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1화 〉 1111. 다크 문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잠에서 깬 나는 깔고 누운 모포를 바라봤다.
모포 한 장 바닥에 깔았을 뿐인데도 침대에 누워 잔 것처럼 편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벌레 방지다.’
벌레가 모포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탐나는 효과를 가진 마법이었다.
나는 모포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모포에 걸린 마법 술식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다.
‘마법이 아닌 다른 기술도 적용된 것 같군. 단순한 마법 모포가 아니군.’
술식을 살펴보던 나는 곧 눈을 찡그렸다. 핵심 술식에 보안이 걸려 있었다. 술식 위에 다른 술식을 덮어씌워 본래 술식을 가리는 방식이다. 보안 술식을 해체하고 핵심 술식을 알아내려면 이 모포를 한 번 분해할 필요가 있다.
‘…모포를 찢어서 안쪽을 살펴보면 감이 올 것 같은데…. 이 모포의 주인은 렉시다.’
깔끔하게 포기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기회가 올 것이다. 돈을 벌어서 따로 이 모포를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잠자리를 정리한 나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렉시 교관을 바라봤다.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그녀는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옷은 전부 흐트러졌다. 상의 단추는 전부 풀려 브래지어가 보였고, 하의는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리는 검은색 팬티는 면적이 좀 작았다.
‘이해는 해. 어제는 더웠고, 마법 모포는 편안해도 더위를 막아주는 건 아니니까. 더위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벗은 거겠지.’
난감했다.
이대로 그녀의 몸을 계속 보고 있기도 뭐하고, 다가가서 옷을 정리해주는 동안에 눈을 뜨기라도 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으음.’
고민하던 나는 모른 척하기로 하며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에는 렉시의 알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풍만한 가슴과 하얗고 매끈해 보이는 허벅지, 면적이 작은 검은색 팬티까지.
성욕이 꿈틀거린다.
나는 재빨리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
가지고 있는 비상식량은 기껏해야 3일 치 밖에 되지 않기에 이 숲에서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주위를 돌아다니며 식용 가능한 식물을 찾는다.
삐리리리리리.
알람이 울린다. 어젯밤에 렉시 교관이 설치해둔 알람 마법이 날 인식하고 울린 것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렉시를 자연스럽게 깨우려고 일부러 알람 마법에 걸린 것이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상체를 일으킨 렉시 교관과 눈이 마주쳤다. 렉시 교관은 살짝 어벙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흐트러진 제복 사이로 출렁이는 가슴이 보였다. 브래지어를 차고 있음에도 저렇게 출렁인다는 것에 놀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먹을 수 있는 식물 몇 가지를 채취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리가 멈칫했다. 15분이 지났는데도 렉시의 옷차림은 흐트러진 상태 그대로였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의미 없이 허공을 보고 있다.
“렉시 교관님.”
“…누나라고 불러.”
“네. 누나. 일어나셨으면 빨리 준비하시죠.”
“아침은 힘들단 말이야. 게다가… 너무 더워.”
“저희는 임무 진행 중입니다.”
“느긋하게 하자니까. 휴가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기엔 최악인 곳이지만….”
렉시 교관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옷과 잠자리를 정리한다. 비몽 사몽한 얼굴과 다르게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모포를 개는 솜씨가 칼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군인이었다.
그녀는 제복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쳤다. 티셔츠가 하얀색이라 검은색 속옷이 비쳤다. 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그녀의 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법으로 불과 물을 만들어내 채취해온 식물을 삶고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맛은 최악이었다. 비위가 약했다면 당장 구역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맛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찝찝하네. 움직이기 전에 샤워부터 할까?”
“여기 어디에도 샤워할 곳은 없어요.”
“마법이 있잖아.”
“…마나는 최대한 아껴야죠. 가뜩이나 여긴 루멜 숲이에요. 새벽 동안은 운이 좋아서 몬스터나 맹수를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 행운이 계속 이어지리란 법은 없어요.”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내는 건 효율이 영 안 좋았다. 마시는 정도의 소량의 물이라면 모를까. 샤워 가능할 정도의 물을 만들어내는 건 마나 소모가 생각보다 더 크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네. 네가 나보다 더 낫다, 야.”
식사를 끝내고 지도를 보며 목표를 확인했다.
“오늘 목표는 이 포인트를 확인하는 거야. 내일은 옆에 있는 포인트를 확인하고. 천천히 해도 5일이면 끝나겠네.”
“포인트를 모두 확인했는데도 레지스탕스가 없으면요?”
“임무는 실패하는 거지, 뭐. 처음부터 정보가 잘못된 탓이니 우리 잘못은 없어. 마음 편하게 먹어.”
오늘은 그녀가 앞장서서 덩굴을 헤치며 걸어갔다. 그녀의 등을 본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땀에 젖은 하얀 티셔츠로 그녀의 허리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단련된 몸이라 그런지 허리 라인은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211호. 여기서 쉬다 가자. 더위도 더위지만 너무 습해서 짜증 나.”
렉시 교관이 물컵을 들었다. 마법으로 물을 채우고 주머니에서 꺼낸 커피 티백을 넣고 얼음으로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커피 티백을 거절하고 얼음물을 마셨다. 싸구려 티백은 내 취향이 아니다.
“크르르르르….”
뿔 세 개 달린 재규어가 나타났다. 돌연변이 맹수다. 이 세계에선 몬스터로 분류된다.
“1급 트리플 재규어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권총을 꺼내는 순간 적의를 느낀 재규어가 내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누런 이빨이 햇빛을 받아 빛난다.
‘배리어.’
까앙.
