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8화 〉 1148. 아카데미의 구원자
“오늘은 인사하러 왔을 뿐이라네. 나중에 다시 보지.”
“인사하러 온 게 아니라 내 정보를 얻으러 온 거겠지.”
“…흠. 역시 나에 대해 알고 있군. 어디까지 알고 있나?”
“…….”
“대답하기 싫은 건가. 상관없겠지. 근데 지금 내게 집중하고 있어도 되나? 자네 모친이 큰 위기에 처했다만.”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눈은 보지 괴물들을 투시하고 지상을 바라봤다. 입술을 꽉 깨문 성하리가 보지 괴물들이 뿜어대는 보지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45초. 자네 모친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지. 아, 이제 41초군.”
“…이 세계가 가짜란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여기 사람이 몇 명이 죽더라도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아.”
“그렇군. 덤비게. 어미를 버리고 날 선택했으니 상대해주겠네.”
라플라스가 가식적으로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최상의 컨디션이 된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쩍. 힘을 견디다 못한 역장에 금이 간다.
폭발적인 힘으로 역장을 박찬 나는 위가 아닌 아래로 떨어졌다.
‘라플라스. 저 새끼 꼬라지를 보니 뭔가 수가 있겠지. 아마 완전 회복도 미리 알고 있었을 거야. 싸운다고 해도 죽인다는 확신은 없어.’
저 밑에 성하리가 보인다.
그녀는 가짜다. 알고 있다. 죽더라도 현실의 성하리에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가짜라도 그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콰아앙!
지상으로 떨어진 나는 지친 성하리를 끌어안고 내달렸다.
“오빠?! 저 새끼 저거 도망가는데요?!”
“시끄러.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보지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거리에 성하리를 내렸다. 성하리의 안색이 약간이나마 편해졌다.
“…저 괴물들은 어떡하죠? 한 마리 쓰러뜨리는데도 개고생했는데… 22마리라니. 히어로 협회는 대체 뭐 하는 거야.”
우리가 여기에 오기 전부터 서울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라플라스가 손을 써둔 것이다. 히어로 협회가 제대로 대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도망가자. 전투기를 꺼내오든, 미사일을 발사하든 알아서 하겠지.”
“…오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제 생각엔 저 괴물들이 움직이면 못해도 서울 절반은 날아갈 것 같은데요.”
“…….”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보지 괴물 한 마리면 몰라도 22마리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강력함은 둘째치고 크기가 문제다. 한 마리만 해도 길이 500m가 넘는다.
“오빠. 도와줘요. 저 괴물들을 처리해야 해요.”
“넌 이미 한계잖아. 나라고 해서 저놈들을 상대할 뾰족한 수단은 없어.”
“저 괴물들 약점은 눈이에요. 눈을 집중해서 공격하면 쉽게 쓰러뜨릴 수 있어요.”
“말은 쉽지.”
나는 보지 괴물들을 가리켰다.
22마리의 보지 괴물들은 천천히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그 속도는 10km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보지 바람을 계속 불어대고 있다는 거다. 심한 악취의 보지 바람은 끈적한 액체가 되어 지상을 녹이고 있었다.
나무, 콘크리트, 돌멩이 할 것 없이 주르륵 녹아내린다. 원거리로 공격한다? 저 빌어먹을 보지 바람이 장막이 되어 막고 있다.
“…바람은 저 구멍에서 나오고 있으니… 상공에서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 괴물들은 등이 더 단단해. 거대 털 같은 게 있….”
뇌리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매만졌다.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은 남들이 보기엔 어이가 없었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지만… 저 괴물들이 보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고… 등 뒤에 있는 게 진짜 털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상대할 방법을 떠올렸어요?”
“…어. 근데 내가 해야 할 이유는 없어.”
“서울이 부서질 거예요. 수십만 명이 죽을 거고요.”
“알 게 뭐야.”
“…….”
“…….”
성하리는 나를 노려봤다. 굴하지 않는다. 성하리는 이미 지쳤고 나는 생생하다. 싸우면 내가 이길 것이다. 이참에 그녀를 덮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오빠, 도와줘요. 도와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내가 벗으라고 하면 벗을 거야?”
“…그냥 전 싸우다 죽을게요.”
성하리가 창을 들었다. 그 눈동자는 흐트러짐 없다. 아직 아카데미에 입학도 안 한 주제에 두 눈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플라스를 보내고 기껏 구했는데 죽으러 간다고? 내가 한 선택과 노력이 죄다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나는 걸어가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뽀뽀 한 번 해줘. 그럼 도와줄게.”
성하리가 나를 돌아봤다.
“…….”
성하리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또다시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냈다. 그냥 효도하는 셈 쳐야겠다.
“아, 됐….”
성하리가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내 품으로 들어온 그녀는 턱과 발꿈치를 들고 내 입에 입술을 맞췄다.그녀는 1초도 되지 않아 바로 떨어졌다.
“도, 도와주기로 하신 거예요.”
“…첫 키스야?”
“아, 아닌데요. 저 키스 엄청 많이 해봤는데요.”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키스를 많이 해봤는데 그따위로 키스한다고? 장담하는데 초등학생도 이렇게 키스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아. 효도하자.’
전의를 끌어올린다.
‘보지를 지배하는 자. 그게 바로 나야. 정 안되면 폭탄 수천 발 떨어뜨리지 뭐.’
역장을 만들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이 만들어졌다.
“내가 해결할 테니 넌 여기에 있어.”
“…도와드릴게요.”
“아니, 넌 지쳤잖아. 방해만 돼.”
“…….”
