각은 저녁 식사 이후 해가 지기 시작할 때다. 오늘 훈련은 없고, 시간은 제법 많이 남았다.
“알았어. 참, 오늘 점심은 뭔지 아니?”
“글쎄. 슬슬 해산물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212호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제발 생선튀김만 안 나왔으면 좋겠어. 그건 진짜 별로야.”
그 의견에는 나도 동감한다. 그리고 점심에 생선튀김이 나왔다.
•••
점심을 먹고 내무실에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지도를 내무실 벽에 붙이고 말했다.
“우리 임무는 이 구역을 점령하고 내일 새벽까지 유지하는 거야. 내일 새벽에 교관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임무 현황을 파악하고 점수를 매길 거야. 어떤 기준인지는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낙제점을 받을 경우….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지?”
몇몇 아이들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마나 진액 투여.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31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또한 마나 진액을 투여 받는 건 확실한데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31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도 31호가 싫다고 말하는 순간 작전은 물거품이 된다.
다행히 31호는 조용히 회의를 지켜봤다. 트롤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어 보인다.
“211호. 저번 임무에서 저격 실력이 뛰어났다고 들었어. 이번에도 네가 저격할 거야?”
“아니.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점령해야 할 곳은 산꼭대기 근처에 있어. 근처에 마땅한 저격 포인트가 없어. 흩어지는 인원 없이 모두 같이 움직일 거야.”
산은 저격수와 맞지 않았다. 빼곡한 나무가 저격을 방해하니까. 그나마 고지가 높은 곳에 있으면 모를까. 이번 임무는 산 위로 올라가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다크 문이 뜨는 날이지. 혼자 움직이는 건 더 위험해.’
작전에 관한 회의는 1시간 정도 이어졌다. 모두가 함께 작전술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의견은 비슷비슷했다.
“장비는 어떻게 할까?”
212호가 물었다. 저마다 자기 의견을 말했다. 여기서 의견이 갈렸다. 폭탄을 비롯해 최대한 장비를 많이 가져가는 편이 좋다는 쪽과 최소한의 필요한 장비만 가져가는 쪽.
나는 후자에 손을 들었다.
“이번 임무의 핵심은 산행이야. 장비는 가벼운 편이 좋아. 그리고 폭탄은 강력하지만, 너무 요란해. 굳이 다른 몬스터의 주의를 끌 필요는 없어. 오늘 밤이 다크 문이란 걸 잊어선 안 돼.”
그리고 당연하게도 반발이 일어났다.
“짐을 폭탄으로 가득 채우자는 게 아니야. 필요한 만큼만 챙겨 가자는 거지. 최악의 경우 폭탄으로 몬스터를 다 쓸어 버려야 우리가 살 수 있을 거야.”
88호.
1분대에서 나를 비롯해 4명밖에 없는 남자로 폭탄 예찬론자였다. 평소에 조용한 성격인 그는 두 눈에 힘을 빡 주고 물러설 기색 없이 말했다.
듣자 하니 저번 임무에서 폭탄을 이용해 적들을 쓸어버리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골이 아파지는 군.’
88호를 설득할 말을 떠올린다. 저 고집스러운 눈을 보니 못해도 30분 이상은 설득해야 할 것 같다. 권력 없는 분대장 자리라 괴롭다. 못해도 내가 더 계급이 높았다면 모를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이등병이었다.
“211호의 의견에 찬성이야. 211호의 말대로 하자.”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던 31호가 말했다.
“그, 그래.”
88호는 눈에 힘을 풀었다. 그는 31호를 힐끔거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 심정은 복잡했다. 그녀가 날 도와준 건 고맙긴 한데, 나 또한 88호랑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31호가 트롤 짓을 하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각자 개인 시간을 가졌다.
나는 필요한 장비 목록을 종이에 적고 비누스 교관을 만났다. 비누스 교관은 장비 목록을 스윽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율적으로 잘 짰군. 단, 수류탄을 비롯한 폭탄류는 사용할 수 없다. 섬광탄도 마찬가지다.”