배리어를 부수지 못하고 반발력에 밀려난 재규어가 다시금 달려든다. 나는 재규어의 입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색 마탄이 냉기를 흩뿌리며 재규어의 뇌를 관통했다. 재규어의 육중한 몸이 아래로 쓰러진다. 놈의 머리는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마탄을 쓴 거야? 아깝게.”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어제 우리를 쫓던 군인에게서 약탈한 마탄이었다.
나이프를 들고 재규어를 도축했다. 먹을 만큼의 고기만 챙겼다.
“점심과 저녁은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겠군요.”
“바비큐는 좋지.”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나 맹수가 나타나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정글이나 다를 바 없는 숲을 걸었다. 렉시 교관은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적당히 그녀에게 대꾸해줬다.
그러다 돌연 렉시 교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녀가 적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디텍션.’
2급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무형의 파동이 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나무의 구조, 덩굴의 형태 등이 느껴진다. 나는 일부러 작은 동물과 벌레를 무시했다. 정보량이 너무 많으면 탐지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지금의 나는 날 기준으로 반경 70m 정도를 탐지할 수 있었다.
“…2시 방향 50m 거리에 사람 셋이 있습니다.”
“맞아. 다른 정보는?”
“남자로 추정되며 소총을 들고 있습니다. 마나 각성자는 아닙니다. 레지스탕스 소속인지, 105 부대 소속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레지스탕스 쪽일 확률이 높습니다. 105 부대였다면 고작 3명을 보냈을 리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마 정찰을 나왔거나, 사냥을 하러 나온 거겠지. 으음. 어떻게 해야 할까?”
렉시 교관이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촉구한다.
“…붙잡아서 심문하거나, 조용히 미행해서 본거지를 알아내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심문은 자신 없으니 미행으로 하자.”
“네. 렉시 누나.”
누나라는 호칭에 렉시 교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 곁으로 성큼 다가온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두들겼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물씬 느껴지는 그녀의 달짝지근한 체향에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시에 사일런스 마법을 사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놈들은 주위를 확인하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는 통일되지 않은 옷을 입었다. 후줄근해 보이는 옷은 움직임이 편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장점도 없어 보였다.
손에는 소총을 들고 있다. 이 세계에선 도시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총들이다.
‘레지스탕스가 확실하군.’
나와 렉시 교관은 10m 정도 거리를 두고 그들을 미행했다. 마음만 먹으면 5초 내로 저들을 모두 죽일 자신이 있었다.
전력 차이는 확실하다. 살짝 긴장을 풀고 그들의 뒤를 미행한다.
“젠장. 왜 이 숲에서 정찰 따위를 해야 하는 거야?”
“우릴 죽이려고 군대에서 사람을 보냈다잖아.”
“우리가 먼저 찾아 나설 필요는 없잖아. 적당히 미끼를 던져 놓으면 상대 쪽이 알아서 달려들 거 아니야.”
“듣자 하니 저격수라고 하던데? 놈들이 자리 잡기 전에 먼저 찾아내면 일이 더 편해져. 저격수의 무서움은 너도 잘 알잖아.”
“알지. 근데 여기서 저격이나 제대로 할 수 있나?”
“실력 좋은 저격수 놈들은 충분히 할 걸?”
그들은 정찰 루트를 반복해서 돌아다녔다. 2시간 정도 걷던 그들은 방향을 확 꺾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드디어 거처로 귀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나무 아래로 교묘하게 가려진 오두막이 나왔다. 오두막 주위로 무장한 병력이 경계하며 서 있다. 제대로 경계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이 주위를 보고 있다.
나는 적들의 정확한 인원과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 이런 막사에는 탐지 마법을 대비해놓기 마련인데… 여긴 대비고 뭐고 하나도 없군.’
방금 오두막에 들어간 인원 3명까지 합해서 총 7명이다. 위치도 전부 파악했다. 오두막에 5명이 들어가 있고, 2명은 경계를 서고 있다.
‘레지스탕스는 맞는데 수가 적어.’
못해도 30명 이상이어야 한다.
‘오두막의 크기가 작은 걸 보면… 인원을 처음부터 나눴나?’
복잡해지는 생각을 털어내고 렉시 교관을 바라봤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결정권을 쥔 건 그녀였다.
렉시 교관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수신호를 보낸다. 그 뜻은 몰살. 행동 개시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일런스 마법으로 인해 총성은 아예 없었다. 총알은 정확히 경계를 서는 병사 2명의 미간을 꿰뚫었다.
오두막에 바로 진입한다. 나는 정면으로, 렉시 교관은 2층 창문으로.
문을 열자마자 3명이 이쪽을 쳐다본다.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사로잡아야 한다. 루멜 숲에 숨어든 레지스탕스의 정보가 필요하다.
“씨발! 프리셀 군인이다!”
“갈겨!!”
그들이 소총을 내게 겨누었다. 3개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티티티티티티팅!
총알은 2급 배리어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마, 마법사다! 마탄을 꺼내!”
그들이 품에서 마탄이 장전된 권총을 꺼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오두막의 문을 열기 전부터 배리어와 함께 다른 마법을 준비해뒀다.
‘일렉트릭 윕.’
오른 손바닥에서 시퍼런 전류가 길쭉하게 뿜어져 나온다. 나는 전류의 채찍을 적들을 향해 휘둘렀다.
감전당한 그들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감전으로 기절한 것이다. 본래 일반인인 그들은 죽어야 정상이지만, 술식을 조금 비틀어 일렉트릭 윕의 위력을 기절할 수준으로 낮췄다.
‘2층에 있는 2명은… 이미 끝났군.’
이 정도 거리면 탐지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나는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 기절한 남자들을 묶었다. 남자들이 가진 마탄을 빼앗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