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0화 〉 1130. 아카데미의 구원자
울렁울렁울렁울렁.
공간이 요동치며 멀미를 유발한다.
“환경이 바뀔 때는 몬스터의 습격이 없을 거야. 그러니 감각에 집중하지 마. 더 어지럽게 느껴질 테니까. 잠깐 동안 아예 감각을 끊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성하리가 팁을 하나 알려주었다. 그런데 알려주는 게 좀 많이 늦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멀미를 더욱 유발했다.
‘감각을 끊으라고…? 그게 생각처럼 될 리가 없잖아.’
그러나 입 밖으로 불만을 내뱉진 않았다. 자기는 가능하다는 대답이 되돌아오겠지.
이시은은 눈을 감았다. 감각 중 하나인 시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는 비교적 꼿꼿이 섰다.
반대로 최다연은 두 눈을 부릅뜬 상태로 울렁이는 공간을 직시했다. 그녀의 속내는 뻔하다. 자존심 때문이겠지. 최다연은 지금처럼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최다연이 비틀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울렁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손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최다연의 눈이 내게 향한다.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다리가 삐끗했다. 그녀의 몸이 내게 안겨졌다.
“……!!”
최다연이 숨을 삼켰다. 나는 저번에 그녀와 했던 포옹을 떠올리며 허리를 매만졌다. 만지기 좋은 허리다.
울렁거리던 공간이 안정화되었다. 우리는 바위 지대에 있었다. 졸졸졸. 바위 사이로 냇물이 흘렀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렸다. 최다연의 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허리를 잡고 있기에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긋이 시선을 마주한다. 최다연은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거기!! 지금 이 상황에 뭐 하는 거야?!”
성하리의 목소리였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묘하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최다연은 서둘러 내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이강후가 최다연의 곁으로 달려갔다.
“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시끄러, 닥쳐.”
“…네? 네. 닥치겠습니다.”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토끼 괴물도 점점 많이 튀어나왔다. 전위 둘이서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나와 이시은도 전투에 나섰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 달려온다.
칼을 휘둘러 토끼를 베어냈다. 토끼가 반으로 갈라진다. 갈라진 토끼의 몸이 재생하더니 2마리로 증식했다. 증식한 놈들을 베어내면 또 시체에서 증식한다.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토끼는 단순 무식하게 달려들었으니까.
‘…지겹다.’
기계처럼 증식하는 토끼를 죽인다.
힐끔, 주위를 둘러봤다. 나처럼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전투에 열중하고 토끼가 증식하면서 상대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류하나의 입에선 연신 뜨거운 숨결이 흐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하리는 멀쩡했으나, 그렇다고 편하게 있는 건 아니었다. 지친 학생들은 조금씩 실수를 저질렀고, 실수를 처리하는 건 성하리의 몫이다.
“이강후, 뒤로 물러서! 최다연! 조금씩 명중률이 떨어지고 있어. 휴식을 취해! 성유진! 정신 안 차릴래?! 다른 애들과 손을 맞춰!”
내게도 잔소리가 쏟아졌다.
‘손을 맞추라니….’
나를 포함해 다른 애들의 개성이 지나치게 강했다. 차라리 혼자 싸우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의외로 김천우랑 합이 잘 맞는 편이다.
“유진아! 하나가 위험해!”
김천우의 말에 류하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류하나가 증식된 토끼에 포위되었다. 총 여섯 마리. 지친 류하나의 실력으로는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힐끗. 성하리를 바라본다. 류하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나 나서진 않았다.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갈게. 김천우. 내 자리를 맡아.”
“빨리 갔다 와. 오래는 못 버텨. 이 진형의 중심은 너니까.”
토끼를 베어내며 류하나에게 향하며 외쳤다.
“류하나! 버티면서 뒤로 이동해!”
류하나가 날 바라본다. 굵은 땀방울이 그녀의 뺨에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천우와 대립했을 때와 달리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파직, 파지지직.
영천류(影天流) 뇌섬(雷閃).
번개를 휘감은 검기가 날아가 토끼를 베어낸다. 3마리의 토끼가 한 번에 갈라졌다. 그중에서 증식하는 토끼는 하나다. 토끼의 증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칼을 휘둘렀다.
까아앙!
내 칼과 류하나의 검이 토끼를 베면서 부딪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비하지 못한 충격이 온다. 손이 짜르르 울렸다. 류하나는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새로운 토끼 무리가 류하나를 노린다.
‘이런 젠장, 찰나!’
류하나를 구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성하리의 창이 날아갔다. 창이 지나간 여파만으로 토끼들의 몸이 찢겨 나간다.
“너희들! 엉망이구나? 오퍼레이터가 없다고 해도 합이 너무 안 맞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전투 상황은 끝나 있었다. 성하리는 그 중심에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1학년이라도 던전 공략의 기본은 배웠을 텐데…. 안 되겠어. 너희는 공략이 문제가 아니야. 협력부터 연습하자.”
성하리의 뜻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성하리가 한 명, 한 명 짚으며 지적한다. 나도 그녀의 지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 공간이 울렁거리는군.’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울렁거리는 공간을 주시했다. 공간이 변했다. 웬 숲속의 고대 사원 같은 곳이 되었다.
조용히 혀를 찼다.
‘이번에도 꽝이군.’
사원에 숨어 있던 하얀 토끼들이 빼꼼 모습을 드러낸다. 지긋지긋하다.
“중요한 건 협력이야. 동료들의 위치를 신경 쓰며 싸워! 특히, 류하나! 뭐든지 혼자 하려고 하지 마!”
“…네, 아줌마.”