영천류(影天流) 뇌음보(雷音步).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 높이까지 올라온 나는 시선을 내렸다. 시커멓다. 보지 괴물의 등이 시야를 가린다. 보지 괴물 등에서는 보지털이 춤을 추듯 꿈틀거리고 있다. 저건 촉수인 동시에 털이다.
나는 결심하고 보지 괴물 위에 수백 개의 역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역장 위로 뛰어다니며 검은색의 칙칙한 포션을 아래로 뿌렸다.
[그대를 위한 폭군] 세계에서 만든 발모약이다. 효과가 어찌나 좋은지 조금만 발라도 털이 순식간에 자라난다.
‘라플라스의 미래를 보는 능력은 권능인 가능성을 통해 가장 가능성이 큰 미래를 보는 방식이야.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모약을 꺼냈지. 다시 말해 내가 발모약을 사용하는 가능성은 지금 태어났다. 놈은 이 미래를 못 봤어. 보지 못했으니 대비도 불가능하지.’
보지 괴물의 등위를 바라봤다.
검은색 촉수, 즉 보지털이 쑤욱쑤욱 자라고 있었다. 50m가 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발모약을 계속해서 뿌렸다. 500병 정도 뿌렸을까.
하늘을 날던 보지 괴물들은 보지털 괴물이 되어 있었다. 보지 괴물들은 보지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보지 괴물들이 꿈틀거렸으나, 서로 얽힌 보지털들이 족쇄가 되어 보지 괴물들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하수구를 막은 뭉친 털을 보는 것 같군. 끔찍하다.’
나는 보지 괴물들 위로 휘발유를 잔뜩 뿌리고 벼락 한 줄기를 떨궜다. 보지 괴물들은 역겨운 냄새와 함께 활활 타올랐다. 놈들이 불을 끄기 발악한다. 이상한 액체를 뿌리고 보지 바람을 뿜으며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소용없었다. 나는 불이 꺼지지 않게 휘발유를 계속 들이부었다.
동이 틀 무렵, 보지 괴물은 시커먼 석탄 보지가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도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나는 성하리를 진령성가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빠. 우리 집에 들렀다 가요. 콜라 좋아해요? 대접해드릴게요.”
“됐어. 콜라는 너무 먹어서 지겨울 정도야.”
대답한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성하리가 고개를 들었다.
“저거 보여?”
“…뭐 있어요? 정령은 안 보이는데.”
새벽하늘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던전이 부서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원작에서는 며칠의 시간이 더 걸리니까.
‘이것도 라플라스…. 그 새끼의 영향인가.’
좀 더 이 세계를 즐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다.
“안 보이면 됐어.”
“아, 진짜 뭐예요. 뭐가 있는데요?!”
“사실 아무것도 없어. 이걸 속네.”
“아씨!”
성하리가 짜증 내며 내 어깨를 때렸다. 아프다. 내가 강하다는 걸 알고 진심으로 때리고 있다. 난 울상을 지으면서 성하리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성하리의 호감도: 42』
호감도가 높았다. 이번에 같이 싸우면서 호감도가 대량으로 오른 것이리라.
‘호감도가 낮을 때는 계기가 있으면 빠르게 오르지.’
호감도 이벤트라고도 한다.
“들어가. 진령성가 사람들이 걱정하겠다.”
“…별로 걱정은 안 할걸요? 오히려 제가 죽지 않아 돌아와서 실망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정령들도 그렇고.”
대번에 인상이 구겨졌다.
“가정 폭력이야? 내가 저 집 날려줄까?”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는 제가 맞고 다닐 여자로 보이세요?”
성하리가 맞는 상상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쪽이 더 상상하기 쉽다.
‘원래 성하리는 가출했었는데… 그게 아카데미 중퇴한 시절이었나…?’
떠오르는 기억을 치우고 성하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빠. 저한테 반했어요?”
“……이게 갑자기 미쳤나. 지금 복수하는 거야?”
“사랑의 도피. 저랑 해볼래요?”
“사랑의 도피는 무슨. 가출하고 싶나 보네?”
“…저 나름 진심인데요.”
성하리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어리숙한 뽀뽀가 아니라 혀까지 사용한 진짜 키스.
농밀하게 입술을 비비고, 움직이지 않는 혀를 농락하며, 내 타액을 그녀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녀의 하얀 턱을 타고 타액이 흐른다. 누구의 타액인지는 모르겠다.
입을 뗐다. 성하리의 머리는 토마토로 변했다.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이게 키스야.”
“미, 미친 변태 새끼가!”
“악!”
정강이가 차였다. 나는 깽깽이 발로 뒤로 물러났다. 성하리가 날 째려보며 씩씩거렸다.
『성하리의 호감도: 45』
호감도가 올랐다. 나는 실실 쪼개며 성하리에게 말했다.
“사랑의 도피 말인데. 나중에 하자.”
“할 것 같아요?!”
“잘 지내.”
정강이를 한 번 더 차이기 전에 후다닥 도망갔다.
나는 어제 앉았던 벤치에 앉아 정령안과 천안을 사용해 성하리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집안에 들어간 성하리는 아버지인 성한구와 할아버지인 성명생에게 혼나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지만, 속옷이 보일 정도로 교복이 엉망이라 성한구와 성명생은 깜짝 놀란 모양이다. 제법 살벌하게 혼내는데 성하리는 기죽기는커녕 입술을 삐죽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 잔소리로 치부하는 것이다. 대단한 여자다.
하늘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나자 던전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특수 던전, ???에서 퇴장합니다.』
•••
던전 밖으로 나온 나는 쓰러져 있는 류하나를 발견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고, 베인 상처로 인해 피가 줄줄 흐른다.
“류하나…!”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포션을 소환해 그녀를 치료했다.
류하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얼굴이다.
“…졌어. …져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