비상용으로 수류탄을 신청했는데 반려 당했다. 비누스 교관은 다크 문에 요란한 공격은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 이유가 아닌 것 같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네게 할 말이 있다.”
비누스 교관은 콜라를 꺼내 내게 건넸다. 미지근한 콜라였다.
“……아이스 마법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괜찮다. 저번보다 실력이 더 나아졌기를 바라지.”
“연습했습니다.”
콜라 캔을 따고 아이스 마법을 사용했다.
저번에는 절반을 얼렸지만, 이번에는 20%를 얼렸다. 콜라를 꿀꺽꿀꺽 마셨다. 강렬한 탄산이 목을 때린다. 지금 이 느낌으로는 매일 콜라를 마시고 싶을 지경이다.
‘콜라 하나 원하는 대로 먹지 못하는 신세라니…. 기분이 확 나빠지는군.’
콜라 캔을 내려놓았다. 비누스 교관은 그때까지 입가를 비틀며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희 1분대는 내가 담당하게 됐다.”
“…그렇군요. 교관님들이 따라오시는군요.”
당연한 일이었다. 노예들을 뭘 믿고 풀어주겠는가. 노예들에게 관리자가 붙는 건 당연했다. 노예가 죽더라도 나서지 않을 관리자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사고가 터지면 31호를 목숨을 바쳐 지켜라.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30초만 버티면 된다. 네겐 렉시 중사에게 받은 4급 배리어 아티팩트가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31호에 대한 노골적인 편애. 이제와서는 별 감흥도 없었다.
“명령대로 31호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211호, 나는 네가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비누스 교관은 콜라 캔 여섯 묶음 2개를 내게 건넸다. 12개. 분대원이랑 같이 먹으라는 뜻이다.
“효율적인 작전과 장비 지원에 대한 상이다. 분대원들과 나눠 먹도록.”
“…감사합니다.”
정말 이게 상인지는 둘째치고 일단 주는 거니 받았다.
‘31호에게 콜라를 주는 건가?’
예상은 적중했다.
31호는 콜라를 챙기자마자 아이스 마법으로 차갑게 만들어 마셨다. 31호는 콜라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
저녁을 먹고 부대 밖으로 나왔다.
총 156명.
667 부대에 있는 이등병의 수였다. 처음 부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본래 300명에 가까웠던 숫자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마나 진액 투여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임무지에서 죽고, 항명해서 죽고.
‘아마 이번 임무에서도 30명 이상 죽겠지.’
나는 그 30명에 들어가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점에선 1분대란 점이 다행이군.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한 31호가 끼어 있으니까.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생존률은 다른 분대보다 더 높아지지.’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새파랗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둥글고 하얀 달이 떠오른다.
원래 오늘은 반달이 떠오를 주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크 문. 달의 주기와 상관없이 만월이 떠오른다.
달이 밤하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새하얀 달의 표면이 검게 변한다. 어두운 밤하늘이지만, 신기하게도 다크 문 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다크 문이 떴군.”
비누스 교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얌전했던 대기 중의 마나들이 사납게 날뛰었다.
아스트랄이 열리고 마나 로드가 자극받는다. 나는 마음속에서 기이한 열망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이게 다크 문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영향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특히 31호의 반응이 꽤 격했다. 항상 무표정했던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고, 뺨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다크 문의 영향일까. 31호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나는 시선을 땅으로 내리며 호기심을 없앴다.
그녀와 깊게 관련되어 좋을 것 없다.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다.
“임무를 시작해라. 건투를 빌지.”
비누스 교관이 말했다.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나는 1분대를 이끌고 산의 초입에서 멈춰 섰다. 장비를 착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야시경과 소음기였다. 은밀하게 움직여서 고블린 부락을 먼저 발견하고 조용히 처리한다. 작전의 핵심이었다.
야시경을 착용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낙엽이 쌓인 땅을 조심히 밟으며 전진한다.
나는 시각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청각과 촉각을 활용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위의 마나를 느끼는 게 최선이겠지만, 다크 문에 의해 대기의 마나가 사나워져서 육체 감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앞서 걸어가던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분대의 움직임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