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5화 > 1185. 15일
나는 시바타가 나왔던 별채로 향했다. 놈이 나왔다고 하니 평범한 별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별채 안에 무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깔끔한 외부와 달리 엉망이군.’
별채 내부는 어수선했다. 부서진 장식 조각과 쓰레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간간이 피로 물든 얼룩도 보였다. 구석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다. 평소에 시바타가 이곳에서 지내던 것임은 확실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직감이 말하고 있다. 이곳에 뭔가가 있다.
‘일단 여기에 있는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볼까.’
침대 옆에 있는 문이 정답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강철 문이다. 손잡이는 없다. 대신에 문을 열기 위해선 카드키가 필요하다. 신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최첨단 시설이다. 철문을 손등으로 두들기던 나는 뒤로 물러났다.
‘못 부수겠는데? 카드키가 필요하겠군.’
나는 돌아가서 별채를 뒤지기 시작했다. 시바타가 지키고 있던 곳이다. 어쩌면 시바타가 쓰던 카드키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맞았다.
시바타의 책상 속에 고이 놓인 카드키를 발견했다. 카드키를 들고 철문에 다가갔다. 삐빅. 철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었다.
“당신 누구… 커어어억!”
연구원으로 보이는 자들은 보이자마자 죽였다.
그리 많은 인원수는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인원수는 4명이 전부였다. 나는 연구원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여기가 연구실이라는 건 알겠어. 뭘 연구하는지도… 알겠군.’
방 하나에 표본들이 잔뜩 있었다. 토막 난 인체, 피부가 부풀어 오른 사체.
인체 실험을 해온 게 분명했다.
‘시바타가 인체 실험의 성공작이겠지.’
연구실을 구석까지 둘러봤다. 무녀는 없었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나는 신사 안쪽으로 이동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적을 경계하며 천천히 걸었다.
시체를 발견했다. 검은 옷을 입은 시체였다.
‘…내가 죽인 놈이 아니야. 애초에 여기까지 들어오지도 않았고…. 사인은… 칼로 목이 베였네.’
그것도 내가 가진 일본도처럼 긴 칼이 아니다. 상처를 보면 나이프 길이의 칼이다.
‘하가와 료코군. 그녀가 죽인 놈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시체 몇 구가 더 보였다. 앞서 보았던 시체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죽어 있다. 전투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암살이 확실했다.
‘역시 닌자군.’
하가와 료코의 실력에 감탄하면서 앞으로 걸어간다.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나무 문이 보였다. 나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문을 노려봤다. 감각을 집중한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적이 매복하고 있다고 하기엔 너무 어설퍼.’
매복을 통한 기습이 목적이었다면 철저하게 기척을 없앴을 것이다.
바깥에 있는 시체와 안에서 들리는 기척.
‘상황은 이미 끝난 모양이네. 나카가미 리사와 하가와 료코가 내 생각보다 잘 해줬어.’
당당하게 나무문을 열었다.
촛불이 장식된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은 높았고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에 놓인 것은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그림이다. 아마도 이 신사가 모시는 산신을 상징하는 거겠지.
중요한 건 제단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세 명의 미녀들이었다.
두 명은 이미 내 품에 안겼던 여인들이다. 나카가미 리사와 하가와 료코. 당당하게 서 있는 그녀들의 옷에는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그녀들의 손은 각각 손도끼와 단도를 쥐고 있다.
그녀들 사이에 강제로 무릎 꿇린 채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두 명에게 위협당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여인이었다. 무녀복을 입은 그녀는 깊은 눈동자로 날 빤히 쳐다본다.
오오카루마 마을의 흑막이자, 이 신사의 무녀. 카미노야마 카구라.
“왔어? 생각보다 늦었네?”
나카가미 리사가 말했다.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를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입만이 아니라 몸도 미세하게 떨고 있다. 나는 그녀의 하체, 사타구니를 빤히 바라봤다. 핫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중심 부분에 얼룩이 엿보였다.
‘사람을 죽이면서 흥분했군. 이미 몇 번 간 것 같은데…. 지금도 가기 직전인 것 같고.’
나카가미 리사는 이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드는 듯했다.
“…왜 너 혼자 온 거야?”
하가와 료코가 내게 물었다.
“모리 선배랑 후도 선배, 네바타 선배는 죽었어. 개조 인간이 보통이 아니었어야지.”
“……쿄시로는?”
“와다는 도망쳤어.”
“…와다가 도망쳤다고? 거짓말하지 마. 와다가 그럴 리 없어.”
“난 사실을 말했어. 믿는 건 네 자유지.”
“……와다가 무사하다면 됐어.”
하가와 료코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의 반응이 약했기 때문이다. 나를 공격하진 않더라도 격렬하게 반응할 줄 알았다.
나는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보는 거지?”
무녀는 여전히 차분했다.
“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오오카루마 신사의 무녀인 카미노야마 카구라입니다.”
“성유진이야. 조센징이지.”
하가와 료코가 움찔거렸다. 뭐만 하면 날 조센징이라 부르는 게 그녀였다. 내가 그녀를 힐끗거리자,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한국인이시죠.”
“조센징도 같은 말이 아닌가?”