류하나는 손등으로 땀을 훔쳐내며 나를 힐끔거렸다.
‘뭐지. 자기에게 맞추라는 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류하나와 합을 맞춰서 싸웠다.
“마진배! 너무 앞에 나섰잖아! 김천우! 넌 좀 더 앞으로 나서서 공간을 확보해!”
뒤에서는 성하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몇 번의 전투를 더 치르고 난 뒤 일행은 기진맥진했다.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되겠네. 오늘 공략은 여기까지 하자. 내일 기회가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는 마. 돌아가서 합을 맞추는 연습은 더 해야겠지만….”
“…….”
누구도 성하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팀워크가 개판인 것도 사실이고, 전투를 치르기 힘들 정도로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오염구역에서 돌아갈 때 정화 스킬이 있으면 편해. 이렇게 정화를 사용해서….”
그녀가 빛나는 손을 내저었다. 오염된 공간이 일부가 정화되어 바깥이 보인다.
“이렇게 밖으로 나가면 돼. 오염구역을 공략할 땐 정화 스킬이 필수야. 스킬이 없으면 정화 능력을 가진 물건이라도 가져가야 해. 뭐, 이런 공간이 꼬인 오염구역은 드물지만.”
우리는 성하리의 뒤를 따라갔다.
당연하게도 무수히 많은 토끼가 우리를 습격했다. 허나 성하리가 창을 몇 번 휘두르자 토끼들이 나가떨어졌다.
‘단순히 힘만 강한 게 아니야. 지금 내 실력으로는 볼 수도 없는 고차원의 묘리가 창에 스며들어 있어.’
우리는 성하리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민박집에 도착했다.
“저녁까지 4시간은 남았어. 적당히 넓은 곳에서 손발을 맞추는 연습부터 하자.”
•••
저녁이 되었다.
샤워로 땀을 씻어낸 우리는 마당에 모였다. 모두 지친 기색이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힘들었던 만큼 성하리에게 배운 것들이 많았다.
마당 한쪽에는 솥뚜껑 위로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크으. 일을 끝내고 마시는 사이다는 각별하네. 그렇지?”
“나는 고기가 마음에 드는군.”
“내가 왜 너희랑 같이….”
김천우, 마진배, 이강후, 그리고 나는 평상 위에 앉아있었다.
“유진아. 너도 한 잔 어때?”
“아니, 난 됐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여자들이 있는 쪽이다. 여자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성하리와 이시은이 주도하고 있고, 류하나와 최다연이 보조하는 쪽이다. 전부 미녀들이라 보는 맛이 있었다.
“유진아! 마트 가서 간장이나 소금 좀 사 와줄래?!”
성하리가 나를 불렀다.
“귀찮은데.”
“아줌마! 제가! 제가 갈게요!”
김천우가 벌떡 일어났다.
“천우가? 그래. 부탁할게. 돈은 유진이한테 받아.”
“아뇨. 그 정도 살 돈은 저한테도 있어요. 혹시 더 필요한 거 없어요?”
“다른 거? 아, 음료수가 부족할 것 같네.”
“넉넉하게 사 올게요!”
김천우가 심부름하러 떠났다. 그나마 분위기 메이커였던 김천우가 사라지자 굉장히 어색해졌다.
나는 뻘쭘해 하는 남정네들을 뒤로하고 여자들을 지켜봤다.
성하리를 도와주는 건 류하나였다. 류하나는 의외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하리와 어울리고 있었다.
고기 굽는 조인 이시은은 최다연과 옥신각신하고 있다. 고기의 굽기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최다연이 실수로 고기를 태웠는데, 내가 먹는 걸 태웠다고 이시은이 타박을 줬다. 최다연 성격상 그냥 넘어갈 리 없었고.
‘여자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데… 그랬다간 분위기 못 읽는 놈으로 낙인찍히겠지.’
성하리도 여자들을 상대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
야심한 밤. 나는 방에서 나왔다. 성별끼리 방을 나눠서 사용했는데, 남자 놈들의 방에서 잠드는 게 영 쉽지 않았다.
‘이강후 이 새낀 발 냄새나고, 마진배는 코를 너무 골아. 차라리 밖에서 자고 말지.’
평상에 드러누운 나는 여자들 방을 바라봤다. 저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마 좋은 냄새가 나겠지. 그러나 저 방 안에 들어가기엔 류하나와 최다연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평상에 눈을 감았다. 밤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드르륵.
여자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실눈을 뜨며 누가 나왔는지 확인했다.
‘최다연이군.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나? 이 집은 화장실이 바깥에 떨어져 있어서 많이 불편하지. 이 집주인은 요강을 썼던 모양이지만….’
그 최다연이 요강을 쓸 리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에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다. 자는 척하기로 했다.
최다연은 평상을 지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내 옆에 드러누웠다. 뺨 쪽에 그녀의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내 옆에 누웠다고…? 뭐지?’
스윽. 하고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실눈을 뜰까? 최다연이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면 실눈을 뜨는 순간 바로 들킬 것이다.
‘천안을 사용하면 되지.’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천안은 투시 효과가 있다. 눈꺼풀을 투시해서 눈을 뜨지 않고도 상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최다연이 보였다. 최다연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린다.
‘…설마.’
천안의 다른 능력을 사용했다. 3인칭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날 내려다본다든가, 머리 뒤를 본다든가.
하늘에서 최다연을 내려다봤다. 내 옆에 누운 최다연은 조용히 오른손을 펑퍼짐한 잠옷 바지 안에 넣은 상태다. 사타구니 사이에 들어간 손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자위하고 있잖아…. 제정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