“조선은 이미 사라진 국가입니다. 저는 한국에 대한 편견이 없습니다. 성 님께서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는 거겠지. 자신의 아래에서 죄다 평등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
무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성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뭘?”
“성 님의 정체에 관해서입니다. 저는 재팬 페스티벌 스터디 서클원들에 대해 최대한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마을을 통제하기 위해서죠. 성 님의 배경은 평범했습니다. 부친은 대기업 과장, 모친은 전업주부, 여동생은 중학생. 성장 배경 또한 어디 하나 이상한 곳이 없었죠. 하지만 제가 직접 경험한 성 님은… 한국 정부의 특수 요원이라 해도 믿을 수 없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 님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죠?”
정말 내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다.
하긴 내 존재로 인해 무녀의 계획이 철저히 박살나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야.”
“…농담이신가요?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여자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
“…….”
무녀의 코앞에서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다.
우뚝 선 자지가 무녀의 코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자지에 무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무녀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
“…저를 범할 생각이시군요.”
“너 같은 미녀가 코앞에 있으니… 자지가 벌떡 서버렸어. 내 자지를 화나게 했으니 책임져야지.”
“외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해가 뜨면 저와 손을 잡은 야쿠자들이 무장한 채 마을로 올 겁니다.”
“그런데?”
“…당장 산을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산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방법이 뭔데?”
“여기서 끝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잊으시죠. 이 마을에선 어떠한 일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본 것들은 모두 한여름 밤의 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서클 부장이었던 모리 선배의 얼굴이 지금도 아른거려…. 모리 선배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오늘 일이 생각날 것 같은데.”
모리 마사히로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내 시선에는 무녀의 깔끔한 얼굴만 보였다. 그녀를 범할 생각에 자지 끝에서 투명한 쿠퍼액이 맺혔다.
“…사죄의 뜻으로 여러분 각자에게 10억 엔을 드리겠습니다.”
10억 엔.
한화로 대충 100억.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배팅할 수 있는 걸 보면… 사업이 꽤 큰가 보군. 역시 일본 정부도 엮여 있나.’
나는 무녀의 양옆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 세계는 퀘스트 세계다. 100억이 아니라 100조를 주더라도 관심 없다. 허나, 그녀들은 다르다.
“리사 선배. 어떻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좀 끌리네. 10억은 엄청나니까. 하지만… 이 여자는 야쿠자를 부릴 수 있잖아. 나중에 야쿠자를 보내 우릴 죽이면? 죽으면 10억이고 뭐고 없잖아.”
“맹세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일은 끝입니다. 여러분에게 절대로 보복하지 않겠습니다.”
무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깔끔하고 차분한 음성은 절로 믿음을 갖게 한다.
저 발성법도 일종의 기술이었다.
“료코. 너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가와 료코는 눈살만 찌푸리며 대답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지금은 우리가 우위에 있다고 해도… 야쿠자들이 보복해오면 답이 없어.”
“무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네가 선택해. 넌 평범하지 않으니까.”
“료코 말이 맞아. 네가 선택해, 유진. 나도 네 뜻에 따를게.”
담담하던 무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의도 중 하나에는 돈으로 내분을 유도하려는 의중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의견이 갈리면 시간을 끌 수 있으니까. 무녀가 예상하지 못한 건 그녀들의 성격이다.
하가와 료코는 직접적으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닌자처럼 뒤에서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 내게 선택권을 넘긴 것도 그런 이유겠지. 돈에 관심 없기도 하고.
나카가미 리사도 돈에 크게 관심 없다. 그녀를 흥분하게 만드는 건 돈보다는 원초적인 살육이니까. 그녀는 현재 내게 빠져있다. 앞으로도 나와 함께하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는 안전을 원해. 네 제안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하니까. 네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군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까? 저는 파멸하겠군요. 하지만 여러분들도 죽을 겁니다. 도움이 오기 전에 야쿠자들이 올 테니까요.”
“널 인질로 삼으면?”
“야쿠자들도 멍청하지 않습니다. 저를 죽이고 꼬리를 자르겠죠. 물론 여러분들도 정리할 테고요. 그리고 야쿠자는 여러분의 가족에게도 보복할 겁니다. 그런 족속들이니까요.”
“협박인가. 무섭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입에 자지를 찔러넣었다. 마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기에 자지는 그녀의 입안에 쏙 들어갔다.
“우웁?!”
무녀는 바로 머리를 뒤로 빼며 자지를 뱉어냈다. 짧았지만, 부드러운 입술과 촉촉하게 젖은 혀를 확실하게 느꼈다.
무녀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아마 내 쿠퍼액이 섞여 있을 거다.
“이게 여러분의 선택인가요? 좋습니다. 모두 같이 지옥으로 가죠. 제가 여러분에게 목숨을 구걸하리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입니다.”
“오해하지 마. 이건 그냥 장난이니까.”
나는 자지를 껄떡거렸다. 나카가미 리사는 군침을 삼켰고, 하가와 료코는 날 조용히 노려봤다.
“기존에 있던 선택지가 마음에 안 드니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야지.”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하는 사업에 우리도 끼워줘.”